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추미의 그리움
다음 날 오후, 배가 진하 부두에 정박했다. 문 이야는 살그머니 뭍에 올라 이가 창고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창고에서 나와 큰 마차를 타고 느긋하게 보림사로 달려갔다.
보림사에서 모퉁이를 돌아서 황가 별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별원에서 나온 문 이야는 훨씬 홀가분해 보였다. 곧장 자등 산장으로 돌아가서 장 태태를 만나고 이신과 반 시진 정도 이야기한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서였다.
푹 자고 다음 날 일어나자 이미 오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문 이야는 소세하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상쾌한 기분으로 입맛을 다시며 주방으로 직행했다. 몇 달 동안 고생했으니 제대로 한 끼 먹고 몸보신해야 할 것 아닌가.
주방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벌써 구수한 양고기 냄새를 맡은 문 이야는 코를 벌름거렸다. 성큼성큼 주방 뜨락으로 달려 들어가서 활짝 웃으며 소유에게 인사했다.
“소유 낭자, 솜씨가 또 늘었군!”
“이야, 정말 때마침 오셨네요. 지금 고기가 딱 맞게 익었답니다.”
한창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집던 소유는 문 이야가 들어오자 반갑게 웃으며 맞이했다.
“이야, 어서 앉으세요. 다 준비됐답니다. 어제 이야가 돌아오자마자, 낭자가 사람을 보내 알리셨어요. 이 양, 오늘 아침에 막 잡은 거예요. 제가 직접 골랐지요. 혈장(血腸: 순대)도 만들었답니다. 음, 그것도 다 되었어요.”
소유는 문 이야를 향해 말하면서 큰 그릇에 양고기를 덜어오라고 시켰다. 어멈들이 서둘러 부추장을 가지고 오고, 탕을 담고, 혈장을 썰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고기를 한 접시 가득 담아서 내주었다. 문 이야는 자리에 앉아서 고개도 들지 않고 먹기 시작했다.
단숨에 양고기 큰 접시, 혈장, 거기에 진하고 뽀얀 양고기 탕까지 마신 문 이야는 만족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유 낭자, 매일 매일 그리워하던 한 끼를 드디어 입에 넣었네!”
“이건 첫 끼고, 저녁엔 게살 완자를 해드릴게요. 어탕에 넣고 양고기도 넣어서 다 되면 향채를 뿌려서 드릴게요. 소병도 구워드리고요.”
소유가 싹싹하게 하는 말에 문 이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좋지, 좋아! 음식 솜씨를 따지자면 소유 낭자가 천하제일이지!”
“아이고, 가당치 않아요. 이야, 오늘 바쁘신가요?”
소유가 재빨리 신선한 능금을 씻어서 문 이야에게 내밀었다. 문 이야는 붉고 동글동글한 능금을 골라서 아삭 물고서 꼰 다리를 흔들면서 웅얼거렸다.
“집에 왔는데 바쁠 일이 무엇이야. 한가하다!”
“그럼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럼! 소유 낭자가 필요하다면야, 말만 하면 되지!”
문 이야는 배 불리 먹고 마실 때면 유달리 붙임성이 좋곤 했다.
“제 일은 아니고요. 그래도 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소유가 벌떡 일어나며 분부했다.
“가서 추미를 불러와. 어서 오라고 해!”
“추미가 누구냐?”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추미는 낭자의 배가 시녀예요. 제가 우선 말씀드릴게요.”
소유가 작은 의자를 끌고 오더니 문 이야 맞은편에 앉았다.
“낭자가 혼인하실 때, 태태께서 추미, 춘연, 하섬, 동유 네 사람을 배가 시녀로 보내셨어요.”
“아, 생각났다. 낭자 옆에 있던 시녀! 둘이 머리 올리고 강환장의 이낭이 되었지. 그중 하나가 바로 추미인가?”
“맞아요. 그 애예요. 대야께서 만 어멈을 데리고 강가에 혼수 가지러 갔을 때, 추미가 자기도 혼수라고 하섬, 동유와 함께 돌아왔어요. 춘연만 강가에 남고요.”
“음, 똑똑하군.”
“똑똑하긴요!” 소유는 동의하지 않는 듯했다.
