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뒤흔들다
역시나 조금 일찍 귀가한 묵 승상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묵 이야를 서재로 불렀다. 다급히 서재로 달려간 묵 이야는 피로한 듯 눈을 감고 있는 부친을 잠시 바라보다가 의자를 옮겨서 맞은편에 앉았다.
묵 승상은 눈도 뜨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이야기해 보아라.”
“대왕야가 정신 나간 짓을 했습니다.”
“그래.”
묵 이야가 대놓고 하는 말에 묵 승상은 눈 뜨지 않고 나직이 대답했다.
“대왕야가 제위에 오르면 상나라 탕왕, 하나라 걸왕이 될 겁니다. 세상에 큰 난리가 일어나고 임가 황조는 거기서 대가 끊길 겁니다.”
묵 이야의 더 가차 없는 말에 묵 승상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조정, 그리고 이 경성에서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
“자명한 일입니다.”
묵 이야는 꾹 참고 있었다. 대왕야가 거리에서 진왕에게 채찍을 휘두른 일에 제 귀한 아들까지 불똥이 튀어서 대황자에게 맞기까지 했다. 얼굴이 아니라 몸이라서 두꺼운 두봉이 막아주긴 했어도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른 것까진 아니라지만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해졌다.
“예전엔 성격이 안 좋아도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는데. 근래 갈수록 거칠어지는군.”
“거친 게 아니라 포악한 것입니다. 진왕은 친아우인데 전혀 봐주지 않고 모질게 채찍을 휘둘렀어요. 채찍이라서 다행이지, 칼을 들었대도 아무 거리낌 없이 찔렀을 겁니다. 아버님, 대왕야가 정말로 태자로 봉해지면 저는 바로 소칠을 데리고 남양으로 달아나렵니다. 묵가의 대는 이어야지요.”
“그 채찍질 한 번에 대왕야의 제위가 멀어졌다.”
묵 승상은 일어나 앉으며 아들을 두드렸다.
“너는 다 좋은데 소칠과 관련된 일엔…….”
묵 승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묵 이야는 목에 힘을 줬다.
“소칠이 맞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건 자체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버님은 모르시겠습니까? 상 탕왕, 하 걸왕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넷째라고 더 나을 것도 없다.”
묵 승상은 매우 심란한 듯했다.
“대왕야 아니면 사왕야, 아버님은 다른 분은 생각한 적 없습니까? 황상에겐 아들이 넷입니다.”
묵 이야는 화가 좀 풀렸는지 말이 그렇게 거칠지는 않았다.
“황상 눈에 아들은 둘뿐이다.”
묵 승상이 바라보며 하는 말에, 묵 이야는 입꼬리를 내리며 경멸하듯 코웃음 쳤다.
“아버님, 신하 된 자는 주군을 오로지 떠받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황상 눈에 둘밖에 없으면 다른 둘을 보시게 해야지요!”
묵 승상의 눈빛, 목소리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살고 싶으면 황가 집안일에 끼어들지 말아라! 이건 조정일이 아니라 가족 일이다! 황상께서 가족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가족 일이야!”
묵 이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묵 승상은 그를 삐딱하게 바라봤고, 부자 사이에 껄끄러운 분위기만 감돌았다. 한참만에 묵 승상이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칠은 어떠하냐? 심하게 다쳤느냐?”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그렇다고 가벼운 것도 아닙니다. 혈흔이 등에서 가슴까지 두 줄로 났습니다. 모질게도 때렸습니다.”
묵 이야는 아들 몸에 생긴 채찍 자국을 떠올리고는 제가 다 아파서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지난번에 정북후부에서 보낸 약을 발랐습니다.”
“영원은 오지 않았고?”
“예. 사환을 보냈을 뿐입니다. 사환이 상처를 보더니, 지난번에 준 약을 몇 번 바르면 금세 낫는답니다.”
묵 이야는 대답하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
“아버님, 영원이 경성에 온 이래 경성에 자주 사건이 일어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에도 일은 많았다.”
묵 승상은 아닌 듯 그런 듯 대답했다.
“하가 점포에 난 불, 주육은 사왕야가 그랬다고 하고 사왕야도 부인하지 않았지만, 전 아무래도 사왕야가 아닌 것 같습니다. 덮어쓴 냄새가 강하게 납니다.”
묵 승상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말해 보라고 눈짓했다.
