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17화 (217/463)

217화: 옛 기억

“강남 안건, 강환장은 무슨 생각인 건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왕야나 사왕야에게 잘 보일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하지요. 삼왕야를 보좌할 생각인 듯합니다.”

“이렇게 보좌하는 법도 있나? 보좌해서 일으키기 전에 목이 달아날 화를 부를 텐데?”

영원이 싸늘하게 웃자 문 이야가 길게 탄식했다.

“그렇지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둔하다고 하기엔 그렇게 아둔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강환장이라는 사람, 자넨 어떻게 보는가?”

영원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문 이야를 바라봤다.

“그자는…….”

어째서인지, 강환장을 생각하면 문 이야는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 봤을 때, 보림사에서 그의 태도가 너무 기괴하고 강렬했다. 그래서 강환장을 떠올리면 곧바로 기괴하단 단어가 떠올랐다.

“누가 저를 그에게 추천했다고, 저를 처음 보는 날 이 대랑 앞에서 강부로 가자고 계속해서 청하지 뭡니까. 참으로 무례했습니다.

수녕백부가 아무리 몰락했다고 해도 근 백 년 탄탄히 쌓아 온 공훈 세가입니다. 혼인도 해놓고, 이가가 어떤 가문인지 모를 리가 없는데, 어찌 그렇게 이가를 멸시할까요. 낭자 말이, 그자가 이가를 주머니 속 물건으로 여긴다고 했는데,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무슨 주제로 그런 생각을 할까요? 칠야, 사람을 보내 잘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무래도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그자가 감춘 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그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네.”

영원이 일어서자 문 이야는 배웅하지 않겠다고 가볍게 말하고는 계속 양고기를 먹었다.

문 이야 거처에서 나온 영원은 노련하게 이동의 거처인 등화원으로 향했다.

“우리 나리가 목이 마르다고, 차 한 잔 달라십니다.”

위봉낭의 전언에 이동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그녀는 수련에게 찻가루, 다구, 은주전자와 샘물, 홍니로를 준비하라고 하고 위봉낭에게 들게 한 후 후화원 화청으로 향했다.

위봉낭은 내려놓은 홍니로에 은주전자를 올렸고, 수련은 화청 중앙 석탁에 다구를 놓고 품에 안고 있던 비단 방석을 돌의자에 깔고는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이 돌아가라고 눈짓하고 돌의자에 앉아서 찻가루를 찻잔에 넣었다.

영원은 화청 구석의 나무 기둥에 기댄 채 살짝 고개를 틀어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이 두봉을 여미고 비단 방석에 앉아 찻잔에 찻가루를 넣었다. 은주전자의 물이 연기를 뿜으며 모락모락 끓기 시작하자 영원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서는, 이동보다 먼저 주전자를 들어 이동 앞의 찻잔부터 물을 붓고 자기 잔에 부은 다음 주전자를 내려놓고 이동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원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날이 추워지는데 화청 주변에…… 두꺼운 휘장이라도 걸어 바람을 막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면 너무 추워요. 내가 아니라, 낭자가 추울까 걱정입니다.”

이동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 말은, 앞으로도 한밤중에 자주 절 찾아올 거란 말씀인가요?”

영원은 이동이 그런 말을 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듯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 정말 호탕하군요. 자주는 아니지만…… 어쨌든 낭자가, 남방의 낭자들은 모두 연약하니까 이러다가 추울까 걱정이라서.”

“그 정도는 아니에요. 칠야,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이동은 은주전자에 물을 더 넣고 영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는 볼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영원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했다.

“물어봐도 쓸모없을 것 같군요. 그래서 볼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냥 심란해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나 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세요.”

이동은 대답 없이 잔을 들고 차를 홀짝였다. 왜 심란한지 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 누님은 나보다 열 살 많아요. 나는 어릴 때 어머니보다 누님을 더 따랐습니다.”

영원이 잔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 변경 관문을 넘어 싸우러 갔을 때, 날 데리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까? 누님입니다. 누님이 작은 말을 타라고 했는데, 난 듣지 않고 굳이 큰 말을 탔죠. 누님이 중간에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고요.”

