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용감하게 직진하다
계 천관의 말의 어느 부분이 진왕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진왕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흘렸다.
“천관, 날 위해서 하는 말이란 걸 압니다. 나는…….”
“알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왕야,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양 구야의 혼사, 양가 노태태에게 여쭤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찌 됐든 양가 며느리입니다. 노태태가 만족하셔야 할 일 아닙니까.”
계 천관의 귀띔에 진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계 천관은 살며시 안도하며 공수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진왕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계 상서, 한 가지, 도움 청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계 상서, 괜찮은 장사 하나 골라줄 수 있습니까? 나는…….”
진왕이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강 장사는 큰일 할 사람입니다. 내 저택에 두는 게 몹쓸 짓 같아서 내 생각엔…….”
계 천관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왕야, 지금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강환장은 재능도 있고 왕야께 마음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굳건하게 공과 사를 지키며 강남 과거장 사안을 처리했고요. 왕야, 강환장은 왕야를 위해 명성을 쌓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뒤에 서서 그를 지지하셔야 합니다.”
진왕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계 상서, 그게 무슨 농담입니다. 나는 그저 무탈하게…….”
“왕야, 왕야는 황상의 혈맥입니다. 무탈할 수 있겠습니까?”
계 천관의 말투에서 은근히 나무람이 느껴졌다. 정말로 화가 나긴 했다.
“설사 오로지 무탈하기만 바란다고 하더라도 이럴 때 강환장의 발목을 잡으시면 안 됩니다. 군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왕야 같은 황손이 할 일은 더더욱 아니고요. 왕야께서 오늘 강환장의 발목을 잡으시면, 이런 때에 사람을 버리시면 천하의 지사(志士)들의 마음이 식을 겁니다. 오늘 강환장을 이렇게 대하신다는 건 내일 다른 사람도 똑같이 대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왕야, 인심을 잃으면 안 됩니다.”
“내가 언제……, 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진왕은 계 천관의 평가에 부끄럽고 난감해서 다급하게 변명하고 싶은 마음에 뒷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그런 뜻이 아니면 되었습니다. 왕야,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왕야의 상황으로서는 민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왕야는 반드시 인자하고, 공정하고, 신하를 끝까지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계 천관은 아직도 무슨 뜻인지 파악하느라 멍한 눈빛을 짓는 진왕을 보고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멀리 이야기할 것 없습니다. 강환장 문제는, 꼭 신중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강환장의 진심을 외면하시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계 천관의 결론에 진왕은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계 천관은 진왕과 헤어진 뒤 저택으로 돌아와 고개를 숙인 채 걷다가 돌아서서 백 노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백 노부인은 딱 봐도 기분이 저조해 보이는 아들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계 천관은 진왕이 장사를 바꾸려고 하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님, 진왕은 박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백 노부인은 전혀 의외로 생각하지 않고 담담해 보였다.
“네 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박정하고 의리 없는 황제도 많고.”
계 천관은 한참 침묵했다.
“진왕은 사람을 보살필 아량이 없습니다. 앞으로 황제로 등극하더라도 신하로서 쉽지 않을 겁니다.”
“황상에게 다른 아들이 있더냐?”
백 노부인의 물음에 계 천관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님, 제 말씀은…….”
“내가 묻지 않느냐. 황상에게 다른 아들이 있느냐?”
백 노부인이 다시 물었다.
“있기야 있지요. 하지만 오황자는…….”
“그럼 너는 진왕을 버리고 오황자를 고를 셈이냐?”
“어머님, 제 말씀은…….”
계 천관이 해명하려 하자 백 노부인이 손을 저었다.
“네 생각은 나도 안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진왕이 올해 몇 살이냐? 세 황자가 어떤 성품, 성격인지 오늘 알았느냐?”
“어머님, 저는…….”
“네가 고를 수 있는 건, 할 것이냐 말 것이냐다. 다른 건 깊이 생각할 것 없다.”
백 노부인은 다시 한번 계 천관의 말을 자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좋은 주군 감이 아니다. 그건 바꿀 수 없다. 필요 없는 건 깊이 생각할 것 없어. 돌아가서, 나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 잘 생각해 보아라.”
“그냥 어머님께 말씀 좀 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계 천관이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말했다.
“휴, 나도 안다.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이니 너도 낙담해서 하소연하는 것이겠지. 하소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직진해야 할 땐 깊이 생각하지 말고 용감하게 나가라고 네 아버지가 말씀하셨었다. 지금 널 좀 봐라. 이제 막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느냐. 잡념이 가득해. 이러고도 집중해서 용감하게 직진할 수 있겠느냐?”
“어머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계 천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 숙이고 잘못을 인정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고, 해선 안 될 일은 그만두거나 보고도 못 본 척하면 된다. 예전에 네 아버지께 배운 것이다. 나도 이해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해내진 못한다. 그리고 너는 더 어렵겠지. 나만큼도 못할 것이야. 휴.”
백 노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계 천관은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네 탓이 아니다. 널 탓하는 것도 아니고. 넌 최선을 다하고, 영가아는 영가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지. 그러면 된다.”
백 노부인의 목소리가 온화했다.
백 노부인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레가 보름이니 보림암에 다녀오련다. 장공주에게 제대로 해두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건 네가 상관할 것 없고, 네가 해야 할 일이나 해라.”
“예.”
계 천관은 공손히 대답하고 화제를 돌려서 백 노부인과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에 물러갔다.
이동은 대황자가 거리에서 진왕을 때린 일을 복안 장공주에게 듣기 전까진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예전부터 이런 일에 마음 쓴 적이 없고 지금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복안 장공주는 타박하듯 이동을 흘겨봤다.
