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33화 (233/463)

233화: 말을 전하다

영원은 말문이 턱 막혀서 반박할 길이 없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들어 메마른 가지를 감상했다.

“이 일에 대해 칠야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 이야도 고개를 들었다. 메마른 가지, 푸른 하늘, 뭐 볼 게 있다고.

“열 손가락을 다치느니 차라리 손가락 하나 잘리는 게 낫지.”

영원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 번째부터 자를 수 있다면 제일 좋고요.”

문 이야는 유감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첫째가 넷째보다 훨씬 자질이 떨어지니 먼저 잘리는 건 첫째일 수밖에 없겠군요. 거리에서 채찍을 휘두른 일로 첫째는 이미 글렀어요. 휴. 아쉽습니다.”

“아쉬울 게 무어야. 만사 우리 뜻대로 진행된다면 막료가 무슨 필요 있나.”

영원이 정곡을 찌르자 문 이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 있습니다.”

“이야, 이야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가 글렀다는 건 조정 대신의 생각, 그리고 주 귀비의 생각입니다. 황상은…… 모를 일입니다. 넷째는 첫째가 텄다는 걸 알아도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죽어야 안심하겠지요. 황상, 주 귀비, 첫째와 넷째의 응어리가 단단해질수록 좋습니다.”

문 이야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친어미와 아들도 응어리가 깊으면 마찬가지로 칼을 겨눕니다. 정이라는 건 믿을 게 못 됩니다. 핏줄도 마찬가지고요.”

영원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음, 그럼 그 응어리를 만들 수 있는 만큼 만들어 주어야겠군.”

“참, 그 전 장궤는요?”

문 이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원이 고개를 끄떡였다.

“마음 놓게. 이틀 안에 경성에서 내보낼 걸세. 화를 피하려면 멀리 보내야지.”

“칠야, 주도면밀하시군요. 감탄이 나옵니다.”

문 이야가 공수하자 영원이 그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지금 나더러 주도면밀하다고 칭찬해?

“칠야는 아직 젊습니다. 게다가 칠야는 살벌, 과감하고 정정당당하지요. 예전엔 이런 음모, 계략에 능숙하지 않았을 텐데, 이토록 허점 하나 없다니, 매우 대단합니다.”

문 이야는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설명했다. 영원은 문 이야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문 이야야말로 진정한 천재지. 문가는 대대로 그랬고. 정말 존경할 만해.”

“대가 끊긴 집안 이야기를 뭐 하러 하십니까. 우리 낭자가 오늘 경성에 갔습니다. 시간 나시면 낭자와 이야기 나눠 보세요. 어쩌면 조언을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문 이야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다.

문 이야가 별안간 하는 말에 영원은 멈칫했다. 문 이야는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저는 저쪽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칠야, 칠야가 하려는 일은 큰일입니다. 일단 마음을 다잡으세요. 서둘러선 안 됩니다.”

영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깊이 장읍하고 몸을 일으킨 다음 돌아섰다.

다시 북문으로 돌아간 영원은 지체하지 않고 성안으로 들어가서 이동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라고 유월에게 분부했다. 유월은 금세 대답을 들고 돌아왔다. 이동은 힐수방 장부를 살피려고 성에 들어온 것이고 지금 힐수방에 있었다.

영원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일부러 나를 만나러 성에 온 거지? 그래서 힐수방을 고른 것이고.

자신 같은 망나니 자제가 마음에 드는 기녀에게 새 옷과 장신구를 사주려고 힐수방에 드나드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묵칠과 주육 모두 힐수방의 단골이었고.

영원은 곧장 힐수방으로 달려가서 아라와 류만, 그리고 운수에게 각각 옷을 골라주면서 이동의 시녀 수련이 찬합을 들고 나가는 걸 곁눈으로 살폈다.

영원은 재빨리 따라갔고, 수련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끔 보고는 계속 앞으로 걸었다. 모퉁이 몇 번 돌아서 아주 작은 마당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마당 문이 열리자 수련이 옆으로 물러나는 걸 본 영리한 영원은 곧바로 의미를 알아듣고 장삼 자락을 들고서 성큼성큼 다가갔다. 영원이 계단에 올라 수련에게 공수하고는 안으로 들어가자, 수련이 뒤따라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지극히 작은 마당이었다. 상방 세 칸에 서쪽에 바로 곁채가 하나 있었다. 휘장이 드리워진 상방과 곁채에서 주판알 두드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정말로 장부 계산하러 왔군.

