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23화 (223/463)

223화: 떼쓰는 아라

복안 장공주가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펴고는 이동을 향해 손짓했다. 백 노부인은 나이 든 어멈 하나만 데리고 들어와서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았다. 어멈이 밖으로 나간 뒤 이동이 일어서서 차를 올렸다.

“이 아이가 전보다 훨씬 밝아 보이는군요.”

백 노부인이 우선 이동에게 말을 걸었고 이동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법회도 없고 특별한 일이 없는 이때 백 노부인이 갑자기 찾아온 것은 분명 장공주에게 할 중요한 말이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진심으로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이동이 차를 올리고 물러가려는데 장공주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앉아. 백 노부인이 남도 아니고, 너도 할 일 없잖아.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들으렴.”

“장공주 말씀이 맞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무료해서 장공주와 이야기나 하며 시간 보내려고 온 것이다.”

백 노부인은 웃으며 이동에게 그렇게 말하고 복안 장공주를 돌아보며 정말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장공주, 들으셨습니까? 진왕의 외숙, 혼사가 정해졌답니다.”

“정해졌대? 어느 댁 낭자?”

복안 장공주는 매우 놀랐다.

“어느 댁 낭자는 아니고요. 양 구야 모친이 점 찍은 낭자랍니다. 양 구야가 예전에 살던 거리에 같이 살았답니다. 오씨인데 경성에 오래된 가문이긴 하네요. 고양이 사료를 파는 집안이고, 부모 형제 모두 있습니다. 낭자의 인품, 성격 모두 좋답니다. 생김새도 괜찮고요. 집안 분위기도 좋답니다.”

백 노부인은 복안 장공주의 표정을 살폈다. 복안 장공주는 조금 놀란 얼굴로 웃었다.

“걸맞은 집안이네. 왜 갑자기 생각이 트였대? 그 채찍질에? 효과가 있었네?”

이동은 오씨, 고양이 사료를 파는 집안이라는 백 노부인의 말에 가슴이 철렁해서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동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찻잔을 꼭 쥐고서 멍하니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강가에서 벗어난 이래, 한동안 예전의 모든 것을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 겪은 모든 것은 다 없던 일로 여겼다. 그녀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양자로 들였고, 그녀는 강가에서 벗어났다. 경성에 영원이라는 존재가 나타났고, 문 이야는 오라버니의 막료가 되었다. 강환장은 예전보다 일찍 진왕부 장사가 되고, 그녀와 장공주는 벗이 되었고, 강남 과거장 사건이 생겼다.

이 모든 일이 예전과 완전히 달랐고, 그녀는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 예전 같은 일은 어쩌면 다시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아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꼭 진왕이 즉위하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복안 장공주는 이번 생엔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양 구야의 혼사에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양빈이 세도가 가문의 올케를 바랐는데, 진왕이 세도가 가문을 맞이하겠다고 고르고 골랐는데, 왜 이번에도 오가 낭자로 정해졌을까. 왜 이번에도 결정을 양가 노태태가 했을까.

이동은 마음이 너무나 복잡해졌다. 놀라고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대체 어떤 부분이 달라지고 어떤 부분이 예전과 같을까. 진왕이 이번에도 즉위할까? 그럼 복안 장공주는? 이번에도 금을 삼키고 고통스럽게 죽을까?

“왜 그래?”

복안 장공주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눈빛이 멍해진 이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동은 듣지 못했고 복안 장공주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불렀다.

“동저아!”

“아, 네. 양 구야는 황친인데 어쩌다가 고양이 사료를 파는 집안으로 정했을까요?”

복안 장공주는 말없이 이동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 이런 말로 얼버무린 건지 이따 물어봐야겠다.

백 노부인은 이동과 복안 장공주를 번갈아 보다가 다시 이동을 바라봤다. 이가 낭자의 말이 조금 우스웠다. 장공주의 눈에 든 이상, 대충 얼버무리려고 한 말이겠지 싶었다.