영원이 즐거운 듯 웃었다.

“누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돌아와서 말을 씻기라고 벌을 내렸어요. 땅도 다 언 한겨울에 말 몇십 마리를 씻기고 있으니 둘째 형님이 몰래 와서 도와주었죠. 사실 누님도 알지만 모른 척했고.”

이동은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손에 쥔 찻잔 때문인지 아니면 영원의 말 때문인지, 매우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영 황후에 대한 기억은 두 번의 생을 다 해도 영 황후 세 글자뿐이었다. 그녀가 전투도 치른 적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님 혼처를 고르는데, 몇 년이나 골랐어요. 대부분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마음에 드는 혼처는 아버지가 또 별로라고 생각했죠. 가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마음에 들어 하는 혼처는 누님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마음에 다 들고 누님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봄이었는데, 그놈을 벌집 아래로 꼬드겨 나오게 한 다음에 화살을 쏘아 벌집을 떨어뜨렸죠. 벌집이 그놈 머리 위로 떨어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답니다. 나중엔 흐지부지됐고.”

영원의 목소리가 갈수록 낮아졌다.

“나중에 누님이 황상과 혼인하게 되었는데, 그땐 난 어려서 철이 없어서 다들 좋은 일이라기에…….”

영원의 말이 뚝 그쳤다. 그는 고개를 살짝 들고 정자 밖을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다시 말을 이었다.

“누님이 우는 걸 봤어요. 혼인해야 해서 우는 거라고. 너무 멀리 가야 하고, 내가 눈에 밟히고 집이 눈에 밟힌다고.”

영원은 목이 메는지 다시 말을 멈추고 이미 빈 잔을 내려다봤다. 이동은 일어서서 영원의 잔을 가지고 가서 다시 가루를 채우고 차를 내려서 내밀었다.

“나중에, 줄곧 후회했습니다. 그때 그놈 머리에 벌집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누님이 멀리 경성까지 혼인해서 가진 않았을 텐데 하면서.”

“벌집이 아니었다면 다른 일이 생겼을 거예요.”

영원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큰형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후회해요. 갈수록 후회했어요.”

“경성에 와서 누님을 만났나요?”

이동은 화제를 돌렸다. 명운(命運)이라는 건, 모두 무수한 우연이다. 그녀도 예전에 자기를 갈가리 조각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고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아니, 지금은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영원의 목소리가 더 낮게 깔렸다.

이동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전생에 그녀는 서른 넘은 후에 경건히 불법을 수행했다. 후반생은 더더욱 불법에 몰입했고. 윤회와 천명(天命)에 가장 많은 의문을 품었고 가장 많은 생각을 했었다. 몇 년 정도는 자신이 전생에 강환장과 강가에 빚진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래서 빚을 갚으러 온 거라고. 청공 큰스님에게 천도(天道)가 무어냐고 물은 적 있었다. 천명은 또 무엇이냐고. 청공 큰스님은 자기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범인이 어떻게 천도와 천명을 꿰뚫어 보겠느냐고. 하지만 인간의 목숨은 귀천이 있다고 말했다. 황자는 천하를 대신하는 사람이니 개미 같은 평민의 목숨과 경중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개미 같은 평민이 운명을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황제는 더더욱 어렵겠지.

하지만 그녀의 이번 생은 전생과 이미 완전히 달라졌다.

“뭘 생각해요?”

영원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이동을 바라보며 물었다.

“불법이요.”

이동은 식어 버린 차를 다해(茶海: 다반茶盤. 다구를 담는 도구이자 버리는 물을 담는 기구)에 버리고 새로 차를 내렸다.