영원은 다 같이 뒤섞인, 다급하면서도 박자가 분명한 주판알 소리를 들으며 상방으로 들어갔다.

상방엔 동쪽으로 화항 하나만 놓였고 위에 커다란 탁자가 있었다. 탁자 위엔 장부가 여러 권 펼쳐져 있고 옆에 있는 작은 상에 차와 다과가 있었다. 탁자 옆엔 이동이 장부를 넘기면서 다른 손으로 빠르게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영원은 문 앞에 서서 실내를 둘러봤다. 작은 방인데 화항이 하나뿐이고 그 위에 크고 작은 탁자가 하나씩, 그리고 곁에 이동 혼자 앉아 있어서 방이 작아도 꽤 넓고 트여 보였다.

화항 말곤 앉을 곳이 없어서 영원은 전혀 체면 차리지 않고 신을 벗고 이동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동은 집중해서 장부를 넘기며 주판을 튕기고 있었고, 실내를 다 살핀 영원은 시선을 이동에게 돌려서 위아래로 그녀를 살폈다.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간단하게 하나로 틀어 올렸고, 틀어 올린 머리에 적금 홍남보석 비녀를 꽂았다. 귀걸이도 보석 물린 적금 장식인데 한쪽은 합혈 홍보석, 다른 쪽엔 수레국화 남보석이 박혀 있었다. 적금의 찬란한 노란빛이 화사한 홍보석, 남보석의 화사함과 어우러져서 반짝이는데, 그 모습이 촘촘하고 경쾌한 주판알 소리와 어우러지니 영원은 묘하게 웃음이 났다.

이 낭자, 실로 너무 재미있어.

빠르게 장부 한 권을 다 살핀 이동은 붓을 들어 장부에 숫자를 적었다. 영원은 몸을 기울여 목을 길게 빼고는 이동이 글을 쓰는 걸 바라봤다. 이동은 글자를 쓰고 후후 입김을 불고는 글자가 마른 걸 보고서야 장부를 덮었다.

“과거도 안 보는 사람이 이런 정서(正書: 한자 서체의 일종. 진서眞書 혹은 해서楷書라고도 한다. 예서의 왼삐침과 오른삐침을 없애고 방정한 체를 이룬 것)는 왜 익힌 겁니까?”

영원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이동이 이렇게 반듯한 정서를 익힌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과거 볼 필요는 없지만, 장부는 정리해야 하니까요. 장부는 정서를 써야 한답니다.”

이동이 장부를 하나씩 덮으면서 영원의 물음에 대답했다.

“장부 기록 하나 때문에?”

영원은 아예 믿지 않았다.

“네.”

이동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상에 놓인 작고 영롱한 은빛 종을 흔들었다. 휘장이 열리더니 수련과 녹매가 들어와서 장부를 거두고 다과를 올렸다.

수련과 녹매가 정리하고 막 물러나자마자 영원이 다급하게 또 물었다.

“정말로 장부 기록하려고 정서를 배웠어요?”

“맞아요”

이동이 차를 따라 그에게 밀어주었다.

“영씨 가문과 마찬가지예요. 무예로 집안을 일으켰으니, 자제들은 걸을 때부터 무술 수련을 하잖아요. 커서는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면서 단련하고요. 계가는 대대로 학문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니 자제들은 걷기 시작하면 글공부하고 글을 지어요. 커서는 수재, 거인, 진사가 되려고 과거를 보고요. 우리 같은 상인 가문은 장사를 생계로 하는 사람이니, 아이들은 걸을 때부터 주판을 배우고 셈을 배워요. 커서는 장부를 보면서 장사하고요.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영원은 멍하니 있다가 껄껄 웃었다.

“이 낭자가 이리 자포자기하지 않으니……. 크흠, 내 말은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나도 어리석다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말아요.”

“칠야하고 저 사이에 뭘 그런 걸 신경 쓰겠어요.”

영원은 얼떨떨해졌다. 이동의 말에 묘하게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 간식, 반루 건가, 아니면 힐수방 건가? 힐수방에서 내는 차와 다과 모두 참으로 훌륭하군.”

영원은 자신이 어째서 화제를 돌리는 건지 모르면서도 얼른 간식을 입에 던져 넣고 씹으며 웅얼웅얼 물었다.

“제 시녀가 만든 거예요. 힐수방 간식은 그럭저럭 먹을 만할 뿐이에요. 큰 솥에서 한 번에 만들어내는 거라 아무리 공들여도 한계가 있어요.”

