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28화 (228/463)

228화: 분란

방으로 돌아온 이동은 따듯한 물에 발을 데우고는 침상에 누웠다. 잠이 전혀 오지 않아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갖가지 색으로 수 놓인 모란 휘장을 올려다봤다. 강가에서 벗어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기뿐만 아니라, 복안 장공주, 어머니, 심지어 영원, 어쩌면 오황자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영 황후도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녀는 예전과 달라졌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달라졌다. 어쩌면 예전이야말로 황량몽일지 모른다. 백 노부인이 양 구야의 혼사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 매일매일 홀가분하고 후련했다. 줄곧 그녀를 옭아맸던 과거의 모든 것이 그녀 곁에서 싹 사라졌고, 전생과 그 꿈을 거의 잊어갔다. 그냥 꿈일 뿐이고, 진정한 미래는 전혀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백 노부인이 양 구야의 혼사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변한 건 영원이 경성에 온 것뿐 아닐까? 그리고 그녀가 강가에서 벗어난 것과. 어쩌면 그녀가 몰랐을 뿐, 영원이 전생에도 경성에 왔을지 모른다.

이동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몸을 뒤척였다. 양 구야가 결국 다시 오 낭자와 혼인하면, 그럼 장공주는? 진왕은? 예정대로 금을 삼키고 자진하고 예정대로 황상이 되는 걸까?

왜 그녀는 강가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왜 양 구야는 이번에도 오 낭자와 혼인할까.

자신이 강가에서 벗어나려고 움직였기 때문일까? 그리고 양 구야는……. 강환장이 경성에 없고, 양 구야는 전생에 자기가 누구와 혼인했는지 모른다. 설령 강환장이 있었대도, 양 구야가 시정 여인인 오 낭자와 혼인하는 걸 기꺼이 환영했을 것이다. 양 구야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걸 평생 질투했었으니까.

그럼 장공주는? 장공주도 행동하면, 자신이 강가를 벗어난 것처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새로운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금을 삼키는 방식으로 괴로워하며 죽는 건 면하게 될까?

노력해도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빤히 뜨고 보기만 하면 장공주는 양 구야처럼 전생에 걸어온 길을 다시 가게 되리라.

그걸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동은 밤사이 뒤척이다가 아침에 매우 일찍 일어났다. 밤새 악몽을 꾸었다. 장공주가 금덩이를 연달아 집어삼키는 모습을 봤다. 금을 집어삼키면서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 모습에 이동은 지옥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동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보림암에 도착했다. 복안 장공주가 뜨락에 들어갔을 때 이동은 벌써 자기 자리에 앉아서 홍니로의 불을 붙이고 숯 몇 개를 빼서 찻잎을 그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눈에 핏발이 선 것 같은데? 어제 잘 못 잤니? 무슨 일이야?”

복안 장공주는 맞은편에 앉아서 고개를 내밀고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일은 없어요. 어제 영원이 찾아와서…….”

이동은 진주 주렴 이야기를 했다. 복안 장공주는 길게 아하, 하더니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이동을 바라봤다.

“영원 그 녀석, 널 참 스스럼없이 대하는구나. 새벽에 담을 넘어 널 찾아가다니, 네 명성이 더러워질까 두렵지도 않대? 그런데도 넌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달구경 하다니. 참 재미있네. 너, 그 녀석한테 반한 건 아니겠지?”

복안 장공주가 별안간 묻는 말에 이동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일을 사람 보내서 시킬 수 있었겠어요? 온 경성에 떠들썩하게 알리려고요? 게다가 사람을 보내서 말을 전하면 제 명성에 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그런데 말이지 야심한 시각에 선남선녀가…….”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장공주의 모습에 이동이 가차 없이 말을 잘랐다.

“장공주께서 그런 저속한 말씀을 하시면 어떡해요. 수행하시는 분이잖아요. 마음에 불조가 있으면 보는 것 모두 불조가 보인다던데, 장공주 마음엔 뭐가 있는 거예요.”

“그래. 내가 저속한 걸로 치자.”

복안 장공주는 웃는 얼굴로 저속하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미리 말해두는데, 깊이 생각할 것 없어. 영원 같은 녀석은 눈이 정수리에 달렸을 거야.”

“저도 알아요. 전 그냥 영 칠야를 어린애라고 생각해요.”

이동이 어이없는 듯 한숨을 내쉬자, 복안 장공주는 풉 하고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어린애? 요 계집애야, 네가 몇 살인데?”

한바탕 웃더니, 복안 장공주가 허리를 세우고는 웃다가 흘린 눈물을 닦았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해. 넌 열몇 살짜리 계집애 같지 않긴 해. 한 번도 네가 나보다 어리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가끔은…….”

복안 장공주는 의문이라는 눈빛으로 말을 멈췄다.

“노인네 같을 때가 있어. 도저히 널 이해 못 할 때가 있단 말이지.”

“절 이해하려면 어렵지 않아요. 혼인 한 번이면 돼요. 안 좋은 사람하고 혼인하면 한 번이면 알게 되실 거예요.”

이동은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한 이야기였다. 다만 혼인한 지 반년 만에 깨달은 게 아니라 평생 시달린 다음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 됐어.”

복안 장공주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찻잔을 들어 흐뭇하게 홀짝였다. 이동은 잔을 들고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실 경성, 혹은 온 세상에서 어울릴 만한 사내를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장공주는 달관한 분이니까, 혼인한다면 중시하는 건 마음일 테고 상대와 결발 부부인지 아닌지는 연연하지 않으실 거고요. 그러면 더 많아져요. 경성에도 많고요. 예를 들면 묵 이야?”