“불법? 천명? 그 운명이라는 거, 나는 그다지 믿지 않습니다. 운명대로 된다고들 하는데, 운명이 대체 어떻게 되는지 누가 압니까?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자가 다리를 놓고 도로를 보수하고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전생의 빚을 갚는 것이고, 개미를 도와주려 보릿짚을 놓아 다리를 놓아주면 대 끊긴 집안에서 아들을 얻을 수 있다니, 웃기는 소리 아닙니까?”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영원이 지금 하는 말, 그녀는 예전에 몇십 년 동안 생각해도 결론이 없었다. 지금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이 좋은 달빛에.”

영원이 돌연 화제를 바꾸자 이동은 정자 밖을 바라봤다.

“달이 어디에 있어요.”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엔 달은커녕 별도 보이지 않았다.

영원이 몸을 반쯤 내밀고 바라보다가 다시 움츠리고는 웃으며 가슴을 가리켰다.

“달은 마음속에 있지. 불법 수행이나 마찬가지로 마음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동도 웃었다. 아까 그녀가 말했던 불법 이야기로 놀리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내 첫 번째 글선생은 남쪽 사람이었습니다. 양절 일대 사람이었는데, 남쪽 말씨로 북쪽은 너무 춥다고 항상 투덜거리더군요. 북부의 시녀는 거칠다고도 투덜거렸고. 생김새, 말씨, 다 거칠다고. 남쪽 여인이야말로 여인이라고. 하나같이 보들보들한 풀잎 같다고요.”

고개를 기울이고 영원의 이야기를 듣던 이동은 조금은 경계심을 가지고 마지막 말이 반전되기를 기다렸다.

“자연적이고 꾸밈없는 경치가 좋다고, 틈만 나면 시골로 내려가 경치 구경을 했어요.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면 또 경치 한탄하면서 북부 여인은 사내를 봐도 수줍어하지 않고 눈빛을 빛내며 똑바로 바라보기만 한다고 불평했지요. 선생이 꽤 잘생겼었거든요. 그땐 젊었고.”

영원의 설명에 이동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오므렸다.

“양절의 여인들은 사내를 보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얼굴을 붉힌다고, 그것이야말로 꽃 같은 여인이라나요.”

영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까닥이자, 이동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선생은 늘 그렇게 투덜거렸어요. 나중에 어머니가 남쪽 시녀 몇을 사서 시중들게 했는데, 그 시녀들 정말이지, 말만 걸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목까지 시뻘게지고, 말할 때는 웅얼웅얼 하고. 그때 생각했거든, 꽃은 무슨, 쓸모 하나 없고 변변치도 않다고.”

“칠야하고 이야기할 때나 그랬겠죠.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땐 분명 그렇지 않았을 건데요.”

이동은 웃느라 차를 다 내뿜었다.

“내가 잘생겼다는 말인가?”

영원은 확실히 알아들었고 이동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낭자는 그러지 않는걸.”

영원이 다시 상체를 반쯤 이동 쪽으로 기울였다.

“봐 봐. 우리 둘, 사내와 여인이 이 늦은 시간에 마주 앉아 있고, 난 이렇게 잘생겼고 낭자도 이렇게 어여쁜데, 우리 둘은 아무도 얼굴을 붉히지 않아.”

이동은 살짝 노려봤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슨 말이 이래?

영원이 다시 몸을 뒤로 젖히면서 탁자를 두드리며 웃어댔다.

“볼일 없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이동이 일어서자 영원도 일어섰다. 느릿느릿 정자 계단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가서 이동이 월동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와 돌아섰다.

하도 보수 임무를 끝낸 묵칠은 이부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묵 승상과 묵 이야는 매우 대견해했지만, 묵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워했다. 매일 아침 어떻게든 꼼지락거리며 늦게 나갔고 점심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했다.

오후, 묵칠은 저택에서 나와서 가장 번화한 마행가를 따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다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뭉그적거리며 이부로 돌아가려 했다.

어느 비단 점포 앞, 묵칠은 잔뜩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점포 앞에 양 구야가 일꾼들에게 둘러싸여 웅크리고서 콧물까지 흘리며 울고 있었다.

“가 보자!”

묵칠은 말에서 뛰어내렸고 사환들은 구경꾼을 밀치고 묵칠을 에워싼 채 점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묵칠이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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