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외할머니, 어머니, 이동
장 태태는 매우 자부심 넘치는 모습으로 살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동은 마음이 뭉클해져서 일어서서 장 태태의 의자 팔걸이 곁에서 장 태태의 어깨에 기대고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어머니’ 하고 불렀다.
장 태태는 살며시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모녀가 한참 서로 기대고 있다가 이동은 자기 의자로 돌아가서 앉았다.
“아까 증외조부가 송사하느라 거의 모든 돈을 썼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두 분이 호주로 달아났을 땐 거의 무일푼 아니었어요? 하지만 외할머니는 어릴 때 가난하게 살지 않았잖아요.”
“너도 참, 잘도 따지는구나!”
이동이 주저하며 의문인 듯 묻는 말에 장 태태가 나무라듯 말하고는 웃어 보였다.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 신이니 귀신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단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처럼 평생 남을 도와주셨단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항상 도와주셨지.”
“어머니도 그렇고요.”
“너도 앞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장 태태가 당부하는 말에 이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호주 경내로 들어간 두 분은 명의를 찾았고,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의관에 찾아갔다. 그때 의관에 찾아온 한 가족이 있었다. 사내가 곧 죽을병에 걸렸는데 여인이 아주 유능해서 아이를 업고 수레로 사내를 밀면서 의관으로 들어왔단다. 한겨울에 어른이며 아이며 다 맨발로 옷도 차려입지 못한 걸 보고 외할아버지가 옷을 꺼내 주고 약값도 내주셨다. 외할머니는 그 여인과 이야기하면서 무얼로 먹고사는지 물었는데, 여인이 두장(豆漿: 도우장, 콩국) 장사를 한다고 했다는구나. 사내가 병이 들기 전엔, 장사가 잘 되는 건 아니라고 해도 일가가 풀칠하고 살 정도는 됐다고.”
“아.”
“이제 알겠니?”
장 태태가 힐끔 보며 묻는 말에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외조모의 비법이요. 땅콩을 넣으면 두장이 더 고소하고 향긋해지잖아요.”
“외할머니는 여인에게 다가가 외할머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을 알려주셨다. 땅콩탕 비법도 알려주었지. 소금을 조금 넣으면 땅콩이 말캉말캉하게 삶기는 방법 말이다. 그리고 맷돌을 돌릴 나귀와 땅콩을 살 은자 열 냥을 주셨단다.”
장 태태는 생각이 많은 듯했다.
“이 세상에 은자를 주는 사람은 많아도 돈 벌 비법을 남에게 주는 사람은 외할머니뿐일 게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떠난 다음, 의관의 노의원이 여인에게 외할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고, 여인이 사실대로 알려주자 노의원이 다른 사람에겐 그 비법을 절대로 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 다음에 사람을 보내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쫓아갔다. 외할아버지 병이 깊어 먼 길에 시달리면 안 된다고, 두 분에게 잠시 자기 집에서 머물다 가라고 했다는구나. 그 노의원이 은퇴한 높은 관리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되었지. 의원의 가문도 호주에서 명망 높은 집안이었고. 바로 그 노의원이 붙잡아서 두 분이 호주에 머무르게 된 거란다.”
이동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니, 이런 이야기, 처음 들어요.”
“이게 뭐 이야기할 거리라고.”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장 태태의 표정에 은근히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럼 호주 손 어멈 땅콩탕이 바로?”
“그래. 손 어멈이 그 여인이다. 지아비는 몇 년 안에 죽었고, 손 어멈이 처음엔 좌판을 열었지. 나중엔 점포를 맡아서 시작했고, 더 나중엔 하나씩 점포를 늘리며 두장과 땅콩탕을 팔았지. 지금은 호주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손 어멈 땅콩탕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 외할머니 안목이 참 좋았던 거지. 그때 그 여인이 일을 잘할 사람이라는 걸 알아봤다고 하셨다. 그래서 비법을 알려준 거라고. 외할머니의 안목은 정말 입댈 것이 없다. 돕는 족족 인물이 되니까.”
이동은 연신 감탄했다. 외할머니 말씀이 맞다. 그녀 가문 여인들 중 증외조모가 가장 뛰어났다.
“나중에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외할머니 홀로 점포를 열고 장사했는데 아무도 괴롭히지 못한 것도 다 그 노의원 덕분이었다. 예전에 호주에 살던 나이 든 사람들은 모두 외할머니가 돌도 금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했지. 그 당시에…….”
