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34화 (234/463)

234화: 재자들과 파락호들

이동은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가 돈이 벌리고, 한 푼이 두 푼, 열 푼이 되고 백 푼이 되는 걸 보는 그런 느낌, 아마 당신이 병사를 거느리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 것, 학자의 이름이 방에 적히는 것과 다름없을 거예요. 난 장사하는 게 좋아요. 돈이 생기는 느낌이 좋고요. 산처럼 쌓이는 황금, 보석을 보는 느낌도 좋고요.”

영원은 놀란 듯이 이동을 바라봤다. 이런 말을 하다니. 무시할까 봐 걱정되지 않는가? 물론 그는 그녀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도 돈이 생기는 느낌을 좋아하고 황금, 보석이 산처럼 쌓이는 걸 보는 게 좋으니까.

“당신 누님은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지 않겠죠.”

이동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영원은 잠시 생각했다.

“누님은 계산을 잘 못합니다. 돈 계산도 많이 하면 어지럽다고 하고. 어릴 때 적잖게 속여서 돈을 뺏었죠.”

“저마다 장점이 다르고 좋아하는 게 달라요. 보세요. 저에게 누님처럼 병사를 이끌고 싸우라고 하면 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예요. 누님에게 저처럼 허구한 날 장부를 보면서 돈 계산하라고 하면, 아마 누님도 못 살겠다 싶겠죠.”

영원은 빤히 이동을 바라봤다. 이렇게 말한 이상, 한마디만 더 하면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이야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사람이 살면서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사는 게 제일 힘들다고요. 저는 행운이에요. 의외의 일만 벌어지지 않으면 한평생 장사하며 살 수 있겠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평생 살 수 있어요. 누님의 운명이 고달픈 건, 처지 때문만은 아니에요. 삶이 편치 않아서도 아니고요. 설령 칠야 덕분에 처지가 변한대도 다시는 병사를 이끌고 전장을 누비지 못해요. 어떤 부귀영화도 그 바람을 잠재우지 못할 거예요.”

영원은 가슴이 쿡 쑤셨다. 그랬다. 자신의 운이 좋아서, 오가아가 천하에 군림하고 누님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태후가 된다고 해도, 누님은 예전처럼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지 못한다.

“장공주는 누님보다 조금 나아요. 선택의 여지가 아직은 있죠. 운이 안 좋으면 누님처럼 될 거예요. 아무리 부부가 은애하고 자손이 현명하고 효성이 지극하다고 해도 바람을 잠재우지 못하죠. 하지만 어쩌면 나처럼 이렇게 자기가 바라는 대로 홀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평생 살지도 모르고요. 누가 알겠어요.”

이동의 말이 뚝 그쳤다. 영원은 이동을 빤히 바라볼 뿐,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장공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구나. 장공주의 생각을 알려주려는 것이었어. 장공주가 혼인하지 않는 이유가 알고 보니 그냥 혼인하고 싶지 않아서였구나.

“낭자, 장공주가…… 내 말은 장공주도 압니까?”

영원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런데 왜 혼란스러운지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그런 혼란스러움 때문에 말도 꼬였다.

“뭘요?”

이동은 살짝 눈이 커져서 영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영원은 멈칫하다가 이내 깨닫고 이마를 툭툭 쳤다.

“내가 어떻게 됐지. 방이 좀 덥군요. 우린 그냥 한담을 나누는 거였지. 누님은…… 누님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저는 말이죠, 낭자 이야기, 음, 축하합니다. 문도의 말이 맞아요. 사람이 편안하게 사는 게 가장 힘듭니다.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영원은 이동이 빙긋 웃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그 귀걸이, 참 예쁘군요.”

“네, 알아요. 전 이렇게 금빛 찬란하고 번쩍거리는 보석이 좋아요.”

이동이 고개를 흔들자 귀걸이가 따라 흔들렸다. 금과 보석이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늦었네요. 반루에도 들러야 해요. 칠야, 이제 돌아가셔야죠.”

이동이 은빛 종을 흔들고 화항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수련과 녹매가 들어와서 신발을 신기고 두봉을 펼쳐 걸쳐주었다. 이동은 매무새를 다잡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영원은 아직 화항에 앉아서 이미 흔들림이 멈춘 휘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참 만에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올 때 들렸던 촘촘하고 경쾌한 주판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작은 마당은 온통 고요했다.