이동이 다른 간식을 영원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드셔보세요.”

영원은 주저하지 않고 또 입으로 던져 넣고 씹었다.

“두포(豆包: 콩이나 팥소를 넣은 찐빵)인가?”

이동이 활짝 웃었다.

“네. 이걸 아는 걸 보면 먹을 줄 아시네요. 작게 만들었어요. 돼지기름이 느끼해서 싫어서 소엔 돼지기름이 아니라 땅콩장을 넣었어요.”

영원은 먹고 또 먹었다. 한입에 하나씩 털어 넣고 눈 깜짝할 사이에 두포 대여섯 개를 깔끔하게 먹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돼지기름이 더 맛있군. 땅콩장은 향이 덜해.”

이동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일부러 나 주려고 만든 거죠?”

영원이 간식 접시를 가리키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일부러 준비한 게 아니라 그냥 만드는 김에 만든 거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의미 있나요?”

이동이 영원의 말을 자르고 웃으며 묻자 영원이 하, 소리를 냈다.

“그렇긴 하지. 우리 사이엔 아닌 척할 필요가 없지.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는 게 나아. 장부는 잘 봤습니까?”

영원의 마지막 말에 이동은 허리가 휘청이는 느낌이었다. 앞에 그런 말을 했으면 뒤엔 용건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왜 또 장부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그럭저럭요. 올해는 칠야 덕분에 작년보다 은자를 몇 냥 더 벌었네요.”

“내 덕에? 내가 힐수방 덕을 봤지. 은자 몇 냥이면 힐수방에서 모든 걸 적절하게 처리해주니 말입니다. 기녀들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힐수방에서 환하게 꿰고서 내가 당부한 거라고 해주기까지 하잖아요. 덕은 내가 봤죠. 낭자가 할수방을 관리하나요?”

“어머니가요. 저는 그저 가끔 와서 장부 확인하고요. 섣달이 다가오는데, 혼자 경성에서 새해를 보내시나요?”

갈수록 멀어지는 화제에 이동은 할 수 없이 다시 화제를 돌려왔다.

이동의 물음에 영원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누님을 만나러 갈 건가요?”

이동이 이어서 묻는 말에 영원은 멈칫하고 탐색하는 눈빛으로 이동을 바라봤다.

“장공주가…….”

“아니에요. 장부를 보러 경성에 온 김에 칠야를 만나러 온 거예요. 그래서 물은 거지 다른 뜻은 없어요.”

이동이 영원의 말을 잘랐다.

“아, 만나러 가도 눈물 바람뿐일 테니, 안 갈 겁니다.”

영원은 매우 빠르게 대답했고, 이동은 한참 침묵했다.

“칠야의 무예, 처음엔 누님에게 배운 거라고 했었죠? 전장에도 데리고 나갔고. 누님이 황후가 되지 않고 다른 이와 혼인했대도 낭자 때처럼 수련하고 전장에 나가는 일은 없었겠죠?”

“누님은 여장군이 될 일념뿐이었어요.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님을 망쳐놨다고 하셨죠. 설령 혼인했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었다면 누님은 분명 낭자 때처럼 홀로 병사를 이끌었을 겁니다. 두 형님처럼요.”

영원은 진지한 눈빛으로 이동을 바라봤다. 그가 아는 바로는 이 낭자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많지 않은 그 말 중에 쓸데없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날 칠야가 무예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님이고 나중엔 전장에도 데리고 나갔다고 했잖아요. 또 칠야의 첫 전투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나는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섭더라고요. 칠야의 누님처럼 피를 밟고 사람을 베라고 하면, 다른 사람의 머리를 벤 다음 순간에 내 목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어요. 전장에 나가는 게 아니라, 곁에서 그런 장면을 보기만 해도……. 아니, 보는 것도 아니고 상상만 해도 못 견디겠더라고요. 칠야의 누님처럼, 나더러 전장에 나가라고 누가 등 떠민다면, 난 차라리 밧줄로 목을 매고 죽어 버릴 거예요.”

이동은 영원을 바라보며 말했고, 영원은 눈살을 살며시 찌푸렸다. 이런 말을 하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난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주판을 배우고 장부를 맞췄어요. 어머니에게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고요. 나중에 컸을 때 어머니가 점포 몇 군데를 저에게 맡겼어요. 더 나중엔 다른 장사도 맡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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