“들어보세요. 돌아와야 하는 걸 아는 건 잘한 거예요. 똑똑하단 말씀도 맞긴 맞고요. 자초지종부터 말씀드릴게요. 추미도 팔자가 사나워요. 하긴 팔자가 사나우니 노비가 됐겠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계모가 들어온 후로 아버지도 계부가 됐죠, 뭐. 추미는 이모가 키웠어요. 이모도 박복하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혼자 되어 수절했대요. 혼자 외아들을 키우면서 삯바느질로 생활하는데 나중에 추미까지 온 거예요.”
소유는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이야기했는데, 다행히 문 이야가 알아들었다.
“이모가 추미에게 참 잘했어요. 친딸처럼 대했고요. 진짜 친딸이었어요. 그런데 추미는 이모의 그 좋은 바느질 솜씨를 하나도 배우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똑똑해요? 아둔하지!”
소유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자 문 이야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바느질을 배우지 못한 바람에, 이모가 병으로 쓰러지게 되자 추미랑 외사촌은 배를 곯게 생겼다고 생각한 거예요. 보세요, 둘 다 얼마나 어리석어요! 추미는 노비가 되었고, 오라비는 짐꾼이 되었어요. 오라비는 대여섯 살 때부터 글공부하던 사람이에요. 이야, 서생이 무슨 짐 일을 하겠어요. 죽으러 가는 거잖아요. 결국 넘어져서 다쳤죠. 다행히 추미가 생긴 것도 곱상하고, 팔자도 그렇게까지 사납진 않아서 만 어멈 눈에 들어서 이가에 오게 된 거예요. 태태는 또 얼마나 좋은 분이에요. 추미를 사 온 다음에 이모와 오라비를 돌보라고 다시 돌려보내주셨어요. 나중엔 이모 후사도 돌봐 주셨어요. 은자를 줘서 이모를 고향에 잘 묻어줬거든요, 오라비에게도 은자를 많이 줬어요. 태태는 추미를 사 온 바람에 오히려 큰 손해를 보셨죠.”
“태태는 자비로운 분이시니까.”
“태태야 좋은 분이시죠. 낭자도 그렇고요.”
소유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추미는 외사촌과 함께 자랐어요. 추미 말이, 이모가 두 사람을 혼인시키려고 했대요. 나중엔…… 그렇게 됐죠.”
그 말에 문 이야 같은 똑똑한 사람도 어리둥절해졌다. 그렇게 되긴 무엇이?
“며칠 전에 낭자가 만 어멈을 시켜서 앞으로 어쩔 셈인지 물었더니, 또 그 생각이 든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요. 사내 중에 좋은 놈이 어디 있어요?”
문 이야의 표정이 조금 멍해졌다.
“안 듣더라고요. 이야, 제 말이 맞지 않나요? 첩까지 됐었는데, 오라비가 서생이 아니라 부두에서 일하는 짐꾼이라고 해도, 가난해서 혼인을 못 할 상황이 아니고서야 남의 첩이었던 여인과 혼인하겠어요? 하긴 또 모르죠. 추미는 은자가 있으니까. 어쨌든, 저는 추미가 눈이 먼 것 같아요. 사내 중에 좋은 놈은 없어요. 아, 이야는 빼고요.”
소유는 갑자기 생각나서 이야는 빼놓기로 했다. 문 이야는 이야는 뺀다는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왔네요. 이야가 이야기 좀 해 보세요. 잘 타일러주세요.”
소유는 일어서서 추미를 향해 앉으라고 눈짓하며 작은 대나무 의자를 툭툭 치고는 자기는 게 요리할 게를 고르러 갔다.
추미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이야, 문안 올립니다.”
“오냐. 매우 평안하다.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라.”
문 이야는 추미를 살피며 빙그레 웃는 얼굴로 앉으라고 하고는 차도 따라 주었다.
“소유가 네 이야기를 하더구나. 네 그 외사촌 오라비는 어떻게 지내고? 아직도 글공부하고?”
문 이야가 오라비 일을 묻자, 추미는 뿌듯한 표정이었다.
“네! 제 오라버니는 정말 똑똑해요. 다들 천생 글공부할 인재래요.”
“음, 수재는 되었고?”
“아직이에요.”
