235화: 말할 수 없는 일
“계 공자의 시, 확실히 좋은 시지.”
영원은 정말 공교롭게도 아라를 딱 가리는 자리에 와서 섰다. 마치 벽처럼 계소영과 아라 중간에 선 영원의 모습에 아라는 고개를 숙이고 영원의 옷자락만 바라봤다. 물러나고 싶지 않은데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서 한 걸음씩 물러서서 천천히 떠들썩한 무리로 돌아갔다.
여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칠야도 소계가 지은 시를 좋아하는가?”
“좋아한다 아니다,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고. 하하하. 한 구절도 알아보지 못했거든.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건 분명 좋은 시겠지.”
계소영은 웃음을 터트렸고, 이신은 웃음을 참았다. 이렇게 어리석은 척하다니, 쉬운 일이 아니지.
여염도 쥘부채로 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 한림원 학사들이 자네가 성장했다고 칭찬하는 걸 들었는데.”
영원은 한 걸음 다가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비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여 형,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 내가 성장했다고 칭찬하는 건, 내가 준 선물이 성장했다는 걸세.”
이번엔 이신이 웃음을 뿜었고 계소영이 웃음을 참았다.
“칠야, 학문이 무공만큼 뛰어나진 않겠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뭐 하러…….”
“좋든 말든 알게 뭐람. 나는 학문을 배울 필요가 없는걸.”
영원이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소영의 말을 잘랐다. 뭐라고 더 말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네 사람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자, 다다가 단향목 상자를 들고 서 있고, 아라와 류만이 양쪽에 서서 주렴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 주렴은…….”
여염이 놀라 고함쳤고, 계소영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주 귀비의 주렴 아닌가? 아니야,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야. 적어도 크기가 훨씬 더 큰데?
주 귀비의 생신 그날, 그와 여염 모두 어른들을 모시고 궁으로 생신을 축하하러 갔었고 사고를 일으킨 그 진주 주렴을 직접 봤었다. 오늘 이 진주 주렴은 또 무슨 일을 일으키려나.
이신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동이 영원의 부탁을 받고 진주 주렴을 내놓은 일은 알고 있었다. 물건도 봤었고.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저 주렴이 이동이 내놓은 것임을 확신했다.
영원이 이걸 아라에게 준 건가? 정말로 어떻게 된 거지? 저 주렴은 사람의 손을 몇 번 거친 것인데. 이야에게 듣자 하니 하가에 팔았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아라 손에 들어갔을까. 게다가 이렇게 거들먹거리며 꺼내다니.
큰일이 벌어지겠군.
이신의 마음 깊은 곳에 놀라움과 함께 경계심이 솟구쳤다.
영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육을 바라봤다. 주육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라와 류만이 주렴을 전부 꺼내기 전에 쏜살처럼 달려가서 진주를 덥석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진주로 만든 주렴임이 너무나 확실한 걸 두 눈을 부릅뜨고 확인한 그는 고래고래 고함쳤다.
“진주 주렴이냐? 네가 어찌 이걸 가지고 있어? 네 것이냐? 누가 준 것이냐!”
모두의 시선이 아라에게 집중되었고, 아라는 뿌듯하면서 수줍은 얼굴로 애교를 부리며 주육을 밀어냈다.
“비밀이에요.”
영원은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래도 아라가 재능이 있긴 했다. 예를 들면 연기 쪽으로.
“이건 큰일이다! 얼른 이야기해라!”
주육은 다급해서 발을 굴렀다.
주육은 원래도 세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게다가 이 주렴을 사왕야에게 넘길 때 지극히 드문 물건이라고 영원이 확실히 말했었다. 이런 진주 주렴은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운도 좋아야 한다고, 대왕야도 이런 주렴을 사지 못해서 진주를 사서 직접 주렴으로 만들려고 한 것이라고 했었다.
그는 이 주렴이 바로 주 귀비의 그 주렴이라 여겼다. 그러면 이건 장물이 된다!
“누가 선물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겠죠? 누구인지는 말 못 해요.”
아라는 뿌듯한 얼굴로 종종거리며 주렴 뒤로 물러서서 류만을 바라봤다.
“언니, 이 주렴으로 옷을 만들면 어떨까?”
