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성장한 주육
아라는 주 육소야를 흘겨봤다. 지난번에 사왕야가 먼저 찾지 않으면 만나러 가면 안 된다고 당부한 것이 바로 주육이었다.
“네가 사왕야를 왜 만나!”
주육은 조금 다급해졌다. 아라가 사왕야를 만나러 가는 걸 내버려 뒀다가는 야단이 난다. 사왕야를 탄핵하는 상주서의 열기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찾아갈 것 없다. 찾아가도 소용없어!”
“그럼 소야가 은자를 주실래요?”
아라의 뽀얗고 보들보들한 손이 주육 앞에 나타났다.
“이건 은자 문제가 아니래두.”
“그럼 사왕야에게 말씀드려서 저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줘요!”
아라가 주육의 말을 잘랐다.
“그건 안 된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사왕야를 만나는 것도 안 된다. 그럼 어떡하라는 거예요? 죽으라는 건가요? 그럼 천으로 목을 매게요. 어디가 좋을까요?”
“말하는 것 좀 보아라. 목을 매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아라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자 주육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라가 아둔하긴 해도 주육 정도는 상대했다.
아라가 눈물을 툭툭 떨어뜨렸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죽으라는 거잖아요. 육소야, 그럼 제가 어쩌면 좋을지 말씀해보세요. 못 산다고요. 그럼 죽어야죠. 가위로 이 자리에서 숨을 끊을게요. 아니면 사왕야 앞이나 수국공부 앞으로 갈까요? 아니면 왕부 앞이요?”
“됐다, 됐어. 울지 말아라. 그런 뜻이 아니다. 일단 눈물을 그쳐라. 끊긴 뭘 끊어. 그런 뜻이 아니다. 됐다, 됐어. 일단 진정해라. 이 일은 사왕야가 나서야 할 일이라는 걸 너도 알지 않으냐. 내가 사왕야를 만나보마. 바로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쭤보마. 그럼 됐지? 넌 일단 돌아가라.”
주육은 아라의 눈물에 온몸에 땀이 흘렀다. 맞는 말이긴 했다. 사왕야가 아라를 총애하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냈는데 이 경성에서 연향루에 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은자도 없고, 사왕야는 그녀를 왕부에 들일 리가 없고. 그런데 은자도 주지 않으면 손가락 빨란 말 아닌가.
사왕야에게 여쭤봐야겠다.
아라는 주육을 풀어주고, 훌쩍이면서 깊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육소야, 아라와 연향루 몇십 명의 목숨이 육소야의 손에 달렸어요. 소야의 큰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소야, 서두르셔야 해요.”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마.”
주육은 호언장담하고 아라를 돌려보낸 다음 말에 올라서 이 일에 관해 생각했다.
사왕야는 분명 아라를 저택에 들일 리가 없지. 설사 아라를 매우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시기에 아라를 왕부로 들여서 일을 망칠 리가 없어. 그러지 않으려면 아라에게 돈을 주어야 할 것인데, 그 은자는 내 몫이 될 거잖아. 은자가 어디 있어서! 집에 달라고 해? 집안 장부에서 은자를 빼 오는 걸 백부와 큰형님에게 감출 수가 있겠어? 매달 아라에게 돈을 주는 걸 알게 되면 또 사달을 일으킬 텐데.
아버지를 찾아가? 아니지, 이건 아버지에게 말씀드릴 일이 못 되지. 게다가 아버지도 은자가 없고. 아버지의 은자는 아버지가 쓸 곳이 있는데 사왕야 대신 그 은자를 내주었다가는……. 게다가 그 은자를 몇 달, 몇 년이나 주어야 할지 모르는데. 적은 돈이 아닌데.
“원 형님을 찾아가 어쩌면 좋을지 물어볼까? 원 형님은 영리한 사람이니 분명 방법이 있겠지. 그래, 원 형님을 찾아가자!”
결심한 주육은 말머리를 돌려 경부 관아로 직행했다. 그런데 영원은 경부 관아에 없었다. 주육은 전전사로 향했다. 역시나, 전전사 연무장에서 막 단련하고 내려오는 영원을 발견했다.
“형님! 무술 실력이 대단하군!”
영원 혼자 호위 여러 명을 쓰러뜨리는 걸 옆에서 본 주육은 부러움에 눈을 빛냈다.
“이게 대단한 거냐? 넌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 한번 붙어 볼 테냐?”