추미가 대답부터 하고는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오라버니 탓이 아니에요. 몇 년 전엔 이모가 쓰러진 데다가 오라버니는 다쳤거든요. 나중엔 이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오라버니가 관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호주 고향 집으로 돌아가진 않았고요. 종친이니 일족이니 할 사람도 없거든요. 기댈 만한 친척도 없고. 이모 장례 지낸 다음 집을 사서 글선생을 모셨는데 또 병이 나서 공부가 지체됐어요. 아니었다면 진작 수재가 되었을 거예요.”
문 이야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다. 평범한 집안에서는 온 가족이 나서도 하나밖에 뒷받침하지 못하지. 집안 종친도 없다면서 네 오라비는 무슨 돈이 나서?”
“예전에 저를 판 은자랑 태태께서 주신 은자로요. 태태가 호주에 오라버니를 위해 작은 장원을 마련해주고 영 노 장궤에게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문 이야는 살며시 그러냐고 대답하고는 궁금한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 같은 사람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노비도 되었고 첩도 된 사람이 오라버니와 혼인하면요. 앞으로 오라버니가 벼슬길에 오르게 도면 조정의 율법에 어긋나게 되나요? 오라버니가 관리가 될 수 있나요?”
문 이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추미의 말에 한참만에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네 오라비는 아직 수재도 아니지 않으냐.”
“알아요. 무슨 말씀인지도 알고요. 진사가 되는 건 하늘에서 문곡성(文曲星: 과거나 문학을 담당하는 별)이 내려오는 거라고들 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문곡성일지도 모르잖아요.”
추미는 사리 밝은 것 같았고 또 매우 진지했다. 문 이야는 멈칫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럴지도 모르고.
“오라비가 널 타박할까 걱정되진 않고?”
추미가 소유보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문 이야도 대놓고 물었다.
“그럴 리 없어요! 제 오라버니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추미는 단번에 문 이야의 말을 부정했다.
“그저 제가 오라버니 발목 잡을까 봐 그래요.”
문 이야는 다시 추미를 진지하게 살폈다.
“율법이라는 것도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네 오라비가 정말로 네가 말한 대로라면, 식견이 높고 훌륭한 게지. 보기 드문 희한한 사내다. 그 정도 사소한 일로는 앞길이 막힐 일은 없다. 네 오라비는 만난 적 없지만, 너는 매우 비범한 것 같구나.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으면 호주로 돌아가 보지 그러냐. 네 오라비에게 확실히 물어보고, 또 너도 확실히 살펴봐라.”
추미가 문 이야를 흘깃 쳐다봤다.
“이야, 말씀은 쉽죠. 호주가 경성에서 얼마나 먼데요. 여인네가 어떻게 돌아가요. 돌아가려면 돈이 또 얼마나 들고요. 태태와 낭자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태태, 낭자에게 또 이런 부탁할 낯짝이 있어야지요. 돈을 또 어떻게 부탁해요. 태태와 낭자가 선량한 분이라고 해서 끝도 없이 손 벌릴 순 없어요. 저도 염치가 있죠.”
문 이야는 추미의 말에, 아까 소유가 ‘이야는 빼고요.’라고 말했을 때처럼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네 말이…… 참, 옳구나. 그래, 네 오라비가 너와 혼인하고 과거 보고 벼슬길에 드는 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문 이야는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기로 했다. 자등 산장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주견이 단단하기도 하지!
“그럼요. 오라버니가 수재가 된 다음에 좋은 가문에 혼수가 풍부한 낭자랑 혼인하는 게 앞날에 좋을까요, 아니면 저랑 혼인하는 게…….”
추미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제가 정말 미쳤나 봐요.”
문 이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추미 낭자, 무슨 말인지 알았다. 내 말 들어라. 이 일은 아무래도 네 오라비의 뜻이 중요하다. 수재가 되어 가문이 좋고 혼수를 두둑이 해 올 수 있는 아내가 자기에게 도움 된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이고, 너를 아내로 맞이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이다.”
추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문 이야가 웃었다.
“네 오라비의 식견과 안목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아까 낭자가 영 노 장궤에게 네 오라비를 돌봐달라고 했다고 했지? 낭자를 믿을 수 있거든 낭자께 말씀드려서 사람을 보내 네 오라비의 뜻을 떠보는 게 좋겠다.”
추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감사해요, 이야.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문 이야는 추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만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흔하지 않은 좋은 여인인데 오라비가 그 복이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