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소유의 옛이야기
강남에서 돌아온 문 이야는 다시 한가해졌다. 이신은 거의 매일 성에서 문회에 참석하고 벗을 만나는데, 문장 쪽으론 이신에게 도와줄 것이 없었다. 이동은 이미 강가에서 벗어났고, 재가하고 말고는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 태태는, 태태는 매일 장부를 보고 장사하느라 바빴다. 그건 더더욱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고.
경성에 벌어진 큰일에 대해서는 복안 장공주도 영원도 그를 찾지 않아서 먼저 나설 수가 없었다. 그는 이가의 막료이고, 이가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으니 그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았다.
문 이야는 경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 외엔 먹고 마시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경치 구경하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었다.
오늘은 서하사에서 공양을 먹고 저녁 수업을 들은 다음 자등 산장으로 돌아왔을 때 해가 이미 완전히 저물었다. 마차에서 내려 중문으로 들어간 문 이야는 종일 채식한 배를 문지르며 자연스럽게 큰 주방으로 향했다.
중문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배가 고파졌다. 그것도 꽤 심하게.
자등 산장 위아래 모두 식사를 마쳤을 시각이었다. 주방도 깔끔하게 치웠고 사람이 없었다. 드넓은 뜨락은 고요하고 서쪽 곁채에만 빛이 환하고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소유 낭자!”
“누구냐?”
문 이야가 마당에 서서 불이 환한 곁채 쪽으로 부르자, 소유가 목소리 높여 물으며 휘장을 열고 나오다가 문 이야인 걸 보고 놀라서 물었다.
“이야세요? 식사를 아직 안 하셨어요? 식사하고 돌아오신다면서요?”
“먹긴 했는데, 배가 또 고파져서. 다 채식이라 허기지는구나.”
문 이야가 코를 킁킁거리며 다시 물었다.
“어탕 쇄과자냐? 술게도 있구나. 두부 냄새도 나고. 소유 낭자, 아직 식사 전이냐?”
소유 뒤에서 녹매와 추미가 양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막 상 차렸는데 이야가 이제야 오셨네요. 드시고 오신다고 해서 아궁이도 다 껐는걸요!”
거리끼는 일이 거의 없는 추미가 대뜸 하는 말에 녹매가 그녀를 슬쩍 밀었다.
“추미! 소유 언니, 내가 도와줄 테니 불 지펴서 양고기 탕 데울까? 양고기 좀 썰고, 아침에 졸인 족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병 조금만 굽고.”
“그리고 술도.”
문 이야가 코를 킁킁대며 술 냄새를 맡는 와중에, 술이라는 말에 추미가 고함쳤다.
“아이고! 이야기하느라 술 끓는 것도 몰랐네!”
“괜찮으면 젓가락 하나만 놓아다오. 함께 먹자꾸나.”
문 이야는 말할수록 침이 꼴깍 넘어갔다. 소유는 녹매를 바라봤고, 녹매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야 언니 보러 온 거니까 언니가 정해.”
“음. 이야, 괜찮으시면 들어오세요.”
소유가 길을 비켜주자 녹매가 안으로 들어가며 웃음 지었다.
“그럼 내가 젓가락 가지고 오면서 족발도 가지고 올게. 이야가 좋아하시는 거잖아.”
널찍한 서쪽 곁채, 동쪽 벽 아래 큰 화항 위에 작은 상 두 개가 붙어 있었다. 탁자 위 홍동 솥 안엔 뽀얀 탕이 끓기 시작했다. 솥 주변엔 양고기, 배추 등 여러 가지 쇄과자 재료, 술게, 혈장, 무 짠지 같은 냉채가 있었다. 화항 구석의 높은 탁자 위 작은 홍니로엔 황주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문 이야는 얼굴이 환해져서 검지를 휘둘러댔다
“참으로 좋구나. 너희들은 움직일 것 없다. 그냥 앉아 있어라. 의자 하나만 가져다 다오. 난 화항 가에 앉아서 먹으면 된다. 역시 너희들이 먹을 줄 아는구나.”
소유가 추미를 시켜 추미가 웅크리고 앉아서 쇄과자를 살피던 팔걸이의자를 옮겨주자 문 이야는 자리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고 가늠해 보았다. 높낮이, 거리가 딱 맞았다. 추미가 작은 받침 두 개를 꺼내서 문 이야 등에 대주자 문 이야는 편안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집이 좋구나!”
녹매는 그릇과 젓가락, 새로 꺼낸 족발을 문 이야 앞에 내려놓고, 소유는 그릇을 꺼내 문 이야에게 찍어 먹을 장을 만들어 주었다. 추미는 모두의 잔을 채웠다.
