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너무 빨리 흐르는 시간
“좋습니다. 그럼 이 일은 낭자가 준비하는 것으로 하죠. 내보낸 다음에 사람을 보내 내게도 알려주고요. 첫째가 진왕을 때린 일, 낭자도 알고 있죠?”
영원은 화제를 돌리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미가 참…….”
“성미요? 흥. 필부의 분노는 작은 피를 보고 말지만, 천자의 분노는 그 피가 천 리는 흐릅니다. 필부의 분노에도 미치지 않는 정도를 무슨 성미라고.”
이동은 영원을 살폈다.
“필부의 분노라는 말을 이렇게 쓰는 게 아닐 텐데요. 그 뒤에 온 천하가 소복을 입는다는 어쩌고요.”
“그 말은 필요 없습니다. 낭자도 그 문장을 읽었습니까? 그 문장이 진짜라고 쳐도, 그땐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무한 시대였고 지금은……. 낭자는 조정에 나가 본 적이 없어서 모릅니다. 신하는 황상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서 있고, 중간엔 나 같은 어전시위도 있어요. 시신 사이에 피가 흐르고 온 천하가 소복을 입는다?”
(※전국책 위서, 당저불욕사명唐雎不辱使命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진나라 시황제가 이미 망해버린 위 왕 안릉군安陵君에게 땅 500리를 줄 테니 안릉 지방의 기름진 땅 사방 50리와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안릉군은 신하 당저를 보내 거절의 뜻을 전달했다.
이에 진시황이 대로했다.
“천자의 분노를 모르는가?” 그러자 당저는 “천자가 안 되어 봐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감히 황제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하면서 “천자의 분노는 사자백만死者百萬이요 유혈천리流血千里임을 진정 모르는가.” 그러자 위 왕의 신하가 되받길 “황제께서는 서생의 분노를 모르십니까? 서생의 분노는 다섯 걸음 안에 황제를 죽이고 자신도 죽지요.”
필부의 분노는 두려울 것이 없지만, 서생이 분노하면 그 힘이 차츰 커질 것이고, 드러누운 시체와 피가 갈수록 늘고 천하의 백성이 상복을 입게 될 날이 올 텐데,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고 한 말.
순간 시황제는 속으로 뜨끔해 하면서도 위 왕 신하의 배포에 감동되어 죄를 묻지 않고 정중히 사과했다고 한다.)
코웃음 치며 웃던 영원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영원은 이동을 바라보며 몸을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웃으며 물었다.
“나라면 비슷하게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동은 멍하니 영원을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농담 같지 않았다. 영원이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라고 자꾸만 여겨진다고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칠야는 경성에…….”
한참 만에 겨우 입을 연 이동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경성에 계획이 있어서 온 거겠죠. 영 황후와 오황자.”
이동의 말은 주절주절 두서가 없었다. 하지만 영원이 알아들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만일의 경우엔요? 그것까지 다 계획했나요?”
“만일 실패하면?”
영원의 미소가 사라졌지만, 얼굴이 심각하진 않았다. 그의 표정은 후원의 달빛처럼 차분하고 담담했다.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하면 어떻게 할지도 계획했나요? 당신, 영 황후, 오황자?”
영원은 매우 빠르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아뇨, 퇴로가 있느냐고 묻는 거라면, 이 일엔 퇴로란 없습니다.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싸움터로 나가면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결전을 각오함을 이르는 말)하고 사기를 고무해야지요. 내가 도모하려는 이 일은, 극단의 수단을 써야 하는 일입니다. 극단의 수단을 쓰는 일에 퇴로란 없어요.”
이동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일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큰 누님이 경성에 들어올 때…….”
영원은 목이 메는지 한참 만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요. 누님이 출발할 때 사당에 가서 조상 위패에 하나하나 절을 올렸습니다. 혼인하러 간 게 아니라 죽으러 간 거였습니다.”
이동은 못 견디게 씁쓸해졌다.
“영씨 일족은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백여 명은 됩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누님을 아낀대도 누님 하나 때문에 황명을 거역하고 멸문지화를 초래할 순 없었어요. 영씨 가문도 누님 하나 때문에 검을 들고 일어서서 온 북삼로 백성을 전란의 불길에 밀어 넣을 수 없었고요.”
영원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나도 집 떠나기 전에 사당에 갔었습니다. 누님처럼 영가 조상 앞에 일일이 무릎 꿇었습니다. 누님은 영씨 일가를 위해 홀로 죽으러 갔고, 나는 누님을 위해 자청해서 가문에서 나와 북삼로를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갈 계획도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성패를 막론하고 온 가문이 휘말릴 일이에요. 당신이 자청해서 가문을 나온 것, 영 황후께서 죽을 각오로 조상에게 절을 올리고 떠난 것, 모두 당신이 하는 말이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당신은 가문과 인연을 끊었다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이동이 매우 완곡하게 말했다.