복안 장공주가 차를 따르라는 듯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 올리고 담담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찻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서 그런 것도 조금 있었고, 대부분은 눈에 든 사내가 없어서 그런 게 맞아. 나중에 계 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도 떠났지. 갈수록 그럴 생각이 없어졌어. 십여 년 동안 내가 존경하고 감탄할 만한 사내도 없진 않았어. 예를 들면 네가 말한 묵 이야. 하지만 난 혼인하고 싶지 않아.”

복안 장공주의 담담한 말투에 자유로움과 느긋함이 느껴졌다.

“누구한테 화가 나서가 아니야. 사내가 눈에 차지 않아서도 아니고. 속세의 예법이 불공평해서도 아니야. 다른 이유는 없어. 그저, 혼인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복안 장공주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같은 나날이 나는 참 좋아. 혼자 화원을 거닐고. 얼마나 자유로워. 옆에 있는 사람 기분이 어떤지, 의중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밤에 갑자기 눈을 떠도,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서 불을 켜고 글을 쓰거나 옷 갈아입고 달구경 해도 돼. 차를 마셔도 되지. 옆에서 신경 써주는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누구한테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

장공주의 말에, 이동은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설령 고귀한 공주가 아니라고 해도 구박을 받거나 좌지우지될 성격은 아니지. 하지만 난 아이를 낳고 기르고 집안일 하는 게 싫어. 이리저리 응대하는 것도 싫고. 특히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제일 싫어.”

복안 장공주는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상 같은 자식을 여럿 나았다고 생각해 봐. 죽고 싶을걸? 그러고 어떻게 살아?”

이동은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장공주의 말이 갈수록 신랄해졌다.

“장공주 같은 아이일 수도 있잖아요.”

이동이 겨우 숨을 돌린 후 하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 같은 아이면 더 큰 일이지. 우리 어머니는 자식이 황상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줄곧 그러셨는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미였을 거라고.”

이동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난 원래 필요 없는 존재였어. 나를 통해 대를 잇거나 가업을 이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자유롭게 살래. 혼인하고 싶지 않으니까, 혼인하지 않을 거야.”

복안 장공주는 사내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나비가 수 놓인 비단 신발을 흔들어댔다.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느긋한 모습이었다.

“조 노부인이 보름이면 계속 찾아오시잖아요. 한 번도 빠짐 없이요. 지난번에 와서 말했던 그 상인 가문, 확실히 괜찮은 상대예요.”

이동은 나긋나긋한 말투로, 장공주가 혼인하고 싶지 않아 해도 어떻게든 혼인시키려는 사람이 있음을 그다지 완곡하지 않게 귀띔했다.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고 다리를 떨던 것도 멈췄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상께서 선황 앞에서 맹세했다고 하셨잖아요. 장공주를 시집 보낼 생각뿐이지만, 강요하진 않을 거라고. 장공주께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상 혼인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이동은 손에 쥔 찻잔을 내려다봤다.

“장공주께서 황상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황상보다 많으면 좋았을 텐데요. 황상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장공주보단 안 좋잖아요.”

이동은 잔뜩 찌푸린 장공주를 바라봤다.

“황상이 붕어한 후엔, 아무래도 사왕야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땐 어떻게 될까요? 장공주는 대장공주로 올라가시겠죠. 사왕야도 황상처럼 장공주께서 출가하길 바라기만 하고 강요는 하지 않을까요? 주 귀비는 또 어떻게 나올까요? 그땐 태후가 되셨겠죠.”

이동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또 모르죠. 주 귀비가 황상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고요.”

“너 어제 영원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어?”

이동을 빤히 바라보던 복안 장공주가 별안간 물었다.

“제가 며칠 내내 생각한 거예요. 장공주께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내내 생각했어요. 강가에서 벗어난 이래 그 생각만 했어요.”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조금 매서워진 시선을 담담하게 마주했다. 의자에 기댄 복안 장공주의 매서운 눈빛이 서서히 가시고 피곤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런 생각을 뭐 하러 해?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걸 보니 한가한가 보다. 앞으론 그런 생각하지 마. 눈앞에 꽃이 있으면 꽃구경하고, 차가 있으면 차를 마셔.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다가 가타부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점심, 복안 장공주는 평소보다 늦게 돌아갔고, 이동이 보림암에서 나올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비 속에 마차가 천천히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다. 자등 산장 입구에 눈에 익은 비단 오동 마차가 서 있었다.

한 손으로 휘장을 걷고 마차를 본 청국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낭자, 저건 우리…… 아니, 우리가 아니지. 예전에 우리 거였던…… 강가 마차 같은데요?”

청국은 ‘강’자도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설명하려면 꺼내야 했다.

이동은 머리를 내밀었다. 이동의 마차를 본 문지기가 벌써 달려 나와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표정과 그다지 용기가 나지 않는 표정으로 그 마차를 가리키며 놀란 말투로 보고했다.

“낭자, 그, 그…… 강가…… 강가 새 대내내입니다.”

새 대내내라는 말을 뱉은 뒤로는 문지기도 훨씬 순조롭게 말을 이었다.

“낭자를 뵙고 싶다고요. 온 지 한참 됐습니다. 태태는 아침 일찍 성에 가셨고, 대야도 안 계셔서 만 어멈에게 이야기했더니, 낭자를 방해하면 안 된다고 해서요. 낭자가 안 계시니 안으로 모실 수도 없고 여기에 세워 두었습니다. 이곳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었지요.”

경성 저택처럼 사람이 오가는 곳에서 강가 새 대내내가 이가 문 앞에 서 있는 걸 누가 봤다면 어떻게 됐겠나.

“무슨 일로 왔대?”

강가 새 대내내라는 말을 들은 청국은 반은 놀라고 반은 화가 나서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낭자를 만나고 싶다고요. 다른 건 물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지기는 울상을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