문 이야는 젓가락을 들고 양고기부터 탕에 살짝 익혀서 먹으면서 세 사람을 바라봤다.
“하던 대로 편안하게 먹고 이야기해라. 난 없는 셈 쳐라. 시중들 것 없다. 알아서 먹으마. 쇄과자 요리 먹는 건 내 전문이다. 편안히 난 없는 셈 쳐라.”
소유와 두 사람은 문 이야가 체면 차리지 않고 잘 먹고 마시는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시중들 것도 없어서 각자 화항에 올라가서 쇄과자를 먹고 술을 마셨다.
“소유 언니, 정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술 두 잔 마신 추미가 먼저 물었다.
“안 가!”
소유는 대답은 시원스럽게 하고는 안색은 조금 흐려졌다.
“진가 오라버니, 좋은 사람 같던데. 생긴 것도 잘생겼고 키도 크고 건장하고. 게다가 딱 봐도 본분을 지키는 믿을 만한 사람 같던데. 내가 옆에 있는데도 이쪽으로 힐끔거리지도 않았어.”
추미는 자신만의 사내를 보는 기준이 있었다. 고기를 입속으로 넣으려던 녹매가 얼른 고기를 내려놓았다.
“언니 일을 잘 모르면서 헛소리하지 마.”
“대체 진가 오라버니의 뭐가 문젠데? 오후에 물어볼 때 밤에 알려준다고 했잖아!”
추미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녹매는 못 말린다는 듯 추미를 흘겨보더니 재빨리 문 이야 쪽으로 눈을 깜빡였다. 녹매의 시선을 알아챈 추미가 깔깔 웃었다.
“이야가 남도 아닌데, 뭘.”
술을 머금고 있던 문 이야는 사레라도 걸린 듯 잔을 내려놓고는 추미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 녀석, 녹매가 귀띔해주는 데 그걸 대놓고 티 내면 어떡하냐. 나니까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녹매가 난처해지지 않아.”
추미는 혀를 날름했고, 녹매는 기가 차서 젓가락을 뒤집어 잡고 탁자 건너편에 있는 추미의 이마를 두들겼다.
“망할 계집애, 강가에서 몸만 돌아오고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어, 너!”
“녹매 언니, 그건 아니야. 마음은 왔는데 눈치가 안 온 거지.”
추미가 웃으며 뒤로 몸을 피했다.
“언니, 이번만 용서해줘. 난 그냥, 집에 있으니까 속셈을 부릴 필요 없는 것 같아서 그런 거지.”
“그래도 생각 없이 굴면 안 되지.”
소유가 가차 없이 하는 말에 추미는 목을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말 못 할 일이 아니라면 이야기해 보아라. 어쩌면 내가 의견을 주고 방법을 생각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으냐.”
살짝 배불리 먹은 문 이야는 오지랖 본능이 왕성해졌다.
“말 못 할 게 뭐가 있나요. 녹매, 네가 이야기해.”
소유는 그리 좋지 않은 안색으로 녹매에게 말했다.
“소유 언니 일을 우리 저택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만 어멈이 소유 언니를 데리고 오던 날은, 제가 낭자를 모시던 때였는데 그날 마침 낭자가 태태 거처에 계셨어요. 저는 만 어멈에게 들은 대로 말하는 거니까, 혹시 잘못된 점이 있으면 본인이 여기 있으니까 바로 고쳐 줘요. 소유 언니의 어머니는…….”
녹매는 일단 자세하게 말문을 열고는 첫마디부터 막혔다. 소유가 양고기를 탕에 익히면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제 어머니는 열대여섯 살에 사창가에 팔려 갔어요. 저도 정말 못생겼는데 제 어머니는 저보다 더 못생겼죠. 못생겼으니 돈도 잘 못 버는데 나중엔 나까지 생겼죠. 다행히 음식 솜씨가 훌륭해서, 저를 품은 후부터는 주방에서 음식만 했어요. 나중에 말을 파는 상인이 왔는데, 어머니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저까지 속량해 주셨어요. 나중에 그 상인이 큰 병이 났을 때 어머니가 진심을 다해서 보살폈죠.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노비 문서를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은자까지 10냥을 주면서 저와 어머니를 풀어주셨죠.”
“맞아요. 그렇게 된 거예요.”
녹매는 아마도 소유의 담담한 모습에 물들었는지 말투가 홀가분해졌다.