“강남에서 일어난 일, 탕가도 연루됐습니다. 그것도 매우 이상하고요. 사람을 보내 알아봤는데, 탕가의 윗대 계파는 강남 본가와 물과 기름 같았답니다. 그래서 탕가에 의탁해서 산서에서 떠난 거고요. 몇십 년 동안 왕래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런 사달을 일으킬 리가 있겠습니까. 탕가 윗대에 그런 배포와 너그러움이 있었다면 축가 세 방계와 진작 왕래했겠지요.”
“음, 이 일은 누군가 탕가 윗대를 사칭해서 탕가에 뒤집어씌우고 고서강을 연루한 것이다.”
묵 승상이 묵 이야의 말을 긍정했다.
“강남 과거 사건이 바로 축가 자제들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계가가 중간에서 부추겼고요. 하지만 제 생각엔 계가는 부채질한 사람이지 주사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사자는 누구일까요?”
“영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영원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강남 과거 사안으로 동민이 하옥되어 대왕야가 길길이 날뛰고 있을 겁니다. 동민을 잡은 것이 진왕부 장사 강환장입니다. 대왕야가 길에서 진왕을 잡은 것도 분명 그 일 때문일 거고요. 진왕이 양 구야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서? 그야말로 웃기는 이야기지요.”
“영원에게 좋을 게 뭐가 있어서? 대왕야가 무너지면 이득 보는 건 사왕야다. 대왕야와 사왕야의 세력이 균등해야 영원은 좋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은 곧바로 태자가 된다. 태자가 세워지면, 영원에게 기회가 있을 것 같으냐?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첫 발자국일지도 모르지요. 대왕야가 거리에서 친아우를 때린 일로 민심을 잃었습니다. 강남 사건 같은 걸 한 번 더 일으켜서 사왕야의 본성도 드러낼지 누가 압니까.”
한참만에 묵 승상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전 아무래도 이 영원이…… 어쩌면 정말로…….”
묵 이야가 뒷말을 잇지 않자, 묵 승상은 엄지를 툭툭 두드리다가 한참만에 나직이 말했다.
“소칠과 영원이 자주 만나 몰려다니는 것,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다른 건 일단 차차 보고 이야기하자.”
“예.”
묵 이야가 나직이 대답했다.
묵 승상뿐만 아니라 여 승상도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대황자의 일이 터지자, 진작 집으로 돌아가 있던 여염은 조부가 돌아왔다는 말에 서둘러 맞이하러 나가서 서재까지 모셨다. 서재로 들어간 여 승상은 여염에게 차를 내리라고 분부하고는 여염이 차를 그을리고 차를 내리는 걸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묵가 소칠도 맞았다고?”
“예. 처음엔 넋이 나갔다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대왕야를 말리러 나섰답니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대왕야의 채찍이 날아왔고, 피하기 전에 가슴을 얻어맞았답니다. 두 번째로 채찍이 날아왔을 땐 넘어졌을 때라 등에 떨어졌답니다. 첫 번째보단 위력이 덜했고요.”
“많이 다쳤더냐?”
“꽤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영원 그놈 말이 그냥 겉상처라고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보름이면 흉지지 않고 낫는답니다.”
여염이 매우 자세히 대답했다.
“영원은 가지 않았고?”
여 승상이 조금 놀란 듯 물었다.
“예. 양 구야 사기 사건으로 바빠서 몸을 뺄 수가 없답니다.”
“아, 더 그을리면 탄내 난다.”
여 승상은 차를 가리키며 한마디 하고는 말을 이었다.
“새해가 되면 다섯째가 여덟 살이 되는구나.”
“예?”
여염은 멈칫하다가 금세 반응했다.
“할아버님 말씀은…… 그 오황자 말씀이신가요?”
“그럼 또 누가 있겠느냐?”
여 승상은 별일 아닌데 놀라는 손자의 모습이 불만인 듯 말했다.
“황상에겐 아들이 네 분뿐인데, 그 오황자라니, 옳지 않은 말이다.”
“예.”
여염은 다급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조부는 어릴 때부터 그 누구라도 경시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정북후부에는 쭉정이가 나지 않는다고들 했지. 요즘 다들 영원이 포악하고 오만하다고, 대역무도하다고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여 승상이 허리를 숙이고 찻잔을 들어 올려 향을 맡았다.
“하지만 분명 쓸모없는 인간은 아닐 것이다.”