영원은 사환이 건넨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대충 물었다.
“형님, 상의할 일이 좀 있다.”
주육은 알랑거리며 대영에게 차를 받아서 영원 앞에 내밀었다.
“상의할 일? 은자가 떨어졌냐?”
영원은 차를 받아서 단숨에 마셨다. 주육은 단번에 부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곧 그렇게 되겠지만 말이지.”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라.”
영원은 주육 곁에 앉아서 그다지 대수로워하지 않는 얼굴로 연무장을 바라봤다.
“아라 일인데…….”
주육은 아라가 자기를 찾아온 일부터 이야기했다.
“……사왕야는 아라를 꽤 마음에 들어 하시지만 저택에 들일 리는 없어. 그랬다가 어사대 그 입방아들이 미친 듯이 입을 나불댈걸. 사왕야는 분명 은자를 주려고 할 거야. 하지만 명령 한마디로 끝낼 성격이지. 내가 말씀드리러 갔으니 내 몫이 될 거고. 휴, 그 은자를 어디서 구하겠냐고.”
“너희 집안은 넉넉하잖냐.”
영원은 연무장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정말 그렇지도 않아. 요즘 내내 팍팍하고.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리 팍팍해도 이 정도 은자가 없을 리는 없지. 그런데 장부에서 이 돈이 나가게 되면 백부와 큰형님이 알게 된다. 두 사람이 알게 되면 대왕야가 알게 될 거고. 그럼 일이 커져.”
“그렇긴 하네. 그래서 어쩔 셈이냐?”
영원이 드디어 정신 차린 듯이 고개를 돌려 묻자, 주육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방법이 없어서 상의하러 온 거 아니오.”
“사왕야가 분명 은자를 주라고 할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영원이 별안간 묻는 말에 주육은 얼떨떨해졌다.
“은자를 주지 않으면 아라가 뭐 먹고 살아?”
“사왕야가 은자를 주면 연향루는 문을 닫는 셈이 되고, 그렇게 되면 아라는 사왕야의 외실이 되는 셈인데?”
“그러니까. 아니지, 그건 안 되겠네!”
영원이 턱을 문지르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주육은 금세 깨달았다.
사왕야가 밖에 여인을 둔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크나큰 죄악이지! 외실을 두느니 차라리 아라를 저택으로 들이는 게 낫지!
“그럼 어쩌지?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연향루에 가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야. 아라가 난리를 부리려고 가위를 들고 자진이라도 하면 일이 더 커져. 이 일은 정말…… 이 일을 어쩌지?”
영원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왜 네가 그 걱정을 하냐? 사왕야의 일이다. 당연히 사왕야가 알아서 해야지. 넌 그냥 가서 귀띔이나 하고 사왕야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사왕야가 첩으로 들인다면 들이는 거고, 외실로 둔다며 두는 거고, 버린다면 버리는 것이다. 우리 같은 신하들은……. 큼큼.”
영원은 아차 하다가 속내를 보인 것이 민망한 듯 힘껏 목을 가다듬었다.
“내 말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이 일을 이렇게 하면 어떤 장점이 있는지, 저렇게 하면 어떤 단점이 있는지 이런저런 내용을 사왕야에게 다 말씀드리고 사왕야의 분부를 듣는 것이다. 사왕야께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사왕야 대신 결정이라도 내릴 셈이냐?”
주육은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형님, 정말 옳은 말이오! 아버지도 말씀하셨었지. 이런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됐어, 알아들었어! 지금 가서 사왕야를 만나야겠어. 형님, 언제 개 산책하러 가지? 며칠 못 갔잖아. 내일 갈까?”
“내일?”
영원은 잠시 생각했다.
“내일 오전엔 시간이 없다. 오후에도 일이 있고. 음, 괜찮다. 내일 오후 조금 늦게 만나자.”
“그럼 그렇게 합시다.”
주육은 기분 좋게 대답하고 말에 올라 사라졌다. 등받이에 기대서 돌아가는 주육을 바라보는 영원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져서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었다. 대황자가 거리에서 진왕에게 채찍을 휘둘렀는데, 사왕야가 아라를 저택으로 들이거나 외실로 두면 얼마나 좋을까. 어사대가 다시 탄핵할 여지가 생기고 주 귀비가 분노할 텐데.