“소유 언니의 어머니는 처음엔 언니를 데리고 반루에서 부엌일을 거들었어요. 언니가 여덟 살쯤 됐을 때, 언니가 주루에서 자라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주루 일을 그만두고 자금 서원에서 부엌일을 시작했는데, 진가가 그 이웃이었어요. 진가는 서원에서 2대째 잡일 하던 집안인데, 진가 태태가 언니 어머니와 마음이 맞아서 의자매를 맺고 언니랑 진가 오라버니가 같이 자랐죠. 청매죽마로 사이가 꽤 좋았어요. 열네 살 때 언니는 진가 오라버니랑 정혼했고요.”
녹매는 소유가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말 없이 술을 홀짝이는 걸 보고 잘못 말한 부분이 없음을 알고 계속 말을 이었다.
“소유 언니가 열일곱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쓰러졌어요. 폐에 문제가 생겼는데 전염되는 병이라서 서원에서 언니 어머니가 주방에 못 들어가게 했어요. 그리고 서원에서도 못 살게 했어요. 옮을까 봐요.”
녹매는 소유를 힐끔거리며 말했고, 소유는 고개를 젖혀 잔을 비우고는 잔을 채웠다.
“언니는 진가와 상의했죠. 진가에서는, 의원이 이 병은 낫는 병이 아니라고 했다고 얼른 혼인해서 들어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암자 같은 곳에 모시라고…….”
녹매는 말을 멈췄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죽길 기다리라는 거죠.”
소유는 고개를 숙인 채 술잔을 내려다봤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요리, 간식을 만들었고, 열몇 살부터 주방에서 한몫했어요. 언니 어머니 음식 솜씨가 매우 좋았어요. 반루에 있을 때도 당두 밑에서 일했거든요. 반루는 돈도 많이 줘서 그때는 언니 어머니가 1년에 백 냥 넘게 벌었어요. 나중에 서원에 가서는 서원 주방을 총괄했고, 반루 때보단 못 벌어도 1년에 20에서 30냥은 벌었거든요. 나중엔 언니도 한몫해서 서원장의 요리를 맡아서 했죠. 1년에 못 해도 열몇 냥은 벌었고요. 10여 년 동안 모녀 둘이 천 냥 정도를 모았대요.”
“1,340냥.”
소유가 나지막이 말했다.
“많이도 모았네!”
추미가 놀라서 고함치자 녹매가 눈을 부릅떴고, 추미는 얼른 입을 막았다.
“진가에서는, 어머니를 보내고 나면 서원장에게 부탁해서 어머니 일을 이어받으라고 했죠. 1년에 30냥 넘는 돈을 남 주기엔 아깝다고요.”
소유는 추미의 고함을 못 들은 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는 누가 뭐래도 어머니를 암자에 보내려고 하지 않으려 했죠. 어머니를 모시고 서원에서 나와서 집을 빌리고 여기저기 의원을 찾아다녔어요.”
녹매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가에서는 저더러 집안 말아먹는 거라고 했어요.”
소유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느껴졌다.
“어머니 병은 나을 병이 아니라서 제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고치지 못한다고요. 그런데도 굳이 난리 부린다고. 타고난 집안 말아먹을 자식이라고요. 당장 어머니를 암자에 보내지 않으면 진가 문을 넘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추미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문 이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자는 우리 어머니가 번 거잖아요.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왜 그 은자를 어머니에게 쓰면 안 돼요? 고칠 수 있는 병이든 아니든 일단 고쳐야죠. 고칠 수 없더라도 고쳐야죠! 어머니 돈을 어머니가 쓰는 건데, 우리 모녀가 번 돈을 왜 남이 왈가왈부해요.”
10여 년이 흘렀어도 소유의 분노는 전혀 줄지 않은 듯했다.
“진가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니. 들어오라고 빌어도 내가 역겨워서 싫어요!”
소유가 잔을 탁, 내려놓자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추미가 얼른 손수건을 꺼내 소유의 손을 닦아 주었다.
“인연 끊으면 끊으라지. 집안 말아먹는다고 타박하다니, 나야말로 양심 없어서 싫어!”
소유는 추미에게 손수건을 받아서 힘껏 손을 닦았다.
“난 상관하지 말고 네가 이야기해.”
“응, 그렇게 된 거예요. 언니와 진가의 혼인은 끝났죠. 언니는 어머니를 모시고 성으로 들어갔어요. 두어 해 동안 치료했는데 결국 고치지 못했어요. 언니는 어머니 초상을 치르고 반루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어요. 만 어멈이 그러는데, 그때 언니 손엔 몇백 전밖에 없었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