“이신도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한번은 나와 소계, 그리고 이신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경성에서 자주 하는 한담을요. 그러다가 영가에선 쭉정이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이신이 영가엔 쭉정이가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걸 어찌 알았다더냐? 장공주?”
여 승상이 짚이는 바가 있는 듯 물었다.
“이신은 누이를 매우 높이 삽니다. 한번은 누이가 사내였다면, 뒤를 바라볼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모친과 누이 앞에선 늘 작아진다고요.”
“음, 이가 여인은……. 후, 여인이 너무 영리한 것도 좋지 않다. 평범한 게 좋아. 이가 낭자가 장공주의 눈에 든 걸 보면 지극히 총명하겠지. 장공주가…….”
여 승상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장공주가 황자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이었다.
“할아비가 늙었나 보나. 말이 많았구나.”
“늙다니요. 말씀이 많은 게 아니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시는 거지요.”
“영가에 쭉정이가 나오지 않는다니, 그럼 오황자도 영가 덕을 봤는지 모르겠구나. 대왕야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포악하고 모질었다. 황상과 귀비가 줄곧 총애하지 않고 좋은 글선생을 붙여서 공부하면서 성격을 다스렸다면 클수록 괜찮아졌을 터인데. 하지만 황상과 귀비께서 지극히 총애해서 그 성질대로 컸지. 사람을 성질대로 하게 두어서야 되겠느냐.”
화제를 바꾼 여 승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채찍이 얼마나 많은 민심을 흔들었는지 모른다. 그 성격으로 어찌 주군이 되겠느냐. 그런 주군을 어느 신하가 기꺼이 섬기겠느냐. 휴, 사왕야는 똑똑한 줄 알고 자신이 하는 일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지. 사실은 평범한 사람에도 못 미치는 것을. 제왕이 되면 그 점 때문에 스스로 망칠 것이다. 삼왕야는 지나치게 나약하고 천성이 각박하지. 자질도 떨어지고. 만약…….”
여 승상은 말을 멈췄다가 한참만에 다시 이었다.
“삼왕야가 제위에 오르고 장공주가 감국(監國) 할 수 있다면 임가의 복이고 나라에도 큰복이겠건만.”
“할아버님, 삼왕야는 이미 왕부를 세웠는데 장공주가 어찌 감국하겠습니까.”
“후, 그렇지.”
여 승상이 팔걸이를 살며시 두드렸다.
“삼왕야는 나약하기만 하다. 정말 어느 날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지금처럼 나약할지, 아니면 성격이 변해서 고집이 세질지, 누가 알겠느냐. 네 말이 맞다. 아무리 나약해도 성년이 된 황제를 장공주가 어찌 감국하겠느냐. 새해가 되면 오황자가 여덟 살이 되고 몇 년 더 흐르면……. 설령 오황자가 어려도 오황자 뒤엔 영 황후가 있고 영가가 있다. 영원이 누군가의 지시를 들을 사람이 아니지. 휴!”
“대왕야, 사왕야, 삼왕야는 지금 봐도 단점이 눈에 보이고, 기껏해야 아직 미래를 모르는 오황자뿐이군요.”
여염이 조부의 말을 요약하더니 물었다.
“할아버님 생각엔 오황자의 승산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지금은 어림도 없지. 황상 눈에 아들은 둘뿐이다. 그 점은 온 조정 위아래가 가장 이견이 없는 일이야. 그뿐 아니라 주 귀비는 황후를 원망한다. 누가 황후가 되든, 황후를 원망하지. 황후를 원망하고 적자를 원망한다. 행여 대왕야, 사왕야를 제외한 누구를 골라야 한대도 귀비는 삼왕야를 고를 것이다. 절대로 오황자가 황위를 이어받을 일은 없다. 그 점에선 귀비의 뜻이 황상의 뜻이다. 그러니…….”
여 승상은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 지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설사 황자가 오황자 하나밖에 남지 않아도 황상은 차라리 임씨 종친 중에 양자를 들일지언정 오황자를 태자로 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림도 없다.”
“황상이 세상을 떠난 뒤엔 이 일만으로도 혼군이라는 평을 피하지 못하겠군요.”
“다만…….”
여 승상은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여염에게 차를 따르라고 눈짓했다.
“영가가 백년 명문이니 만만하게 봐 선 안 된다. 영원이 온 이상, 분명 기회를 본 것이겠지. 그 점은 이 할아비도 단정할 수 없다. 아무런 기회가 없는 것이 오히려 큰 기회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