하지만 사왕야 곁엔 그나마 똑똑한 편인 주 추밀부사, 그리고 꽤 노련한 고서강, 고 사사가 있다. 게다가 아라에 대한 마음도 보통이라 그렇게 나올 가능성은 없다. 에휴!
주육이 사황자를 찾아갔을 때 주 추밀부사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주육이 아라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눈살을 단단히 찌푸리고 언짢은 얼굴로 주육을 노려봤다. 아라가 사왕야와 얽힌 것도 분명 아들이 일으킨 일이리라. 그런데 감히 사왕야 앞에서 또 이런 일을 꺼내다니.
그러나 아들이 하는 말도 맞았다. 자신이 소홀했다. 아라의 문제, 어찌 됐든 해결하긴 해야 했다.
“사왕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 추밀부사가 살짝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사황자의 의견부터 물었다. 주육이 사황자보다 먼저 대답했다.
“사왕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택에 들이는 건 안 될 일입니다. 일개 기녀이고 동기도 아닌데 어떻게 왕부에 들어오겠습니까. 은자를 주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달마다 은자를 보내면 외실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습니까. 그건 큰 불효입니다. 그렇다고 은자를 보내지 않기엔, 지금 연향루엔 아무도 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사람이 없으니 은자를 못 벌겠지요. 은자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다. 참으로 난처한 문제입니다.”
사황자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아들이 말을 가로채서 화가 치밀었던 주 추밀부사는 주육의 말에 화가 풀려서 놀라고 기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내 아들이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고려하는구나. 전엔 힘이나 쓰지, 마음을 쓰지 않고 사사건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이 매우 못마땅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아들이 이리 성장할 줄이야. 주 추밀부사는 감탄해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외숙 생각은요?”
사황자가 주 추밀부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육의 말이 맞습니다. 아라는 사왕야가 신경 쓸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사왕야의 생각대로 하십시오. 일개 기녀를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주 추밀부사가 어떻게 암시하면 좋을지 말을 빙빙 돌리는데 주육이 어리벙벙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사대 입방정들만 아니면 좋을 텐데. 전엔 얼마나 좋았습니까. 아라는 알아서 장사하고, 사왕야가 수시로 찾아가 즐기고요.”
“크흠!”
주 추밀부사가 굳은 얼굴로 주육의 말을 잘랐다.
“갈수록 분별없이 구는구나. 사왕야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냐.”
“소육의 말이 옳습니다.”
사황자가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아라의 보들보들한 몸이 꽤 좋긴 하지. 주육의 말이 맞지. 예전이 좋았어. 아라는 알아서 제 손님을 받고, 나는 때때로 불러서 하룻밤 보내고. 가끔 별식을 먹는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내 취향에 가장 맞는 것을.
“그렇게 될 수 있으면야 제일 좋겠지요.”
주 추밀부사가 얼른 대답했다. 소육이 한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데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다. 사왕야도 찬성한다니 너무 잘 되었고 어서 확정해야 했다.
“연향루가 예전처럼 돌아가면 어사대의 탄핵도 스스로 무너지게 됩니다. 사왕야, 영명하십니다!”
“하지만 지금 연향루에 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어쩌지요? 사왕야가 한마디 해야 할까요?”
주육이 똑똑한 척 묻는 말에 주 추밀부사가 그를 흘겨봤다.
“그게 사왕야와 무슨 상관이냐! 사왕야가 무슨 말씀을 해! 또 헛소리하는구나!”
“아버지가 상관없다고 해서 상관없는 게 됩니까? 연향루를 찾는 사람이 없는걸요!”
주육은 억울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황자는 주 추밀부사가 방법을 내길 기다리며 그를 바라봤다.
주 추밀부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제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왕야는 나서면 안 됩니다. 소육이 나서는 게 좋겠습니다. 이런 일은 한 번 시작되면 계속 이어집니다. 소육이 연향루에 몇 번 다녀오면 헛소문은 사라질 겁니다.”
주육은 두 눈썹을 치켜올리며 활짝 웃다가 아버지가 화난 눈빛으로 노려보자 얼른 눈썹을 내렸다.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 난처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소자, 항상 자중해 왔으나 아버지의 분부가 있는 이상,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주육이 손가락을 비비 꼬았다.
“사왕야도 아시겠지만, 아라의 몸값이…… 은자가…….”
주 추밀부사는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었고, 사왕자는 매우 대범하고 호탕하게 말했다.
“은자 면에서는 홀대하면 안 되지. 그건 너와 외숙이 상의해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