“네가 말하지 않겠다면…….”
주육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묵칠이 그를 잡아당겼고, 영원도 성큼 다가가서 묵칠의 손에 잡힌 주육을 끌어당기며 귓속말했다.
“이건 우리가 넘긴 게 아니다. 우리가 넘긴 건 이거보다 질이 떨어진다.”
“뭐라고? 그럼…….”
주육이 더 놀라 소리를 치려는데, 영원이 주육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나가서 대뜸 한 대 쳤다.
“소리는 왜 질러! 왜 이리 못났어!”
“형님, 내가 못난 게 아니라, 저 주렴! 하나밖에 없는 거라고 사왕야에게 호언장담했단 말이지. 그런데 또 튀어나왔어. 우리 것보다 더 좋은 물건이. 사왕야에게 장담했다고! 사왕야는 성격이 고모님이랑 똑같아. 뭐든 최고가 아니면 안 돼. 최고는 다 자기가 가져야 한다고. 이제 어떡하지?”
주육의 걱정하는 모습에 영원은 할 말을 잃고 문 이야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조금은 똑똑한 게 낫구나. 너무 멍청하면 미끼를 던져도 뭘 물어야 할지 몰라 물지를 못하니.
주육의 이런 모습에 영원은 문도의 그 말이 지극히 옳음을 깨달았다.
“그런 건 생각할 것 없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이 일을 사왕야에게 알려라. 부친도 괜찮다. 휴, 또 일이 터지겠구나. 곧 새해인데 조용히 며칠 지낼 순 없나.”
“무슨 일?”
영원의 심란한 얼굴에 주육이 얼떨떨해하자, 영원이 참지 못하고 다시 주육의 머리를 내리쳤다.
“멍청아! 아라 모습 못 봤냐? 도대체 생각이 있어 없어! 눈이 없나? 저런 진주 주렴을 선물할 만한 사람, 누군지 말 못 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누군데?”
주육이 망연한 듯 묻는 말에 영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누구냐고? 누구겠느냐! 아라의 손님 중엔 누가 가장 큰손이냐? 그만 이야기하련다. 심란해 죽겠다. 얼른 가서 네 부친을 만나라. 부친께 말씀드려! 나도 돌아가련다. 제길. 허구한 날 성가신 일뿐이군. 며칠도 조용히 지낼 수가 없어!”
한다면 하는 영원은 손을 휘저으며 사라졌고, 주육은 뒤쫓아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연향루 문 앞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별안간 “아!” 하고 외쳤다.
알았다! 영원 형님이 말한 큰손이 사왕야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사왕야가 아라에게 선물한 거란 말인가? 세상에, 시끄러워지겠군!
주육은 깨달음을 얻자마자 곧바로 수국공부로 달려갔다.
영원과 주육이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걸 고자의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자의는 진주 주렴을 보는 순간 어젯밤에 아라를 찾아온, 다다가 말한 급하고 중요한 일을 떠올렸다. 어제 사환을 불러서 물어본 뒤에 사왕야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보아하니 저 진주 주렴도 어제 사왕야가 아라에게 준 것인 듯했고.
아라는 왕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사왕야는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손님을 받게 했다. 사왕야가 아라에게 주는 보상일까? 분명 그렇겠지?
하지만 이 일을 귀비가 알게 되면……. 귀비가 모르고 넘어갈 리가 있나. 귀비의 성격으로 분명 크게 화를 내겠지. 사왕야, 다른 것도 아니고 하필 진주 주렴이라니. 미쳤구나, 정말!
고자의는 놀라고 머리가 복잡해서 누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라 생각도 나지 않아서 대충 핑계를 대고 서둘러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 이 큰일을 부친에게 고했다.
진주 주렴이 나타난 순간, 여염, 계소영과 이신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인사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사람도 아무리 아둔해도 이상한 걸 알아차렸다. 영원과 주육이 가버리고, 주인인 고자의도 서둘러 나갔다. 사람들은 우르르 흩어졌고 떠들썩하기 짝이 없던 연향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조용해지고 아수라장만 남았다.