“음, 그것 때문에 나도 오는 내내 고민했습니다. 성공하면 말할 것 없고, 혹시 실패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집안과 영씨 일족을 연루해선 안 되니까. 즉, 누구에게 뒤집어씌울까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래서 누구에게 뒤집어씌울 건데요? 누가 이렇게 큰 화를 감당할 수 있어서요.”
영원이 빙긋이 웃었다.
“그건 말입니다. 그건 따져봐야지요. 한 집에 다 뒤집어씌울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난 똑똑한 사람입니다. 알지요? 낭자도 내가 반드시 뜻을 이룰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북삼로에 있을 때도, 전장에 나가고 도적을 소탕하러 갈 때도 지면 어떡할지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질 리가 있나요? 정말 우습죠. 난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요.”
영원은 오만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것도 같고, 이동을 안심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문 이야도 그런 말을 했어요. 큰일을 하려면 이것저것 가리면 안 되고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이동은 무슨 기분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서글픈 건 아닌데 고무되지도 않았다.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것이 착잡하기만 했다. 그리고 정리도 되지 않았다.
영원의 말엔 모순이 있었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면서 떠나기 전엔 왜 사당에 인사하고 왜 자청해서 족보에서 제명했을까. 그건 필사의 마음을 세우고 뻔히 오면 안 될 곳에 와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오는 길엔 또 필승의 신념을 가득 품고 있었다.
“경성에서 자랐습니까?”
영원은 그다지 그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듯했고, 이동 역시 마찬가지라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에요. 두어 살 때 어머니를 따라 경성에 왔으니까요.”
“줄곧 경성에? 나간 적 없고? 가장 멀리 간 곳이 어딥니까?”
“가장 먼 곳은…… 서하산이에요.”
이동은 조금 아련해졌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는 왕부에 갇혀서 날이 밝기도 전부터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까지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바삐 움직여도 집안일은 끝나지 않았고, 골칫거리가 가득했고 장부가 쌓였다.
그녀가 가 본 가장 먼 곳이 서하산이었다. 강환장이 좌천되어서 북부에 갔고,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그녀는 큰 병에서 막 일어나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홀로 서하산으로 갔다. 왜 간 건지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여름 깊은 밤에 그녀는 서하산 황량한 산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들쭉날쭉 튀어나온 돌이 발바닥을 찌르면서 욱신 통증이 올라왔지만 기어코 산 정상으로 기어 올라가서 고개를 들고 사방을 둘러봤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그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멀기 짝이 없으면서 또 가깝기 짝이 없는 하늘이었다. 서늘한 산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때렸다.
그렇게 산 위에 밤새 서 있었다. 밤새 별 하늘을 올려다보며 산바람을 맞았다.
며칠 뒤 다시 수녕왕부로 돌아갔고, 왜 간 건지, 왜 돌아간 건지, 지금 모두 기억나지 않았다.
“서하산? 서하사가 있는 곳? 경치는 어떻습니까?”
영원이 흥미진진한 듯 물었다.
“여름에 가면 별 보기에 좋아요.”
이동은 생각을 거뒀다. 이번 생은 전생이 아니다. 어느 날 다시 서하산에 간다면, 그때도 밤에 산에 올라가 정상에서 산바람을 맞는대도 분명 기쁨이 가득할 것이고, 보이는 곳, 곳곳이 아름다우리라.
영원은 동경하는 표정이었다.
“올해 여름은 지나서 아쉽군요. 내년 여름에 가야겠네. 서하산은 별빛이 좋고, 낭자 후원은 달빛이 좋고. 경성이 좋은 점은 딱 이거 하나죠. 봄과 가을이 있고 사계절이 분명한 것.”
“북삼로엔 봄가을이 없나요?”
이동이 웃으며 물었다.
“북삼로는 겨울이 길고 여름이 짧고 봄가을이 없습니다. 9월, 10월이면 눈이 내리고요. 눈이 내리면 한겨울이 됩니다. 눈이 내리기만 하면 지붕 가득 쌓입니다. 그렇게 쌓인 눈이 다음 해 4월이나 되어야 녹기 시작하죠. 눈이 녹기 시작하면 점심땐 웃통을 벗고 다녀도 됩니다. 북삼로 여름은 경성과 다릅니다. 경성의 여름은 답답할 정도로 덥지만, 북삼로 여름은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해서 덥긴 해도 끈적하거나 답답하진 않아요.”
영원의 말투에 그리움이 느껴졌다.
