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의리
주육의 연회라서 영원과 묵칠은 모두 일찍 도착했다. 문 앞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아라는 매우 들뜬 얼굴이었다. 특히 영원을 바라볼 때는 들뜬 가운데 우러러보기까지 했다. 칠야, 진짜 대단하셔요!
벌써 도착한 주육은 겉옷을 벗고 화항에 드러누워 류만의 손을 잡고 술을 마시다가 두 사람이 온 걸 보고도 일어나지 않고 기녀들을 지휘하기만 했다.
“어서 영원 형님과 칠소야 옷 받아드려라. 잘 모시고. 오늘 칠야와 밤을 보내는 사람은 이 몸이 적금 머리 장식을 선물하마!”
고서강 고 사사 댁 오소야 고자의가 머리를 내밀며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너희 중에 누가 내 마음을 흔들어서 밤을 보내고 싶게 하는 사람도 주 육소야가…….”
“너는 됐다! 널 흔들라고? 쫓아내도 가지 않는 주제에? 밤마다 미인을 끼고 봄바람을 즐기고 싶은 너를? 너 때문에 머리 장식까지 선물할 필요가 뭐가 있다고. 오늘 밤에 네가 누굴 점찍든지 상관없다. 둘, 셋, 온 침상 가득 끼고 잔대도 다 네 마음이지. 전두(纏頭: 광대, 기생 악공 등에게 그 재주를 칭찬하여 사례로 주는 돈이나 물건) 은자는 네가 내라!”
주육의 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고, 고자의는 쥘부채로 주육의 팔을 내리쳤다.
“이런 의리 없는 자식! 영원 형님은 형님이고, 나 자의 형님은 형님이 아니란 말이냐!”
“소육, 벌주 마셔라!”
벌써 중간 팔걸이의자에 자리 잡은 영원은 운수가 건넨 술을 받아서 마시면서 웃으며 말했다.
“자의 형님도 형님이지! 적금 머리 장식은 육소야가 선물한다고 하니, 오늘 밤 은자는 내가 내마. 고 오야를 모셔가는 사람은 은자를 두 배로 주마. 둘이면 거기에 또 두 배를 주마!”
실내 가득한 기녀들은 분위기를 맞추며 고자의를 에워싸고 술을 권하고 아양을 떨면서 재잘재잘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오야, 저 아이 술을 드셨으니 이 잔도 드세요.”
“오야, 제 술은 안 받으시다니. 전 싫으세요?”
“오야, 입으로 먹어달라니까요.”
고자의는 중간에 둘러싸여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더 마시면 취한다! 칠야,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품기도 전에 취해서 쓰러지겠네!”
아주 떠들썩한 실내에서 영원은 술을 머금고 주변을 살폈다. 아라를 품에 안고 아라의 손을 붙잡고 배를 깨물어 먹는 주육과 눈도 떼지 못하고 아라를 바라보는 묵칠을 바라보다가 눈알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아라, 넌 고 오야께 술 한잔 올리지 않느냐?”
영원의 말이라면 뭐든 듣는 아라는 후다닥 일어서서 잔을 채워서,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기녀들에게서 어렵게 벗어난 고자의 곁으로 다가가 술을 권했다. 고자의가 다급하게 손사래 쳤다.
“더 마시면 안 된다. 취하겠다. 이것 좀 봐라. 얼굴도 다 빨개졌다. 더 마시면 안 된다. 좀 쉬어야 해.”
“고 오야, 아라는 너더러 먹여달라는 거다.”
영원이 한쪽 다리를 팔걸이에 걸친 채 오로지 떠들썩한 구경거리를 바라는 얼굴로 말했다. 영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라가 고자의의 몸에 살며시 기대더니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품을 파고들면서 잔을 들어 올렸다.
“오야, 제발 아라 체면 좀 살려주세요.”
그러고는 술을 한 모금 머금은 입술을 고자의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이래도 체면을 살려주지 않을 건가? 이렇게 향긋한 술이라니, 마셔야지! 당연히 마셔야지!”
주육이 화항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다가가자, 아라, 고자의, 주육의 얼굴이 거의 달라붙었다. 고자의 역시 아라의 치맛자락 아래 노예 중 한 명으로, 평소에 냉랭하고 소원한 아라만 보다가 아라가 이렇게 입술을 대고 비벼대자 몸이 뜨거워지고 굳었다. 지금은 술이 아니라 약이라고 해도 한입에 꿀꺽 삼킬 수 있을 듯했다.
