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13화 (213/463)

213화: 센 술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다

“하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아주 날렵해 보였어요.”

“내가 경성에 들어오던 그날요?”

이동이 놀리듯 하는 말에 영원이 되물었다.

“그날 싸움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떠들썩한 구경거리였겠지만, 아는 사람은 그 비결을 알죠. 그 싸움이 어려웠던 이유를 압니까? 정도를 지키는 게 어려운 겁니다! 때려서 다치게는 하되, 심하게 다치게 하면 안 되는 싸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동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데 일리 있는 말 같긴 했다. 확실히 정도를 지키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낭자는요? 낭자 집안은 새해를 어떻게 보냅니까?”

“우리 집이요?”

이동의 눈 앞에 화려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경성에서 보내는 새해는 떠들썩하죠. 매일매일 볼거리가 가득하고. 내 말은, 우리 집안엔 별로 볼 게 없어도 경성에 볼거리가 많다는 말이에요. 올해는 경성에서 새해를 보내니까, 혼자라도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원은 재빨리 대답하고는 술동이로 술을 따랐다. 술동이가 비었는지, 영원이 일어서서 다른 술동이를 열고 잔을 채웠다. 이동은 이미 빈 술동이를 놀란 표정으로 힐끔 봤다. 신경 쓰지 못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술 한 동이를 비웠어? 작은 동이도 아닌데?

“말 타고 왔어요?”

영원은 반 잔 술을 단숨에 비웠다.

“취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얼마나 마셨다고. 취해도 말 탈 수 있고, 사람도 죽입니다.”

“기분이 별로 안 좋군요.”

이동은 영원이 또 단숨에 술잔을 비우는 걸 바라봤다. 답답해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었다.

영원이 술을 따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음, 별로 안 좋습니다. 곧 새해니까.”

곧 새해를 맞이하는데, 그의 큰일은 아직 두서를 잡지 못했다.

이동은 눈을 내리깔았고, 영원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가 나타난 둥근 달을 올려다봤다.

“이 화원, 정말 달구경 하기 좋군. 달구경, 좋아합니까?”

이동이 화원을 둘러봤다.

“이 화원이 달구경 하기 뭐가 좋아요? 달구경 하기 뭐가 좋다는 건데요? 넓지도 않고, 호수도 없고. 운치도 없는데. 달구경 하기 좋은 곳이라면 정북후부 그 호수가 더 좋지 않겠어요?”

영원은 고분고분 인정했다.

“그렇긴 하지. 달빛이 아름답다고 처음 생각한 건, 아홉 살 때였어요. 이맘때쯤이었을 텐데.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겨울이 되자마자 폭설이 내렸습니다. 폭설이 올 때마다, 야만족이 목숨을 걸고 쳐들어왔어요. 한번은 큰형님을 따라 성 밖에 매복하러 갔다가 만만치 않은 놈을 만났는데 사흘 꼬박 쫓아다니다가 겨우 싹 다 죽였죠. 돌아오는 길에, 새벽인데 거의 집에 가까워질 때쯤 눈이 멎고 달이 나왔어요. 하늘에 둥그렇게. 이만하게.”

영원이 검지로 둥글게 크기를 그려 보였다.

“사방엔 눈이 가득하고. 최숙이, ‘제기랄, 달이 참 밝기도 하지!’ 하고 외치더니 목청 높여 노래하더라고요. 큰형님은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최숙의 노랫소리보다 듣기 좋을 거라고 했는데, 난 최숙 노랫소리가 꽤 듣기 좋다고 생각했죠.”

“우리 화원에서 달구경 하면서 그 생각이 났어요?”

영원의 말에서 달빛의 아름다움보다 힘겨움과 처량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많죠. 오늘은 기분이 별로니까, 나중에 차근차근 이야기해줄게요.”

영원은 잔에 든 술을 흔들면서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다가 다시 움츠렸다.

“어사가 사황자를 탄핵한 일, 들었죠?”

“네.”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 귀비가 아라를 때려죽이라고 명한 것도 들었다. 장공주 말이, 정말로 아라를 때려죽였다면, 주 귀비와 사황자, 그리고 황상까지 역사에 한 줄 더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주 귀비가 아라를 때려죽이라고 명했습니다. 아라가 바로 그 기녀고.”