“겨울은 더 좋죠. 경성은 한겨울에도 빙고를 써야 하는데, 우리 북삼로는 지금쯤이면 돼지, 양을 잡아서 그냥 밖에 던져두면 눈 깜짝할 사이에 얼음으로 업니다. 한 해는…… 누님이 막 집 떠난 지 2년밖에 안 되었을 때인데, 그때야 누님의 처지를 알게 되어서 아버지와 큰형님과 크게 한바탕하고는 집에 이야기하지 않고 관외로 나갔습니다. 병사 여남은 명만 데리고요. 나가서 며칠 지나지 않아 폭설을 만나서 길을 잃었습니다. 가지고 간 건량도 금세 다 먹었고요. 그런데 하필 관외에서 가장 큰 도적 떼를 만나서…….”
영원이 갑자기 말을 멈췄고 이동은 잠시 기다리다가 못 참고 물었다.
“그래서요? 도적을 만나서 달아났나요? 길은 찾았고요? 집에 돌아왔어요?”
“그야 물론이죠. 돌아가지 못했으면 여기 앉아서 이야기도 못 했게요.”
영원의 느릿느릿한 대답에 이동은 말문이 막혔다.
영원은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도적 떼도 재수가 너무 없어서 날 만난 거죠. 한 백 명 됐는데, 아무리 내가 데리고 간 사람들이 솜씨가 좋아도 혼자 열은 못 막죠.”
“얼른 달아날 생각은 하지 않고 소탕할 생각을 했어요?”
이동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꼭 소탕할 생각은 아니었고. 아까 이야기했잖습니까. 건량을 거의 다 먹어갔다고. 상단을 막 턴 도적 떼라, 기름이 줄줄 흐르더라고요.”
이동은 어이없어서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야말로 북삼로에 가장 큰 도적이라고 문 이야가 그러더니, 틀린 말이 아닌 듯했다.
“운이 좋았죠. 밤새 움직여서 여남은 명을 사로잡았고, 싹 다 죽여서 토막 내서 썰매에 묶어서 끌고 갔죠.”
영원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이동의 시선을 못 본 체했다.
“폭설이 내렸으니 인간이 먹을 것도 없고 늑대도 마찬가지였겠죠. 우리가 인육을 끌고 가니 늑대 떼가 나타났어요. 우린 앞에 있고 늑대 떼는 뒤에. 우리가 달아나면서 늑대를 향해 인육을 던지니까 늑대가 갈수록 많이 몰려들더라고요. 사흘 후, 늑대가 천 마리는 몰려들었습니다. 던질 인육이 없어진 다음, 그날 저녁에 우리는 산적 소굴 가까운 곳까지 달아났고 굶주린 늑대는 산적을 겹겹이 에워쌌어요.”
“아까, 건량을 거의 다 먹었다고 했는데, 그럼……. 그럼…….”
이동의 머릿속엔 온통 사람을 크게 토막 냈다는 말뿐이었다. 사람을 돼지고기, 양고기, 소고기처럼 토막 내서 늑대를 먹였다니. 그럼 사람도 먹은 걸까?
“사람이 여남은 명이었으니 말도 열 마리 있었죠. 인육은 늑대 먹이고, 사람은 말고기 먹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영원이 능글맞게 웃으며 하는 말에 이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사람을 먹지 않았다니 되었다.
“산적들은 밤새 늑대와 싸웠습니다. 어찌 됐든 관외의 산적이라 늑대보다 흉악하더군요. 늑대 천 마리와 싸워서 양쪽이 다 파멸할 정도였으니까. 북삼로라서 가능한 겁니다. 경성 일대에서는 어림도 없어요.”
이동의 얼굴이 퍼레졌다.
“경성엔 도적이 없고 그 많은 늑대도 없어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영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전해 보였다.
“경성은 바람도 부드럽고 비도 부드럽고, 사람 죽이는 칼도 부드럽더군요.”
“부드러운 칼로 사람 찌르는 건 칠야의 특기 아닌가요?”
이동이 가차 없이 하는 말에 영원은 눈썹을 치켜들다가 이내 다시 끌어내리고 활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처럼 똑똑한 사람은 부드러운 칼도 마땅히 날카로운 칼처럼 써야죠.”
“늦었어요. 이만 돌아가세요.”
이동은 화청 구석에 점점 불빛이 흐려지는 홍니로를 보고는 웃으며 시간을 상기시켰다.
“그렇지. 늦었군요.”
영원이 나른하게 일어섰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흐르는구나! 갑니다!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요.”
이동은 일어서서 두봉을 여미고 계단에서 내려가 곧장 돌아갔다. 영원은 화청에서 뛰어나와 어둠 속에 서서 이동이 월동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그렇게 잠시 서 있다가 하늘의 반월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목을 흔들며 한숨을 내쉬고는 겅중겅중 각문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