사람들이 죄다 모여서 아라가 입술로 주는 술을 받아먹는 고자의를 구경했고, 아라가 일어서자마자 묵칠이 다가갔다.
“아라, 그 술, 나도 한 잔 마시고 싶구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일단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보러 왔던 사람들은 마음이 놓였고, 주육 혼자 주물럭거리던 아라는 모든 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어찌 됐든 아라는 사황자를 모셨던 기녀고, 사황자를 모셨던 기녀를 한 번 만지는 것만 해도 다른 기녀를 만지는 것과 기분이 다를 것 아닌가.
하물며 오늘의 사황자는 내일의 새로운 황상이 될지도 모른다. 황상이 품은 여인을 만지는 느낌, 그야말로 너무 좋지 않나. 물론, 품을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고.
예전보다 유난히 떠들썩했던 연향루는 모두 잠들 시각이 되자, 아라와 술잔을 기울이며 떠들썩하게 보냈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저택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기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운우를 즐기러 가거나 했다. 아무도 연향루에 남으려 하지 않았다. 주육을 제외하고는.
주육은 눈이 풀려서도 정확하게 묵칠을 잡았다.
“너도 가려고? 가지 마, 우리 형제끼리 한 잔 더 해야지!”
“늦었다. 우리 집안엔 법도가 있다. 내일 다시 하자.”
묵칠이 주육을 밀며 손을 떼어 내는데 주육이 다시 잡았다.
“법도는 무슨! 헛소리하네! 무슨 법도 타령이야. 이제 시작인데, 어딜 간단 말이냐.”
“이제 시작? 이렇게 취해서는. 오늘은 늦었다.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만나자.”
묵칠이 다시 손을 떼어 냈다.
“내일?”
주육은 몰려와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걸 구경하는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들었나? 소칠이 내일 다시 만나자는구나! 내일도 여기서 소칠이 한턱낸단다. 오늘 온 사람은 하나도 빠지면 안 된다! 혹시 누가…….”
주육은 끼룩 딸꾹질하며 말을 이었다.
“빠지는 사람이 있으면 내 체면을 살려주지 않는 거다! 내 체면을 살려주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내일이다. 다 들었나? 하나도 빠지면 안 된다. 소칠, 들었냐?”
“그래, 그래. 들었다!”
대접이라면 무서워할 것 없는 묵칠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은 내가 내지. 여기서 모두 만나자고. 따로 초대하지 않겠어.”
사람들은 저마다 어수선하게 대답했다. 대부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취한 사람들은 대답하면서 사환에게 부축받아서 밖으로 나갔고, 아직 정신이 매우 멀쩡한 일부는 주육을 지켜봤다. 주육이 모두를 배웅하고 아라를 붙들고 2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며 하나같이 만감이 뒤섞였다.
연향루에서 나온 영원은 느릿느릿 말에 올라 2층에 보이는 다다의 통통한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마음이 매우 울적했다. 사황자가 정말로 연향루를 다시 열고 손님을 받게 하다니, 예상한 것보다 영리한 듯했다. 사황자의 성격이라면 아라를 독차지하고 연향루를 외실로 삼을 줄 알았다. 탄핵 상주서를 어떻게 쓸지까지 다 생각해 놓았었는데.
하지만 사황자가 몸을 빼고 물러섰고 연향루는 예전과 다름없어졌다.
이번 일로 울적한 게 아니라, 사황자가 이 일을 냉정하게 이해득실을 저울질하고 처리해서였다. 이번 일로 보건대, 사황자의 침착함이면 무사히 황위에 오르기 충분했다. 즉, 사황자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대황자처럼 미치광이 같은 엉뚱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거의 기회가 없는 것이다.
섣달이 가까워져 오자, 장 태태는 연말 장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동은 오전엔 보림암에 가서 장공주와 함께 수행했고, 오후엔 장 태태와 함께 장부를 살폈다.
한참 장부를 보다가, 장 태태가 다과를 마련하여 이동과 차를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 잠시 쉬었다.
“아까 보니까, 장부를 보다가 또 정신을 딴 데 팔던데 요즘 계속 그러는구나. 무슨 일이냐?”
장 태태가 차를 마시면서 딸에게 물었다. 이동도 마침 어머니와 이야기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무슨 일까진 아니에요. 어머니, 정말 좋은 벗이 있는데, 도와주지 않으면 벗이 위험해져요. 하지만 도우면 자신과 가족까지 위험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공주?”
장 태태가 민감하게 묻는 말에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장 태태는 잔을 내려놓고 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이동을 바라봤다.
“내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네게 했던가? 하지 않은 것 같구나.”