류만은 아라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라가 진주 주렴을 보여줬을 때 그 자리에서 귀띔해주었다. 첫째, 온 경성에 이런 진주 주렴이 있는 사람은 주 귀비뿐이고, 주 귀비가 몹시 아낀다고. 둘째, 이 주렴 때문에 생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 셋째, 주 귀비가 아라를 못마땅해서 죽이려고 했었던 일. 넷째, 이 주렴을 보낸 사람의 정체가 수상하니, 이 주렴은 상자에 넣어서 꼭꼭 숨겨두는 게 좋겠다고.
그런데 하나하나 짚어주었는데 아라는 전혀 듣지 않았다. 보물이 있는데 자랑하지 않는 건 출세하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굳이 자랑하겠다고 했다.
그래, 이제 잘 되었지. 주렴을 거두기도 전에 사람들이 놀라서 달아났으니.
휴. 나도 가자. 아라 이 아이, 며칠이나 목숨이 더 붙어 있을지.
운수는 몇 걸음 뒤에서 태연하게 지켜봤다. 그녀는 심지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자기 주렴을 치우는 아라와 아라 곁에서 한숨을 내쉬는 류만을 번갈아 보다가, 류만이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는 걸 보고는 주저하다가 아라에게 인사하고 얼른 류만을 따라갔다.
“목이 너무 말라. 언니 방에 가서 차 한잔하고 갈래.”
두 사람이 함께 각문으로 나가는데 두 행수가 맞은편에서 다가왔다. 류만과 운수는 두 행수에게 예를 갖추고 길을 비켜주었다. 두 행수가 몇 걸음 내디뎠을 때, 류만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행수 어른.”
두 행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류만이 앞으로 다가갔다.
“아라의 그 주렴, 행수 어른도 알죠?”
두 행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라를 타이르세요. 그 주렴…….”
류만이 입을 뻐끔대는 모습에 두 행수가 희미하게 웃으며 류만을 토닥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착한 아이인 걸 알았다. 아라는……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나도 생각이 있고.”
류만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이 있다고 하시니 됐어요. 오지랖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럴 리가 있니. 난 너와 아라를 똑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운수도. 가서 이야기 나눠라. 난 가서 치우는 걸 봐야겠다.”
두 행수는 깊은 근심을 감추고 웃는 얼굴로 두 사람과 인사했다.
운수는 류만의 팔짱을 끼고 딱 달라붙어서 주저하며 속삭였다.
“언니, 난……. 언니, 모르겠어? 아라도 어쩔 수 없어서 저러는 것 같아.”
“우리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래도 이상해. 언니, 기억해? 아라는 육소야를 싫어해. 주 육소야가 건드리는 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변했지. 그리고 양 구야 때도. 다다에게 물어봤었는데, 주 육소야를 찾아가라고 한 사람이 있었대. 누굴까?”
류만은 얼떨떨해져서 한참 만에 겨우 다시 걸음을 뗐다.
“그걸…… 내가 깜빡했네. 아라는 거들먹거리고 내보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야. 오늘 다 보는 앞에 주렴을 선보인다고 해서 이상했지. 내가 어떻게 됐었어. 휴. 아라도 참. 대체 누구 손을 잡은 거야. 아라가 속셈이라는 게 있니? 우리는 신발 바닥에 붙은 진흙보다 하찮은 기녀잖아. 휴. 됐어. 그만하자. 우리 같은 사람이 누굴 신경 쓰겠어. 내 일만으로도 벅차.”
“응.”
운수는 침울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했고, 두 사람 모두 말없이 비연루로 향했다.
소문이란 참 신기한 것이, 생기자마자 바람보다 더 빠르게 날개를 달고 퍼지곤 한다. 다음 날 조회가 끝나기도 전, 주 귀비는 보배 덩어리 아들을 꼬드긴 아라가 자기 것보다 백 배는 좋은 주렴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배 아들이 선물한 거라지 않나.
주 귀비는 숨이 턱 막혀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당당한 귀비가 기녀만도 못하다니. 차라리 죽자.
조회가 끝난 후, 황상이 논의할 일이 있다고 사황자를 붙잡았고, 대황자는 대충 둘러대고 나와서 주 귀비 궁으로 직행했다. 넷째가 기녀에게 진주 주렴을, 어머니에게 준 것보다 백 배는 좋은 진주 주렴을 선물한 일을 제 입으로 이야기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