느린 걸음으로 마당 문을 나서서 밖으로 나간 그는 입구에 서서 마당을 뒤돌아보고는 걸음을 서둘러 힐수방을 벗어났다.

그날 밤 빈손으로 돌아간 고자의는 밤새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보들보들한 아라의 모습이 보이는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입가에 작은 물집 몇 개가 부풀어 있었다.

아라, 절대로 한 번 품고 말 것이다!

곧바로 연향루로 가?

고자의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당장 지웠다. 묵고 가겠다는 말을 연향루에 보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라는 말도 못 할 정도로 예의 바르게 굴었지만, 한 번도 그를 따로 모신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연회를 열고 분위기부터 달궈야겠다. 어제, 그저께처럼.

하지만 그의 부친 고서강은 가난한 서생 출신이었고, 지금은 집안에 돈이 부족하지 않지만 부친은 여전히 청렴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한 달 월전은 모임 한 번이면 사라질 돈이라, 연향루에서 연회를 열려면 1년 월전도 부족했다.

나는 부족하지만 돈 있는 사람이 있지!

고자의는 전혀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사환을 시켜 탕호우를 불렀다. 오늘 밤엔 그와 함께 연회를 열 생각이었다.

영원은 고자의의 초대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 진주 주렴을 세상에 드러낼까 고민 중이었는데 고자의가 기회를 준 셈이었다. 졸린 사람에게 베개를 대준 격이랄까.

영원은 경성에 있는 모든 파락호 중에 공인된 우두머리였고, 파락호들의 풍향계였다. 그가 어느 연회에 참석한다? 그럼 그 연회는 규모가 있고 재미있을 것이 틀림없어서 가 볼 만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상인 가문 자제인 탕호우와, 재자들 모임에서 굴러먹던 재자 고자의의 요청은 참으로 모처럼 서생들과 파락호 두 모임의 정예 인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고자의와 탕호우가 연향루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식은 아침부터 연향루에 전해졌다. 두 행수가 비연루에서 열려고 했으나 아라가 한사코 안 된다고 했다. 행수는 할 수 없이 사람을 불러서 온 마당에 천막을 치고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종일 바삐 움직인 끝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고자의는 당연히 여염과 계소영을 초대했고, 근래 반년 동안 여염, 계소영과 그림자처럼 붙어 다닌 이신도 청첩을 받았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속셈과 아라가 다시 강호에 나온 데 호기심을 품고서 초대를 받아들였고 다들 일찍 연향루에 도착했다.

이신은 처음으로 연향루에 발을 디디는 것이었고, 계소영은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횟수로 연향루를 다시 찾은 셈이었다. 그리고 여염은 두 사람과 비교하면 많은 편으로 열 번까지는 아니라도 여덟 번은 되었다.

문 앞에 마중 나온 아라는 정중하게 무릎을 구부리며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앞장서서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신은 아라를 살폈다. 아라 소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고 호기심이 없을 수 없었다. 요염하고 아름다우리라 짐작했지만, 이토록 법도를 지키는 신중한 모습일 줄은 몰랐다.

경성의 기녀까지 다 이런 모습이니, 천자의 발아래 경성은 역시 모든 것이 범상치 않았다.

계소영은 아라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연향루는 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당이 있었는데, 언제 이런 모습으로 바뀌었을까? 역시 장사가 잘되는 모양이군. 음, 잘 꾸몄어. 우아하고 운치 있군. 기녀의 안목이 경성 대다수 집안보다 훨씬 낫네.

여염은 들어서자마자 누가 왔는지 재빨리 살폈다. 참석한 사람을 대충 가늠하고는 다시 시선을 아라에게 돌려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아름답게 틀어 올린 추마빈(墜馬鬢)엔 진주 비녀 하나만 꽂았고 분홍빛 큰 진주 귀걸이를 건 모습이 매우 상큼했다. 진분홍 웃옷, 연분홍 비단 치마 위에 하늘색 겉옷을 여미지 않고 걸친 것이 상큼하면서 요염했다.

여염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계소영을 쿡 찌르려다가 그가 고개를 들고 천장 지붕을 보는 걸 보고 돌아서 이신을 찔렀다.