이동은 일어서서 차를 따라 잔을 장 태태에게 건넸다. 장 태태는 받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었을 때 호주로 옮겨가셨다. 왜 호주로 옮겨갔느냐면, 송사 때문이었다. 호주로 옮기기 전에도 외할아버지는 장사를 제법 크게 했다. 조상님이 물려주신 점포도 여럿 있었고. 좋은 땅도 천 묘 가까이 있었지.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와 비슷한 집안이었고, 혼인할 때 혼수가 십 리 밖까지 이어졌다. 외할아버지에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좋은 벗이 있었단다. 왕씨였지. 이름은 네 외할머니가 말씀하지 않았어. 아마 네 외할머니도 모르시겠지. 그 왕 노야는 신발 점포를 했다. 성 관아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점포는 성에서 손꼽히는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단다. 어느 해, 무슨 일인지 몰라도 현령 가문의 소공자 눈 밖에 났는데, 그 공자가 왕 노야를 점포에 가두고 불을 질러서 그대로 불타 죽었다. 늦은 시간이라고는 하나 이웃 중에 본 사람이 많은데 누가 감히 현령댁 자제와 맞설까. 다들 모른 척했다.”
이동은 열심히 장 태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 태태의 잔을 살펴보고 차를 따라 주었다.
“외할머니 말씀이, 왕 노야가 죽은 지 사나흘 지났는데 외할아버지가 매일 왕 노야의 꿈을 꾸었다는구나. 활활 타는 불 안에 핏발 선 두 눈으로 외할아버지를 빤히 보면서 억울하다고 외쳐댔다는구나. 외할아버지는 왕 노야가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찾아왔다고 생각하셨지. 그땐 외할아버지가 막 혼인한 지 두어 달 된 때였는데 점포와 밭을 팔았고, 외할머니는 지참금을 모두 내놓았다. 외할아버지는 거의 모든 재산을 들고 성도(省都)로 갔고, 한 달 후 현령댁 자제가 붙잡혀 갔다는 소식이 왔다. 그땐 가을이 가까운 때였고, 물증, 증인 다 있어서 며칠 뒤 가을 처형 때 바로 목을 쳤단다.”
“정말 대단하세요.”
이동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일개 상인이 눈 딱 감고 성도에 가서 한 달 안에 억울함을 풀었다니, 그만한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 그 자제도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내가 아이를 가졌었다. 그 아내의 친정 적씨 가문은 현지 세도가로 진사 하나, 거인도 두어 명 나온 집안이었다.”
미소가 조금 흐려진 장 태태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온 뒤로, 집안에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조상께 불경하다고 하더니 나중엔 불효라고 욕했지. 불효는 못에 빠뜨려 죽이는 죄였다. 외할아버지는 부모도 모두 돌아가시고 또 독자인데 불효랄 게 뭐가 있겠니. 외할아버지는 현령의 자제를 고발한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다. 적가 낭자가 부른 배를 끌어안고 독수공방하게 되었으니 적씨 가문이 분명 언짢을 것이고, 적씨 가문에 시달렸거나…….”
장 태태는 말을 뚝 멈추고 한참 가만히 있다가 계속했다.
“어쩌면 적가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 전에 가문에서 먼저 나서서 적가 낭자의 복수를 했겠지. 외할아버지를 연못에 빠뜨려 죽이면, 적씨 가문에 잘 보일 수도 있고 가문에 외할아버지의 재산이 들어오기도 하니까 안팎으로 모두 좋은 일 아니겠니. 외할아버지는 똑똑한 분이라서 외할머니와 상의한 다음 점포, 밭도 버리고 은표와 장신구를 챙겨서 야반도주해서 호주까지 달아났다. 가는 길에 외할아버지는 몸이 상하셨다. 생각해 봐라, 성도에 있는 한 달 동안 얼마나 고생했겠느냐. 돌아오자마자 먼 길을 도망쳤으니. 휴. 호주에 도착해서 겨우 반년 만에 외할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 어머니는 유복자셨다.”
“그럼 증외조모는…… 후회하셨나요?”
이동은 숨을 죽이고 물었다. 매우 가볍고 작은 목소리였다.
“한 번도 후회하신 적 없다. 외할아버지가 눈 감기 전에, 외할머니에게 미안하고 걱정되어서 그렇지, 편안하다고 하셨다는구나. 외할머니는 걱정하지 말라고, 배 속에 아이가 아들이면 반드시 인재로 키우고 딸이라도 잘 키우겠다고 말씀하셨단다. 외할머니는 줄곧 외할아버지가 진정한 군자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