장 태태가 말을 멈추고 빙그레 웃었다.
“얼마나 많은 이가 외할머니와 혼인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외할머니는 다 거절했지. 하나같이 외할아버지 발치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과 혼인하면 외할아버지가 놀릴 거라고.”
“증외조모와 증외조부, 외조모와 외조부 모두 참 정 깊은 부부였네요.”
이동은 잠시 멈췄다가 ‘어머니도요’라고 덧붙였다. 장 태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외할머니, 그리고 나, 모두 유복자고 너만 아니었지. 나는 네 아버지와 혼인한 지 3년 만에 겨우 너를 가졌다. 네 아버지와 함께 서너 해는 살았으니 네 증외조모, 외조모보단 운이 좋았지. 그 서너 해만으로 평생 그리워할 수 있다. 하물며 너도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네가…….”
“전 어머니가 있잖아요.”
이동이 재빨리 대답했다. 전생을 겪은 그녀로서는 지금 어머니 곁에서 오라버니, 그리고 장공주 같은 벗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지극히 행운이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도 있고요.”
“장공주께서 너에게 참 잘해주시지. 이 어미도 다 보인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마음 놓고 해라. 너는 이씨지만, 네 증외조모와 증외조부의 후손이기도 하다. 사람은 양심에 거리끼지 않게 살아야 한다.”
이동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사람이 한평생 사는 건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지난번에 네가 문씨 집안의 성격을 이야기했지. 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히, 멋지게 한평생 살고 싶지 않으냐? 이 어미 걱정은 할 것 없다. 네가 네 마음 가는 대로 최선을 다한다면 나는 괜찮다. 슬퍼할 것 없어. 네 오라비는…….”
말투가 확 바뀌어 호탕하게 말하던 장 태태가 멈칫했다.
“내 보기에 네 오라비는 이가 사람답게 착실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성격도 아니고. 다만 한 가지, 너와 네 오라비는 생각이 같아야 한다. 다른 건 상관없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라. 어미는 뒤를 지켜주마.”
“어머니!”
이동은 장 태태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사왕야의 명을 받고 아라를 품어야 한 주육은 한몫 톡톡히 뜯어낸 건 말할 것도 없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서 옷을 가지고 오라고 당당하게 집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러고 연향루에서 곧장 관아로 향한 바람에 주 추밀부사는 잇몸이 간질간질하고 시릴 정도로 울화가 치밀었다. 당장 잡아와서 장을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육은 오후에 관아에서 나간 후에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사환을 보내 묵칠, 영원을 재촉한 다음 자기는 연향루로 곧장 달려갔다.
묵칠은 경성에서 자기가 최고로 돈을 많이 쓰고 통 크게 굴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주육이 얼마나 호탕하게 돈을 쓰는지, 식견이 넓어지고 눈이 뜨인 느낌에 은근히 속이 불편했었다. 오늘 연회는 주육에게 등 떠밀려 대접하는 것이든 자원한 것이든, 어찌 됐든, 무슨 일이 있어도, 어젯밤 주육의 연회보다 더 화려하게 열어야 했다.
그런 원칙이 있으니, 묵칠은 아침 일찍부터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저녁에 연회를 어떻게 재미있게 열고 어떻게 자기 재력을 과시할까 고민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하나하나 분부했다. 저녁에 관아에서 나온 후에는 주육이 재촉할 것도 없이 진작 연향루에 가 있었다.
정교하기로 이름난 연향루는 규모가 크진 않았다. 묵칠이 오늘 연회를 어제 주육의 연회보다 거창하게 열려면 우선 자리가 어제보다 넓어야 했다. 옆집인 류만의 비연루가 널찍하고 탁 트여서 연회를 비연루에서 열기로 했다.
주육이 어제 연향루에 묵고 다음 날 곧바로 관아로 간 일은, 일단 주육이 일부러 퍼트리기도 했고 또 하나, 어제 연회를 즐긴 사람들과 경성 사람들은 원래 연향루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차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아라에게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그 마음이 다시 왕성하게 타올랐다.
그러니 묵칠의 연회는 어제보다 더 사람이 많이 몰려들었다.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연루는 봄날 만개한 갖가지 꽃처럼 화려하고 떠들썩해졌다. 주육은 중간에서 탁자를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쳐댔다.
“내 말 들어라!”