“보게. 경성 제일이란 말이 명불허전이 아니지?”

이신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요염함은 흔하지 않지.”

“역시 잘 아는군.”

여염이 엄지를 세우며 칭찬하자, 이신은 제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면서 부채를 들어 여염의 엄지를 툭 쳤다.

“내가 알긴 뭘 알아. 알아도 자네가 알겠지.”

“정말 아는 사람은 따로 있지.”

여염은 아프다고 손가락을 문지르며 족자 앞에 멈춰서 눈을 찌푸리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계소영을 가리켰다. 이신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계 형이 진짜 군자지.”

아라는 이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제게 눈길도 주지 않는 계소영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영원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도착했다. 그가 들어서자마자 방 안의 분위기가 느닷없이 달아올랐다. 주육은 ‘영원 형님!’ 하고 부르면서 모두를 제치고 앞으로 달려가 영원을 맞았다. 영원은 주육 어깨에 팔을 걸치고 다른 손으로 주육과 한 걸음 차이로 달려온 묵칠을 두드렸다.

“자의가 한턱낸다고 하니 빨리도 왔군. 내가 초대할 땐 이렇게 빨리 온 걸 못 봤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주육이 얼른 해명하려는데 묵칠은 역시나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칠 형님도 빠른 편 아닌가? 우리가 연회를 열 때 이렇게 빨리 온 적 없으면서?”

고자의가 눈이 가늘어져라 빙그레 웃으며 마중 나왔다.

“말하는 것 좀 보게. 왜? 내가 연회를 자주 열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건가? 칠야, 양해해주게. 내년 춘시가 끝난 뒤엔 매일매일 초대하지!”

“좋지! 그 말만 기다렸다. 다들 잘 기억해 둬라. 내년 춘시가 끝나면 고 오랑이 매일매일 우리를 즐겁게 해준다고 했다. 음? 첫 연회는 네가 열면 안 되지. 내가 한턱낸다. 그리고 소육, 소칠이 네 급제를 축하해 줄 거다.”

“그럼 칠야의 덕담에 기대볼까?”

모든 이가 한마디씩 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가운데, 고자의가 빙긋이 웃으며 영원을 안으로 안내했다.

여염과 계소영, 이신 세 사람은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영원과 영원으로 인해 떠들썩해진 분위기를 지켜봤다.

여염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영원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로군. 두어 마디 만에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재주며,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천부적 재능은 할아버님도 따라잡을 수 없겠어.

음, 할아버님은 영원과 동류는 아니지. 할아버님은 다가가기 쉽고 나서지 않는 온화한 분이지. 할아버님은 봄바람처럼 저도 모르는 사이 사람 마음을 끌어들이고, 영원은 여름에 만개한 꽃처럼 강렬하게 사람을 사로잡지.

계소영은 살짝 어두워진 눈빛으로 영원을 바라봤다. 큰 간신은 충신처럼 보이고 큰 악은 선처럼 보인다는 게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분명 속셈이 깊고 정도(正道)를 벗어난 생각을 품었는데 겉보기엔 이렇게 속이 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꾸미니 말이다.

이신은 자기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마음으로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 자주 이동의 후원에서 그녀를 만나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이동이 감추지 않았다. 진지한 일로 누이를 만나는 것이고 모두 직접 이야기하는 게 나은 일인 것도 맞지만, 마음이 복잡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영원이 나타나서 일으킨 파장이 사그라들자마자 비파 소리가 울렸다. 운수가 비파를 뜯으며 계소영이 얼마 전에 지은 시를 읊었다. 아라가 잔을 들고 계소영 앞에 들어 올렸다.

“계 공자가 지은 시를 얼마나 많이 읊었는지 몰라요. 계 공자를 뵙게 되면 반드시 술 한잔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죠.”

“내키는 대로 지은 거라 입에 올릴 만한 것이 아니다.”

계소영은 아라에게 잔을 받아서 단숨에 마시고 잔을 다시 아라에게 돌려주고는 돌아서서 여염과 이야기했다. 여염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아라를 힐끔 바라보고는 빙긋 웃으며 계소영을 놀리려는데, 영원이 세 사람 뒤에서 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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