영원이 설명을 덧붙이자 이동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가 죽었다면, 좀 살을 보태서 민심을 흔들 수 있었을 겁니다. 근본을 흔들었을 수도 있고.”

영원이 모호하게 말해도 이동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라가 그렇게 주 귀비 한마디에 맞아 죽는다면, 조정과 경성 사람 모두 하나같이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상관없는 자신이라도 두려워했을 것이고.

“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어요.”

영원의 목소리와 기분 모두 착 가라앉았다. 이동은 멈칫하다가 뒤늦게 알아들었다.

아라를 죽여 주 귀비를 옭아맬 결단을 바로 내리지 못했다는 거구나.

“내가 이렇게 여인처럼 어진 마음이 있는 줄 처음 알았네요. 영 칠야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북삼로에 없는데.”

영원이 달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악몽을 꿨습니다. 누님이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리고 큰형님이…….”

“아라의 생사가 그렇게 중요해요?”

“모르죠.”

영원은 한참 침묵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모르니까 이렇게…….”

“선심엔 좋은 끝이 있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동이 공허하게 위로하자, 영원이 되물었다.

이동이 손에 쥔 잔을 빙빙 돌렸다.

“누가 알겠어요. 우리 집안은 외할머니의 외할머니부터 아랫사람을 후대하고 선행을 많이 베풀었어요. 우리 외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외할머니의 외할머니는 평생 많은 사람을 도왔대요. 그런데 딸 하나밖에 못 낳아서 평생 구박받았대요. 나중엔 집에서 쫓겨났고. 우리 외할머니의 어머니가 홀로 임종을 지켰대요. 외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어릴 때 외할머니의 외할머니가 자주 하는 말씀이, ‘착한 일을 해라. 앞날이 어떻게 될지 따지지 말고.’였대요. 우리 외할머니의 어머니도 평생 선행을 베풀고 사람을 도왔고요.”

“여 승상도 그분께 큰 은혜를 입었죠.”

영원이 나직이 한마디 했다.

“여 승상의 일은, 증외조모가 이야기한 적 있대요. 여 승상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희망이 있어 보여서 도와준 거라고. 선행이 아니라고요.”

영원이 놀란 듯이 바라보자, 이동이 설명을 덧붙였다.

“선행도 선행을 베푸는 격식이 있어요. 증외조모는 스물 몇 살에 혼자 되어 수절했고, 자식이 외할머니 하나뿐이었어요. 우리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그렇고. 나도 수절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난 아이는 없지만요. 하지만 외할머니 말씀이, 당신 어머니, 그리고 당신, 또 내 어머니와 나, 어쩌면 선행을 베풀고 공덕을 쌓아 와서 일개 여인네로 이뤄진 집안이 이렇게 가문을 크게 키운 건지도 모른다고요. 이렇게 훌륭한 딸을 낳아서, 평생 호의호식하고 산더미처럼 은자를 모은 거라고요. 이것도 다 선행을 베풀고 복을 쌓은 덕분이라고요.”

영원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맞네요. 이런 일을 누가 확실히 말할 수 있겠어요. 낭자 말이 맞습니다. 선악이란 대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죠. 뭐가 됐든, 내가 덕을 쌓은 거든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든, 어찌 됐든 다 지난 일이니까. 계속 생각해 봐야 좋을 게 없고 만회할 길도 없어요. 낭자, 내가, 바라는 걸 정말로 이룰 수 있겠습니까?”

“네.”

이동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로 가능하길 바랐다. 이번엔 전생과 완전히 달라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낭자의 덕담에 기대야겠군요.”

영원은 벌떡 일어나더니 잔을 내려놓고 크게 기지개 켜고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었다.

“갑니다!”

그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뛰어서 화청 밖으로 나가더니 가버렸다.

이동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술잔에 든 술을 바라보다가 살짝 흔들어서 입가에 머금고 조금 마셨다.

술이 독했다.

문 이야의 배는 태평부 부두에서 떠났을 때부터 은자를 톡톡히 써서 밤낮없이 물살을 헤쳐 경성으로 돌아왔다.

경성으로 들어가기 하루 전 저녁, 문 이야는 뱃머리에 서서 경성 방향을 바라보며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양안을 멀리 바라봤다.

모두가 잠든 시각, 뱃사람을 바꾼 배는 별빛 아래 계속해서 물살을 가르며 올라갔다.

