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큰 선물을 받은 아라
아라는 갈수록 어두워지는 영원의 표정을 힐끔 살피고는 두려운 눈빛으로 얼른 술잔을 고자의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미인하고 싸우는 건 누가 고 오야를 이기겠어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이 나리는 아직 너와 싸워보지 않았는걸.”
고자의가 아라의 손을 잡고 술을 마신 다음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곁에 있던 류만이 웃으며 다가갔다.
“제가 그랬어요.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안 그래?”
류만이 기녀들을 돌아보며 하는 말에 분위기 푸는 데 고수인 기녀들이 너도나도 한마디 하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영원은 뼈가 없는 것처럼 흐느적흐느적 팔걸이의자에 앉아서 큰 잔으로 연달아 술을 마시면서 다 풀린 두 눈으로 고자의를 바라봤다. 이어서 운수를 안고 노래하라고 조르는 주육을 바라봤다. 속이 답답해졌다.
고자의의 꼴을 보니 고서강이 사황자 편에 선 건 정해진 듯했다. 그렇게 정해졌으니 고씨 가문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고자의처럼 고서강의 총애를 깊이 받고, 또 믿음직한 오른팔인 아들은 당연히 알 것이다.
고자의가 주육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두려워하면서 경원했는데 지금은 매우 친밀하게 굴면서 두려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당당했다. 즉, 사황자에게 고서강이 주 추밀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주 추밀부사가 기껏해야 어리석지 않은 정도라면 고서강은 영리한 능구렁이였다.
영원은 생각할수록 심란해져서 취해서 버틸 힘이 없는 듯이 뒤로 벌렁 누웠다. 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자의는 묵칠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결국 아라만 고개를 끄덕이면 아라를 그에게 양보하겠다고 연향루에 묵으라고 묵칠이 승낙했다.
아라는 킥킥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고자의를 연향루로 모시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모시지 않겠다고 하지도 않아서 고자의는 타들어 갈 것처럼 다급해졌다.
고자의가 웃느라 기운이 빠진 듯한 아라를 끌어안고 귓불을 물며 속삭였다.
“이 요물아, 오늘은 네가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도 끄떡여야 하고 싫어도 끄덕여야 한다. 이 나리, 네 생각에 병이 날 것 같다.”
“오야, 이러지 마세요. 간지러워요…….”
아라는 더 요염하게 웃으면서 여전히 승낙하지 않았다. 고자의가 더 다가가려는데 다다가 잰걸음으로 아라 앞으로 달려왔다.
“소저, 행수 어른이 어서 돌아오래요. 급한 일이래요! 아주, 아주, 매우, 매우 급하고 중요한 일이요!”
아라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행수기녀가 큰일이라고 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리라.
“가 봐야겠어요.”
아라는 고자의의 품에서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빠져나와서 그가 다시 붙잡기도 전에 다다를 데리고 달려갔다.
영원은 몸을 일으키고는 놀란 표정으로 아라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연향루에 무슨 일이? 일이 생겼는데 보고하는 사람이 없어? 그렇다면 지금 보고할 필요가 없는 일이겠지.
영원은 다시 뒤로 기대고 앉아서는, 화가 잔뜩 난 고자의, 걱정스러운 듯 문 쪽을 보는 묵칠, 그리고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주육을 바라봤다. 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음, 일이 생기면 좋지. 일이 생기는 건 무섭지 않아. 일이 생기지 않을까 봐 무섭지.
아라가 자리를 비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한 어멈이 묵칠에게 말을 전했다. 중요한 일이 생겨서 오지 못하니 양해해달라는 아라의 전언이었다. 묵칠은 곧바로 이해해줬고, 고자의는 분노한 얼굴로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가 하며 사환을 불러 나직이 명령했다.
영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사이, 사환이 금세 다시 돌아와서 고자의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사환의 보고를 듣는 고자의의 분노가 뜨거운 물을 쌓인 눈에 부은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싹 사라졌다.
무슨 일이기에 고자의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을까. 사황자가 연향루에 왔나?
영원은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뜰 뻔했다. 음, 고자의의 모습을 보니, 아라의 급한 일이라는 게 분명 사황자겠군.
그것참…….
영원은 큰소리로 웃고 싶었다.
사황자, 색을 참 밝히는군!
색을 밝히는 마음이 있으면 됐다!