사방에서 잔을 주고받고, 만지작거리고, 쫓고 쫓기던 사람들이 일제히 주육을 바라봤다. 주육은 손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술만 먹으면 재미없다. 우리 신선한 재미 좀 보자.”
“술만 먹는다니? 이렇게 미인이 많은데, 술만 먹는 건 아니지!”
고자의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소육은 재미없겠지. 다들 봐라, 미인들이 다 너희 품에 있지 않냐. 소육 혼자 있고!”
묵칠이 매우 영특하게 문제점을 파악한 듯 소리치자, 주육이 묵칠의 어깨를 툭 쳤다.
“개소리! 너희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냐? 내가 신선한 재미라고 했지? 신선, 두 글자가 요점이다.”
“신선한 재미가 뭐가 있어서? 신선한 재미가 있어도 여기서 볼 건 아니지.”
고자의는 주육의 말엔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고 그저 아라를 품으로 끌어안으면서 자기는 안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럼 어디서 재미를 보자는 거냐?”
주육이 알아듣지 못하고 아둔하게 굴자 묵칠이 피식 웃었고, 영원은 뒤에서 주육을 걷어찼다.
“어디든 상관없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오랑, 또 다른 신선한 놀이가 있나?”
묵칠이 고자의에게 머리를 내밀며 묻자 고자의가 대뜸 머리를 밀어냈다.
“있어도 네겐 말 안 하지.”
영원이 술잔을 흔들며 말을 받았다.
“꼭 들어야 아냐? 고자의의 신선한 재미는 혼자 노는 게 아니다. 내일 네가 고자의가 오늘 묵을 곳에 가서 묵어 보면 알 것 아니냐.”
“그렇지!”
묵칠은 손뼉을 짝 쳤고, 주육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랑, 이 형편 없는 놈. 내가 말한 신선한 재미는 네가 말한 것과 전혀 다르다!”
“다르다고? 그럼 신선한 재미가 또 뭐가 있는데? 있어도 재미없겠지! 칠랑, 내 말해 두는데, 오늘 밤엔 아라가 아니면 난 그냥 돌아갈 거다. 우리 집안 법도가 어떤지 알 것 아니냐”
고자의가 아라의 가는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영원이 부채로 고자의의 어깨를 내리쳤다.
“쯧! 아라가 어떤 요물이냐. 집안 법도가 아라만큼 중할까. 무슨 염치로 집안 법도를 입에 올리나.”
“그러게!”
묵칠이 얼른 말을 이었다. 고자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명백하게 깨달았지만, 몇 달 동안 그리워한 아라를 양보할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칠야가 가장 자유롭지. 돈 쓰는 것도 자유고, 놀고 싶은 대로 놀아도 되잖아. 정말 부럽구나!”
고자의가 영원을 가리키며 웃지만, 영원은 고민 가득한 표정이었다.
“자유롭긴 개뿔! 매일 조회에 나가느라 닭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 내가 밖에서 묵는 걸 본 적 있냐?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까 봐 그러는 것이다! 난 잠이 많아서 매일 족히 네 시진은 자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임무를 받은 후로 하루도 제대로 못 잤다!”
“응? 영가는 걸음마를 떼기만 하면 매일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술 수련해야 한다면서?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난다던데?”
고자의가 놀라서 물었다.
“북삼로는 진시(辰時: 오전 7시에서 9시 사이)가 되어야 날이 밝는다!”
영원이 고자의를 흘겨보며 하는 말에 고자의는 얼떨떨해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게다가 매일 아버지에게 혼나는 이유가 바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서다. 사실 무예 실력은 나쁘지 않다. 적어도 너희들보단 나지.”
“우리보다 낫다니!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영가는 무예로 가문을 세운 집안이지만 우리는…… 나, 묵 소칠, 주육 가문조차도 진작 무예는 버렸다. 그리고 이 중에 무예로 일어선 가문이 어디 있나. 무슨 염치로 우리보다 낫다고 하는 거냐. 내가 너보다 글을 많이 안다고 하면, 널 무시하는 거냐 아니냐?”
고자의의 말에 모두 큰소리로 웃었지만 영원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고가야, 맞을까 두렵지는 않고? 잘 들어라, 싸우게 되면 나 혼자 여기 모인 모두를 때려눕힐 수 있다. 해 볼까?”
“그럼 미인들하고 먼저 싸워라.”
고자의도 전혀 개의치 않고 배를 잡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