“가문을 따진다는 것은 그냥 양빈의 생각이었지. 양빈은 일개 여인이고 깊은 궁궐에 오래 살았으니 양빈 탓이 아니야. 진왕도 효심을 다하려던 것이고. 다행히 양가 노태태가 생각 있는 사람이었단다.”

백 노부인은 아까 하던 한담을 이어서 했다. 이동은 정신을 집중해서 열심히 차를 내렸다.

백 노부인은 정말 수다나 떨면서 시간을 보내러 온 것처럼 양 구야의 혼사부터 동쪽 집안의 낭자, 서쪽 집안의 공자, 남쪽 가문의 노태태의 몸이 좋니, 좋지 않니, 이런 한담만 했다. 정오가 가까워질 때까지 수다를 떨다가 일어나서 물러가겠다고 인사하자, 이동도 백 노부인을 배웅한 다음 인사하고 물러났다.

마차에 오른 이동은 서서히 무너져 비단 등받이 속에 파묻혀 버렸다. 정리 안 될 만큼 혼란한 마음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릎으로 고개를 숙였다.

진왕이 즉위하게 되면 양빈은 예전처럼 장공주의 혼사를 강제로 정해주려고 하지 않을까? 장공주는 예전처럼 금을 삼킬까?

예전에도 대황자가 거리에서 채찍을 휘둘렀었나? 대황자가 이런 일을 해서 그 의자와 인연이 없어졌다고 장공주가 그러는데, 그럼 그 의자는 이제 사황자의 것이 되는 걸까? 진왕은 즉위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전생 때도 지금처럼 대황자가 그 자리는 자기와 인연이 없는 걸 깨닫고 이판사판으로 사황자를 죽여서 양쪽 다 파멸하게 된 걸까.

이동은 이마를 내리쳤다. 예전에 어쩌다가 두 사람 다 파멸한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엔 이런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예전의 이맘때, 그녀는 온 마음이 다 강환장에게 쏠려 있었다. 떠오르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모른다.

그리고 영원도 그렇다. 예전엔 영원 혹은 영가가 지금처럼 움직였던가? 마음을 품고 대가를 치를 각오하고 행동에 옮겼었나? 그녀는 모른다. 조금도 모른다. 영 황후를 만난 적도 없고 영원이라는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진왕이 되면, 영원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할까? 그리고 오가아도. 진왕이 즉위하게 되면 영원과 오가아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가가 어떻게 될지도.

마음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위봉낭의 대답을 들은 아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주 육소야를 만나러 관아에 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생명의 위험이 있지 않은 한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관아에 찾으러 갈 수 없고, 수국공부 앞에서 기다릴 수가 없어서 주 육소야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공들이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 법, 아라는 천경루에서 주 육소야를 찾아냈다.

천경루에서 나오던 주 육소야는 치맛자락을 들고 달려오는 아라를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봤다.

“응?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어요. 그런데 곧 생길 거예요.”

아라가 달려오느라 조금 헐떡거리며 하는 말에 주 육소야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또 무슨 일이? 또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이냐?”

이 아라, 왜 이리 일이 끊기지 않는 것이야.

“아니에요. 아무 일 없어요. 제 말은, 나리를 만나지 못했으면 문제가 생겼을 거라는 거예요.”

아라는 헐떡거리며 숨을 고른 다음엔 순조롭게 잘 이야기했다.

“육소야, 며칠이나 찾아다녔어요. 어째서 연향루에 오지 않으세요?”

“그걸 물으려고 찾아왔느냐? 내가 왜 연향루에 가지 않느냐면…….”

주 육소야는 허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사왕야가 아라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데 어떻게 계속 연향루에 가겠나.

아라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물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그런 걸 물을 거였으면 다다를 보내겠죠.”

“그럼 무슨 일이냐?”

주 육소야가 안도하며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며칠 못 봤더니, 전보다 더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아라야.”

“육소야, 진지한 이야기하러 온 거예요.”

아라는 진지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요염하게 추파를 던졌다. 자기 미래가 주 육소야를 설득하느냐 마느냐에 달렸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니 공들일 수밖에.