연회가 끝난 후, 비틀비틀 비연루에서 나온 영원은 말을 타고 정북후부로 돌아와 중문으로 들어간 뒤 돌아보지도 않고 대영에게 물었다.
“사왕야가 연향루에 간 것이냐?”
“아룁니다, 사왕야가 아니라…… 행수기녀 말로는 북부에서 온 큰 상인이랍니다. 내일 출발해야 하는데 오늘 밤엔 아라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아라가 하룻밤 함께 해주면 5만 냥을 주겠다고 해서 행수기녀가 아라를 곧바로 불러간 겁니다.”
“5만 냥?”
영원이 걸음을 멈췄다. 뭔가 수상했다.
“지켜보고는 있고?”
“예. 위봉낭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영원은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5만 냥에 아라와 하룻밤이라니, 미친놈이 아니고 노리는 게 있는 것이다. 미친놈은 5만 냥을 내놓지 못한다. 아라는 어리벙벙해도 연향루 행수기녀는 매우 영리하다.
이 하늘, 보는 것처럼 어둡고 막막하진 않은 듯했다.
다음 날, 영원이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위봉낭이 이미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네모난 홍목 상자를 들고 들어오더니 상자를 영원 앞 작은 탁자에 올려놓았다.
“칠야, 어제 그 사람, 우리 북삼로 사람이 분명 아닙니다. 말투가 아닙니다. 어제 연향루에 묵고 밤새 떠들썩하게 즐기고 날이 밝기 전에 떠났습니다. 출발할 때를 지체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은자가 아니라 이걸 남기고 갔습니다.”
위봉낭이 상자를 가리키자 뚜껑을 열어 본 영원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상자 안에 진주가 가득했다. 둥글고 은은한 빛이 나는 진주였다. 영원이 진주를 들어 올렸다. 정확히는 진주 주렴이었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영원은 양손으로 들어 올려 걸 곳을 찾아 건 다음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잠시 실소하고 말았다.
이건 이 낭자가 이번에 내놓은 진주 주렴이었다. 전 장궤를 거쳐 하가 대장궤에게 팔아먹은 지 며칠도 안 돼서 다시 눈앞에 나타나다니.
대황자, 무슨 생각이지?
“그 전 장궤, 경성에서 내보내라고 최신에게 전해라. 그자가 알아서 나가는 게 제일 좋다. 멀리 숨을수록 좋아. 서두르라고 해라. 전 장궤가 달아난 일로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면 절대로 안 된다고 전하고.”
대황자가 무얼 하려는 건지 몰라도, 영원은 허점과 위험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 허점과 위험은 바로 물건을 내놓은 사람과 물건을 산 사람이 누군지 아는 전 장궤였다.
위봉낭이 대답하고 물러서는데 영원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진주 주렴을 아라에게 보내고, 잘 간직하라고 전해라.”
“예.”
위봉낭은 상자를 거두고 물러나서 서둘러 물건과 말을 전하러 사라졌다.
대영을 비롯한 사환들이 들어와서 영원의 소세와 환복을 도왔다. 영원은 팔을 벌리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대황자가 아라에게 진주 주렴을 보냈다. 무슨 생각일까. 목표가 누구일까.
나?
영원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황자가 자신을 안중에 둘 리가 있나. 게다가 아라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걸 대황자가 알 리가 없다. 아라 그 어리석은 것이 자기 사람인지 아닌지 영원 본인도 확신할 수 없거늘.
대황자 눈엔 사황자밖에 없다. 이렇게 큰돈을 쓸 가치가 있는 상대는 사황자밖에 없을 것이다.
진주 주렴을 아라에게 보내는 것으로 어떻게 사황자를 치려는 걸까. 대황자는 언제나 직설적으로 움직인다. 조금 꼬는 것만 해도 계략을 쓴 셈이었다. 두 번 꼬면 신통한 모략을 꾸민 것이고. 진주 주렴을 아라에게 준 것이 첫수라면 다음 수는 어디에 둘까? 어디로 두면 사황자가 타격받을까? 그것도 큰 타격을?
진주 주렴 두 개 중에 하나는 사황자가 사서 주 귀비에게 선물했고, 하나는 대황자가 사서 아라에게 주었다.
영원의 머릿속이 번뜩했다.
진주 주렴의 목표가 주 귀비? 정확히는 주 귀비와 사황자 사이 모자의 정?
모두가 아라에게 진주 주렴을 준 사람이 사황자라고 여기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된다.
