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움직이다
“음, 할아버님, 그럼 계가는…….”
“그걸 말해야만 아느냐. 너는 모르겠느냐? 계가 녀석이 갑자기 사람이 변했는데, 그걸 내게 묻느냐?”
여 승상이 여염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저도 알아보기야 했지요. 그냥 할아버님께 확인하는 것입니다. 소계는 소계, 계가는 계가라고 할아버님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계 천관이 이미 움직였다. 강환장을 강남 흠차로 보낸 것, 그게 움직였다는 증거다. 계 천관은 장원 출신이지만 계 노승상과 비교하면……. 후. 비교할 수가 없다.”
여 승상은 근심되는 얼굴이었다.
“할아버님도 계 노승상처럼 출중한 천재는 하늘의 운이 따라야 나는 법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대대로 내려올수록 못할 수밖에요.”
그 말에 여 승상이 희미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대대로 갈수록 뛰어나면 후손은 얼마나 대단해지겠느냐. 계가는, 일단 응어리가 있다. 계 노승상과 백 노부인은 다 좋은데 단 하나, 아이를 너무 아낀다. 지나치게 아껴. 계 황후 일은 계 노승상과 백 노부인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만은 없다. 황상과 주 귀비는 청매죽마였고 선황께서도 여러 번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다. 계 노승상과 백 노부인도 아는 일이었어. 황후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다면……. 후. 하필 계 황후의 성격이 계 노승상과 지극히 닮은 바람에…….”
“황가 문제에서 이치를 논하는 게 가장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여염이 나지막이 꿍얼거렸다.
“그게 두 번째다. 주군과 무슨 이치를 논하겠느냐. 하물며 이건 부부의 도리다. 또 멀리 갔구나.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백 노부인이 성격이 강하긴 해도 그 이치를 모르지 않는다. 다만 그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 화가 있으니, 계가는 그 울분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여 승상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계가 같은 큰 가문이 하는 일은, 천하를 다스리는 주군 문제가 아니고서야 온 일가가 뜻을 모으기가 어렵다고 종종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럼 이 일에서는요? 삼왕야일까요, 오황자일까요?”
“음, 계 노승상이 돌아가신 후, 계가는 노승상의 유언을 따라 관리는 지방으로, 서생은 멀리 강남으로 피했다. 경성에도 계 천관, 계소영 일파만 남았지. 거기서 또 뜻이 나뉜다면…….”
여 승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계소영을 잘 주시해라. 영원의 태도를 보면 계소영이 영원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 승상은 돌연 말을 멈추더니 한참만에 다시 이었다.
“이신도 주시하고. 문도…… 그땐 내가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문도가…….”
“문도요? 이 대랑의 막료 문 이야말입니까?”
여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깊이 물을 일이 아니다.”
여 승상은 여염에게 감출 것도 없지만,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뜻이 나뉜다면 많이 나뉠수록 좋겠지. 백 노부인은…….”
여 승상은 배 위에 양손을 올려놓고 한참 생각에 잠겼다.
“조정의 국면이 혼란해지겠구나. 휴, 계 노승상이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 노승상이 계시면, 누구를 지지할까요?”
“오황자다.”
여염이 지극히 작은 목소리로 묻는 말에 여 승상은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계 노승상은 광명정대한 분이다. 오황자는 적자고, 적어도 지금까지 본 점으로는 오황자는 다른 왕야보다 어질다. 당연히 오황자지. 휴. 하지만 오황자는……. 계 노승상 같은 분이나 손을 내밀 엄두를 내겠지. 영 황후가 오황자를 가졌을 때처럼 말이다. 휴, 계 노승상이 아직 계시면 좋을 것을.”
위봉낭은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한 후 문 앞에서 보고하다가 영원의 분부를 듣고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원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위봉낭은 힐끔 보고는 조금 조마조마해져서 아예 고개를 끄덕이고 정리해 둔 대로 보고했다.
“칠야, 아라가 찾아왔습니다. 칠야의 가르침이 필요하답니다.”
“응?”
사실 영원은 안색만 그렇지, 기분이 안 좋진 않았다.
“사황자 때문에 연향루에 왕림하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이제 어쩌면 좋으냡니다.”