“얘 좀 봐. 내 말 잘 들어. 설령 지아비를 내조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내택 여인이라고 해도……. 아니, 넌 지아비를 내조하고 아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으니까, 아, 그래, 너는 장사를 맡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일에 눈 감고 귀 닫으면 안 되지!”
이동은 힐끔 그녀를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며칠이나 된 지난 일이란 말이야! 잘 들어. 여인이라고 집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어두우면 안 돼. 조정이 흔들리고 병란이 일어나고 가문이 소탕당하면, 가장 먼저 여인과 어린아이가 죽어. 특히 집 밖 사정에 어두운 여인이!”
“알겠어요. 성안의 관사들도 보고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큰일이 아니라고 여겼겠죠.”
이동이 어쩔 수 없는 듯 대답했다.
“그럼 더 잘못됐지!”
복안 장공주는 오늘 이동을 훈계하려는 의지가 매우 높았다.
“이게 어떻게 큰일이 아니야?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내 밑에서 몇 달 배웠는데, 어떻게 이 정도 안목도 없을 수 있지?”
“제가 장공주께 몇 달을 배웠다고요?”
이동은 차를 내리다 말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장공주를 바라봤다. 내가 뭘 배웠기에?
“내가 널 곁에 두고 하나하나 다 가르쳤는데?”
복안 장공주의 당당한 모습에 이동은 이마에 주름이 생길 정도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래, 하나하나 짚어주며 알려주시긴 했지.
이동은 이내 눈썹에 힘을 풀고 고개를 숙이고 다시 차를 내렸다.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해 봐.”
“무슨 이야기요?”
이동은 다소 못 말린다는 듯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어쩐지 오늘 장공주가 지나치게 들뜬 듯했다.
“무슨 이야기긴 무슨 이야기겠어. 당연히 이 일이지.”
복안 장공주가 손가락을 구부려 소리 나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대왕야가 진왕야를 때렸어요. 그것도 마행가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성질을 너무 심하게 부리셨어요.”
이동이 조금 어물쩍 넘기려는 듯 건성건성 대답했다.
“제대로 좀 해!”
복안 장공주가 허리를 숙여 이동에게 은주전자를 뺏어 온 김에 찻잔도 앞으로 당겨왔다.
“잘 들어. 이 일이야말로 큰일이야. 네가 올해 겨우 몇 살이야? 인생은 길어. 혼인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평생 모든 일에서 스스로 조심해야 하고, 혼인할 생각이면…….”
복안 장공주는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혼인할 생각이면 제대로 된 사람과 혼인해야겠지. 적어도 내가 허락할 만한 사람, 적어도 말이 통하는 사람. 부부가 화목하게 살 수 있는 식견 있는 사내. 그러려면 집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어두우면 안 돼. 네가 그러면 상대가 널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을 거고. 어찌 됐든, 넌 이런 일에 신경 써야만 해. 제대로 이야기해 봐.”
이동은 마음이 시리기도 하고 따스해지기도 했다. 그녀는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는 사서를 읽은 적 없어요. 하지만 장공주께서 평소에 하시는 말씀대로라면, 신하는 포악한 주군을 제일 두려워하죠. 하 걸왕, 상 탕왕 같은 폭군은 신하들의 악몽이에요. 그 걸왕, 탕왕도 즉위하기 전엔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대황자가 이렇게 성질을 부렸으니, 그 의자와 훌쩍 멀어졌겠죠.”
복안 장공주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렇게 나와야지. 내가 그랬잖아. 넌 가르쳐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렇지, 재능이 있어. 첫째는 그 채찍질에 의자가 멀어진 게 아니라, 그건…….”
복안 장공주가 고소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늘였다.
“조금이라도 주제를 안다면 그 의자에 앉을 생각부터 할 필요가 없는 걸 깨닫겠지. 하지만 그런 주제 파악은 절대로 못 하겠지. 그럴 주변머리가 있었으면 이렇게 성깔을 부리지도 않았을 테고.”
이동은 눈살을 찌푸리고 장공주를 바라봤고, 복안 장공주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눈을 깜빡였다.
“명심해. 주군과 신하는 널뛰기 같은 거야. 주군이 약하면 신하가 세고, 주군이 강하면 신하가 약해지지. 신하는 노비가 아니야.”
복안 장공주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안살림을 맡은 적 있으니 알겠지. 설사 노비라고 해도 충복이 있고 나쁜 종복이 있지. 집안을 잘 다스리면 종복을 내 팔처럼 부릴 수 있고, 잘못 다스리면 종복이 일으키는 문제만으로 집안을 말아먹을 수 있어.”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너무 잘 안다.
“지금 황상은 강한 주군이 아닌데 다행히 묵 승상, 여 승상 모두 성격이 온화해. 하지만 그게 다야. 그 두 사람이라고 그 의자에 걸왕, 탕왕이 앉아서 자기 가문에 화를 초래하는 걸 보고 있진 않아. 주군과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 자기 일족을 위해서야. 채찍 한 번 휘두른 탓에, 첫째는 그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됐어.”
복안 장공주가 싸늘하게 웃었다.
“정말 미친 짓이지. 설사 태자, 황상이라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는 성질을 눌러야 해. 궁에서, 조정에서 채찍질했다는 것도 놀라서 기절할 일인데, 감히 경성 대로에서! 이건 미친 짓도 아니야. 머저리야.”
“음, 주 귀비에게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 사왕야도 있으니까요.”
복안 장공주는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네 말이 맞아. 이 백치 미치광이 말고, 백치까지는 아니고 아직 미치지도 않은 황자가 하나 더 있는걸.”
“혹시…….”
이동의 말이 끝나기 전에 마당 앞에서 기별이 들렸다.
“장공주, 백 노부인이 뵙길 청합니다.”
“모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