교만하고 자긍심 높은 주 귀비는 어릴 때부터 떠받들고 자라서 모든 일에서 자기가 최고여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 진주 주렴은 주 귀비가 받은 것보다 훨씬 뛰어난데, 자기가 받은 진주 주렴이 기녀의 것보다 못하다? 아들이라고 해도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다.
대영이 허리띠를 매주고 옷을 다 입었을 때 영원도 생각이 잡혔다. 영원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두봉을 걸치고 나가서 매섭고 찬 바람을 마주하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속이 후련하고 상쾌했다.
“유월은? 자등 산장에 다녀오라고 해라. 만나야 할 일이 있다고 문도에게 전해라. 가서…….”
영원은 멈칫하다가 계속했다.
“남문 밖 옥석관 뒷산에서 만나자고 해라. 거기가 적당하다.”
조회가 끝난 후, 영원은 저택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종복, 사환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며 북문으로 나갔다. 크게 길을 돌아서 남문 밖 옥선관으로 향해서 말에서 내린 다음 뒷산으로 올라갔다.
문 이야는 여복 하나만 데리고 벌써 도착해 있었다. 영원이 나는 듯 달려오는 걸 본 여복이 문 이야에게 귀띔했다.
“이야, 칠야 오십니다.”
여복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영원이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 이리 급합니까.”
영원이 내내 달려오는 걸 본 문 이야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일이 급한 건 아니고. 산에 공기가 좋아서 걸음이 좀 빨라졌네.”
“그럼 다행입니다.”
영원의 밝은 미소에 문 이야는 안도했다.
영원은 문 이야와 함께 완만한 숲길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면서 아라가 진주 주렴을 받은 이야기를 나직이 말했다. 문 이야는 두 눈썹을 높이 치켜떴다가 한참 만에 다시 내렸다.
“사황자에게 뒤집어씌워 사황야와 주 귀비를 이간하려는 것입니까?”
문 이야의 분석에 영원은 마음이 꽤 불편해서 문 이야를 삐딱하게 바라봤다. 자신은 한참 생각한 끝에 깨달은 일을 문도는 단번에 깨달았다. 역시 자신은 한참 부족했다. 이러니 부친이 예전에 문 막료를 그렇게 추앙한 것도 당연했다.
“괜찮은 한 수군요. 대황자가 드디어 사황자와 싸워서 이길 관건을 깨달았습니다. 서로 수를 주고받으면서 대황자와 사황자 모두 영리해졌군요.”
문 이야의 흡족해 보이는 모습에 영원은 불만인 듯 그를 바라봤다.
“좋은 일이 아니라고!”
문 이야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영원을 돌아봤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근본이 있는데, 영리해진들 얼마나 나아지겠습니까. 너무 어리석은 것도 좋지 않습니다. 미끼를 던져도 물지 않으면 그것도 곤란하지요.”
영원은 문 이야의 말에 웃음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바탕에 한계가 있으니 영리해지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대황자와 사황자도 관건이 무엇인지 깨달았군요. 지난번에 말씀드렸었지요. 이 국면을 깨는 데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요. 단칼에 휘두르면 즉시 이 국면을 타개할 수 있습니다.”
문 이야의 말에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영원은 고개를 숙인 채 몇 발짝 걷다가 문 이야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지는 아네. 지난번에 이야기했을 때 바로 깨달았지. 다만…….”
영원은 말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 영가엔 선조가 남긴 철칙이 몇 가지 있네. 주군을 시해하지 않는 것이 그중 하나이지. 영씨인 이상 조상의 법도를 어길 수 없어.”
문 이야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많은 가문에 그런 법도가 있지요. 계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도를 지키지 않는 자손이 있기 마련입니다. 임가 조상엔 그런 법도가 없을까요?”
영원은 대답하지 않고 삐딱하게 그를 바라봤고, 문 이야도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다가 영원이 별안간 웃었다.
“이야는 미련도,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고, 이리 달관했는데 이 문제를 직접 풀고자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저는 막료입니다. 손이 아니라 입만 쓰는 것, 그게 막료의 규칙입니다.”
문 이야는 쥐새끼 같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달관이라는 말씀은 맞습니다. 하지만 미련도,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는 건 아닙니다. 이가는 대가족입니다. 막료가 주인을 연루하는 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문 이야가 진지한 얼굴로 영원을 바라봤다.
“칠야가 도모하는 것과 저, 그리고 이가가 도모하는 것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칠야야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겠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