영원은 아연해졌다.
“그걸 이제야 묻다니…….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더냐?”
“그런 것 같습니다.”
위봉낭은 제가 다 부끄러워졌다. 영원은 대들보를 올려다보다가 한참만에 분부했다.
“주 육소야를 찾아가서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하라고 해라.”
“예.”
위봉낭은 대답부터 하고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물었다.
“은자 문제도 물었습니다. 연향루에 손님이 오지 않으면 평소 쓰는 돈은 어떻게 하냐고요. 그리고 행수기녀에게 줄 돈도요.”
“주 육소야를 찾아가서 달라고 해라.”
영원은 화를 낼 수도 없고, 웃을 수도 없어서 손을 휘저으며 분부했다.
이가의 경성 총괄 심 대장궤가 자등 산장 앞에서 말에서 내린 다음 예를 갖춰 문지기를 향해 공수하고 들어가서 영벽 앞에서 주저하다가 어멈 하나를 불렀다.
“자네, 수고스럽지만 대낭자 계신지, 가 보고 와주겠나. 대낭자에게 보고할 일이 하나 있네.”
어멈은 들어갔다가 금세 돌아와서 심 대장궤를 데리고 전원 난각으로 향했다. 이동은 이미 난각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심 대장궤가 장읍하며 예를 갖추자 이동은 살짝 비켜서서 무릎을 구부리며 반례를 갖췄다.
“대낭자, 전에 전 장궤를 통해서 물건을 한 번 내보내지 않았습니까.”
심 대장궤는 이동과 자신, 그리고 영 대장궤가 하종수를 함정에 빠뜨린 일을 완곡하게 언급했다.
“무슨 일이 났나?”
이동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심 대장궤도 확신은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지난번에 전 장궤에게 물건을 주었던 난(欒) 장궤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전 장궤가 그를 찾아와서 지난번과 비슷한 진주 주렴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누가 전 장궤를 찾아가서 지난번과 비슷한 진주 주렴을 급하게 찾는다고 했답니다.”
“지난번과 비슷한 것? 전 장궤가 한 말인가, 아니면 진주 주렴을 사려는 사람이 한 말인가?”
“제가 난 장궤에게 물었는데, 전 장궤가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진주 주렴을 사려는 사람이 한 말 같답니다. 지난번에 전 장궤가 내놓았던 진주 주렴과 비슷한 주렴을 구한다고요.”
이동의 물음에 심 대장궤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이동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시간을 좀 끌어 보게. 주렴을 내놓은 사람이 이미 남으로 돌아가서 찾아보겠다고 해. 먼저 잘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예.”
공손하게 대답하고 물러 나온 심 장궤는 안도하는 동시에 탄식했다. 예전의 노태태부터 태태, 지금의 대낭자까지 대대로 영리하고 유능한데 박복한 것마저 대를 이었다. 휴!
난각에서 나온 이동은 곧바로 문 이야를 찾아갔다.
이동의 이야기를 들은 문 이야는 눈살을 찌푸렸다. 낯빛도 심각해졌다.
“지난번엔 영 칠야의 손을 거쳐서 주 육소야에게 넘긴 다음 사왕야에게 팔았습니다. 마지막엔 주 귀비 궁에 갔고요. 사왕야의 성격으로는 사려면 바로 사지, 내력을 조사하지 않을 겁니다. 조사하더라도 영 칠야를 조사할 것이고요
영 칠야는 낭자가 이 일에 연관된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영 칠야를 조사하다가 단서가 끊어진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왕야와 주 육소야 쪽은 그 주렴이 전 장궤 손에서 나온 것을 잘 모를 겁니다. 제 생각엔 대왕야 쪽입니다. 아니면…….”
문 이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낭자, 전에 제가 영 칠야를 만났을 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계가에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이동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계가는 줄곧 그럴 마음이 있었고 기회를 찾고 있었으니 움직일 때도 되었다.
“잠시 시간 끌라고 심 대장궤에게 이미 지시했으니, 내가 성에 다녀오겠습니다. 영 칠야와 상의해야겠습니다.”
문 이야는 담담한 이동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렇게 태연하고 담담한 그녀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조회가 끝난 후, 계 천관은 조금 위축된 모습으로 대황자를 피해 밖으로 달아나는 진왕을 바라보며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펴고서 적당한 거리에서 그를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덕문을 나섰다.