“이 몸이 하는 말도 진지한 이야기다. 이야기해라, 듣고 있다.”

주육은 또 슬쩍슬쩍 다가가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아라의 얼굴을 핥듯이 바라봤다. 아라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살짝 나무랐다.

“육소야, 이러지 마세요. 진지한 이야기라니까요.”

“이야기해 보아라! 듣고 있다니까.”

“육소야. 저 앞으로 어떻게 해요?”

아라는 주 육소야의 팔을 슬쩍 건드리고 또 건드리며 나긋나긋, 다정하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 어떻게 하다니, 무엇을?”

주 육소야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자, 아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리광부리듯 말했다.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에요! 빤히 알면서 묻기는. 소야도 저를 만나러 연향루에 오시지 않으면서 묻긴 뭘 물으세요. 연향루를 찾는 사람이 없으면 저는 어떡해요. 그리고 다다, 행수 어른은요. 어떡해요. 육소야, 우리가 굶어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건 아니죠?”

“어?”

주육은 얼떨떨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사람이 없어? 왜 그런 일이…….”

주육은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기도 못 가는데, 다른 사람은 더 못 가지.

“그건…….”

주육은 우물거렸다. 이건, 내 알 바 아니지 않으냐?

아라는 주육의 소매를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절 도와주셔야 해요, 육소야! 소야가 아니면 아무도 못 도와요.”

“알았다, 알았어. 하지만 이 일이…….”

주 육소야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일을 어떻게 돕는담.

“소야, 안 되면 절 들여달라고 사왕야에게 말씀드려줘요.”

아라는 주 육소야 곁으로 다가가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서 나긋나긋 말했다.

“응응, 그것도 좋은 방…… 뭐? 들여? 어디로?”

아라의 보드랍고 여린 몸이 다가오자 주육은 온몸이 풀어져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들여? 어디로? 왕부로?

“어디긴요. 육소야가 저를 저택으로 들여준다면야 아무 데도 가지 않아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왕부로 들어가야지요. 육소야, 저를 집으로 들이라고 사왕야께 말씀드려 주세요.”

아라는 주육의 팔을 흔들면서 가냘프게 말을 이었다.

주육은 목을 몇 번이나 길게 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왕야 집에 들어가겠다고? 거긴 왕부다. 그 저택은…….”

“왕부면 어때서요?”

아라가 진지하게 묻자 주 육소야가 콕콕 손가락질해댔다.

“왕부는…… 왕부가 어떤 게 아니라, 네가 문제지. 넌 기녀라서…….”

그 말에 아라가 언짢은 듯 입을 내밀었다.

“기녀는 왕부에 들어가면 안 돼요? 그런 말은 처음 듣네요. 사왕야가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분명 기꺼이 절 집으로 들이실 거예요. 사왕야가 소야처럼 웃어른이 댁에 계시고 부모님이 계신 것도 아니잖아요. 왕부는 사왕야의 말씀 하나면 다 돼요.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분명 제가 들어가는 걸 반기실 거예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으셔. 그런 생각은 접어라. 너 말이다…….”

“접으라니 접을게요. 그럼 전 앞으로 어쩌면 좋은지 말해 보세요. 그런 생각은 접으라고 하시는데, 그럼 전 뭘 먹고 살아요? 다다는요? 연향루 사람들은요? 행수 어른도 있어요. 행수 어른에게 드려야 하는 은자도요. 매달 행수 어른에게 은자를 내야 하는 걸 아시잖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보세요. 그럼 은자를 주세요!”

“내가 그럴…….”

주 육소야는 은자가 없다고 말을 하다가 말고 얼른 삼켰다. 평소에 돈을 물처럼 쓴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 은자가 없다고 말을 하기엔 너무 창피했다.

“이건 은자 문제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은자를 주게 되면……. 아라, 이건 사왕야를 만나야 할 문제다.”

“소야가 말씀하신 거예요. 그럼 저 사왕야 만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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