작은 배가 경성 방향에서 거꾸로 내려오다가 문 이야의 배와 마주치자 방향을 틀어 나란히 나아갔다. 선창 안에서 작은 등불을 켜고 무언가 적고 있던 문 이야는 뱃사람이 달려 들어와 보고하자,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서 나란히 달리는 작은 배를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잠시 후, 뱃사람에게 괜찮다는 듯 손사래 치고는 작은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은 배가 가까이 다가와 나무판을 걸치자, 문 이야는 나무판에 올라 작은 배로 넘어갔다. 불빛 하나 없는 작은 배엔 영원이 선창에 다리를 틀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문 이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 이야는 영원 맞은편에 마찬가지로 다리를 틀고 앉았다.

“말을 타고 오실 줄 알았더니.”

“말을 타고 왔지. 계가는 어떤가?”

영원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듯했다.

“칠야의 생각대로입니다.”

문 이야의 두 눈도 영원처럼 밝게 빛났다.

“계 천관의 추천으로 강환장이 강남에 갔네.”

문 이야가 가차 없이 평가했다.

“강환장이 너무 어리석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미끼를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물다뇨. 하지만 동민의 집을 수색할 줄은 몰랐습니다.”

“넷째에게 넘어간 걸까, 아니면 셋째를 밀어주려는 걸까.”

“아직은 모릅니다. 넷째에게 넘어갈 생각이었다면, 눈먼 이에게 추파를 던진 셈이겠지요. 우선, 넷째가 그 추파를 알아볼 리 없고, 설령 알아봤더라도 강환장을 안중에 두지 않을 겁니다.”

문 이야의 지극히 가차 없는 말에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예전엔 강환장을 너무 높이 샀습니다. 이 정도는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지금은…….”

문 이야가 입을 비죽였다.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소생의 생각은 셋째는 자립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강환장의 생각은 모르겠고, 계가의 생각은 어떤가. 넷째 편에 서려는 건 분명 아니겠지?”

영원이 문 이야를 빤히 보며 하는 말에 문 이야는 잠시 침묵했다.

“칠야, 계가를 만만하게 보지 마십시오. 이 나라의 승상 둘, 묵가와 여가, 모두 뿌리가 얕습니다. 혹은 뿌리가 전혀 없다고 해도 좋겠지요. 하지만 계가와 손을 잡으면 달라집니다. 칠야, 서생을 얕잡아 보지 마세요. 서생의 마음이 향한 곳으로 백성의 마음이 향합니다.”

“그럼 자네 생각은?”

“학자 명문가는 자기네 모든 것을 쏟아붓지는 않습니다. 너무 위험하니까요. 성공하면 주군보다 공이 높아지고, 실패하면 일족이 멸문합니다. 어떻게든 계가 중 한 파를 포섭하십시오. 칠야, 예를 들면 계소영이요.”

문 이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칠야, 어제 제가 일괘(一卦)를 보니, 눈앞의 국면엔 변수가 지극히 큽니다. 곳곳이 위험천만합니다. 칠야 혼자는 큰일을 성사하기 어렵습니다.”

“궁 쪽은 어찌 생각하는가.”

영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느닷없이 물었다. 문 이야가 고개를 저었다.

“오는 내내 생각했는데,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 사람 눈을 속이는 게 어렵습니다. 경성엔 똑똑한 사람이 많으니까요. 칠야가 관련된 걸 누가 알기라도 하면, 칠야와 칠야의 거사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남에게 뒤집어씌우기도 쉽지 않고요, 이만한 일을 감당하지 못할 집안은 뒤집어씌워도 믿지 않을 것이고, 감당할 만한 집안은 뒤집어씌우기가 힘듭니다. 휴! 차라리 반역이 쉽지요.”

한참만에 영원이 나직이 말했다.

“기회를 잡기 전엔 자네와 이가는 더는 움직이지 말게. 모녀 둘이 안 그래도 쉽지 않은데, 기회가 온 것도 아닌데 무고한 일가를 끌어들일 것 없네.”

“칠야, 불조 같은 말씀이시네요.”

문 이야의 말이 진심인지 농인지 알 수 없지만, 영원은 그 말을 상대하지 않았다.

문 이야가 일어서서 공수했다.

선창 밖의 호위가 다시 문 이야의 큰 배로 배를 가까이 댔고, 나무판을 내리고 문 이야를 배웅했다. 작은 배가 뭍에 닿은 후, 영원은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경성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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