선덕문을 나선 계 천관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걸음을 서둘러 진왕을 따라잡았다.
“왕야.”
“어? 계 상서였군요.”
계 천관을 본 진왕은 곧바로 아직 강남에 있는 강환장을 떠올리고는 안색이 바로 난감해졌다. 강환장이 강남에 흠차로 가게 된 건 계 천관이 추천해서였다. 계 천관이 추천하지 않았다면 강환장은 그 임무를 맡지 않았을 테고, 이 임무를 맡지 않았다면 큰형님이 화풀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채찍을 맞을 일도 없었고…….
“양 구야의 혼사 말입니다. 거의 결정지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진왕의 난감함을 알아본 계 천관은 그저 모르는 척했다.
“아직 아닙니다.”
양 구야의 혼사를 묻는 계 천관의 말에 진왕은 순간 걱정이 가득해졌다. 걱정이 가득해져서 계 천관이 강환장을 추천한 걸 원망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계 천관은 과장해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직입니까?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양 구야의 나이도 적지 않은데 얼른 정하셔야 해가 가기 전에 혼례를 올리지요. 더 늦으면 섣달이 되어 새해 준비하느라 혼례를 올리기 힘들어집니다. 그런 법은 없으니까요. 못해도 정월은 지나야 할 테고, 정월이 지나게 되면 황상께서 왕야께 분부하신 일이 해가 바뀌는 셈입니다.”
“나도 그 점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아요.”
진왕은 계 천관의 말에 근심이 더 깊어졌다.
“가문도 좋고, 성격, 인품 다 좋아야 하고 집안도 보살펴야 하고. 가문이…….”
양 구야의 혼사는 다름 아닌 가문에서 걸렸다. 가문이 괜찮은 집안에선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솔직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왕야, 용서해 주십시오.”
계 천관이 공수하자 진왕은 쓴웃음 지었다.
“천관,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 용서라니, 무슨 그런 말을.”
“가문도 좋고, 성격, 인품 다 좋아야 하고 집안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조건, 양 마마의 분부입니까? 아니면 왕야의 생각이십니까?”
“그건…… 마마의 생각입니다. 마마께 아우가 하나뿐이라. 게다가…….”
진왕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양 구야도 황친이라는 말이 아무래도 잘 나오지 않았다.
계 천관이 진왕 대신 그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양 구야는 왕야의 친외숙이시지요. 마마와 왕야가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진왕은 계 천관의 말에 묘하게 안도했다.
“하지만 왕야는 뒷일을 조금 더 생각하셔야 합니다.”
계 천관의 말머리가 확 달라졌다.
“양 구야는 황친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단 양 구야가 나이가 다소 많고, 둘째, 양 구야는 궁핍하게 지내느라 글공부도 그다지 하지 못했습니다.”
계 천관이 완곡하게 말한 것이었다. 양 구야는 글공부를 그다지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자무식이었다.
“게다가 아내를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인품과 성격입니다. 좋은 아내를 맞으면 삼대가 편안하다고 하니까요. 가문 문제는, 왕야, 그냥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문을 따지는 건 결국 조력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걸맞은 집안끼리라야 상부상조하기 좋으니까요. 들으면 언짢으실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양 구야는 벼슬길에 나설 것도 아닌지라 조력자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걸맞은 집안이란…….”
계 천관이 허허 웃었다.
“황가와 걸맞은 집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양가가 상부상조한다니, 황가와 상부상조할 가문이 세상천지에 있습니까? 그러니 제 생각엔 가문은 따지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진왕은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고, 계 천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진왕 곁으로 살짝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췄다.
“왕야, 양 구야의 혼사를 대왕야가 위에서 감독하지 않으면 두어 해 더 천천히 골라도 됩니다. 2, 3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계 천관은 진왕 얼굴에 처참한 상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대왕야가 어떤 성정인지, 왕야께서 제일 잘 아십니다. 어차피 어느 쪽을 골라도 해롭다면 경중을 골라야 합니다. 양 구야의 혼사를 어서 정하고 왕야를 짓누르는 부담부터 치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