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한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복안 장공주가 손가락으로 이동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아, 앞으로 어머니와 함께 여기저기 돌며 장사하면서 경치 구경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이동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는 그다지 밝지 않은 얼굴로 한 손에 잔을, 다른 손에 주전자를 들고 일어나서 기둥에 기댔다. 자작하면서 술 한 주전자를 비우고 주전자와 잔을 이동에게 건네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기, 나는 언제쯤이면 너처럼 이 무수한 족쇄에서 벗어날까? 적어도 혼인하라고 강요받지 않으려면 말이야.”
이동은 침묵했다.
“황상이 있는 한 매일 나를 핍박하겠지. 내가 혼인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당부를 저버리는 것 같은가 봐. 자기 맹세를 저버리는 것 같고.”
복안 장공주가 피식 웃었다.
“다행히 조상의 법도, 하늘에 대한 맹세를 중시해서 망정이지. 맹세한 이상 내가 버티고 승낙하지 않으면 성지를 내려서 핍박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황상 다음엔?”
이동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황상 다음엔, 복안 장공주의 미래가 없어진다.
한참 말이 없던 장공주가 말을 이었다.
“내가 황상보다 먼저 죽으면 좋겠지만, 난 황상보다 어려. 내 혼인 문제를 주씨가 가장 신경 써. 황상이 하루에 한 번 생각한다면, 주 귀비는 하루에 수십 번 생각해. 그리고 주가도. 어머니가 눈 감기 전에 내 혼사를 주가에 부탁했잖아. 흥!”
복안 장공주가 싸늘하게 웃었다.
“셋째는 또 어떻게 할까?”
이동은 멍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장공주 말은, 셋째가 즉위하면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 묻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혼인하라고 그녀를 핍박할까?
“양빈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동이 나지막이 묻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눈에 띄지 않고 겁 많은 사람이야.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지.”
“아우에게 반드시 가문 좋고, 용모, 인품 다 갖춘 세도가 여식을 아내로 찾아주라고 진왕에게 명했대요. 그래서 진왕이 지금까지 골라도 못 골랐고요.”
이동은 할 수 있는 한 넌지시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양 구야를 만난 적 있으세요?”
이동이 묻자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올해 마흔 남짓이에요. 글을 모르고 속셈도 없는데 겁이 많고 작은 이득을 탐해요. 남에게 속아서 옷을 벗고 거리를 뛰어다닌 게 한두 번이 아니고요. 돈이 조금만 생기면 바로 먹고 마시고, 배불리 먹은 다음엔 사창가에 가요. 딱 보면 알 거예요. 장래가 그른 사람이에요.”
장공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동은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계속하지 않았다. 장공주는 그녀보다 영리한 사람이었다.
한참만에, 복안 장공주가 눈을 내리깔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술 마시자. 천만 가지 근심도 술이 풀어준다잖아.”
이동도 주전자를 들었다. 두 사람은 초겨울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각자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잠시 후, 두 사람 모두 살짝 취했을 때, 복안 장공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기분 좋게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음. 그래도 기분이 꽤 좋아. 이만 돌아가. 술은 별로다. 써. 역시 차가 좋아.”
복안 장공주가 비틀비틀 산에서 내려가면서 손을 저었다. 뒤를 따르는 이동도 술기운이 올라 조금은 몽롱했다.
자등 산장으로 돌아온 이동은 내내 흔들리며 오느라 술기운이 올라서 돌아오자마자 자러 갔다. 눈을 떠보니 이미 저녁이었다.
수련이 들어와 휘장을 걷으면서 손을 오므려 입가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왜 그래?”
술 냄새를 살짝 맡은 수련이 후회하는 듯 발을 굴렀다.
“추미 계집애요! 그 계집애, 미쳤어요. 저는 당직이라고 했는데도 술을 먹이잖아요.”
그러더니 차병을 쪼개서 입에 물고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계집애, 어제 늦게 돌아와서는 오늘 아침 일찍부터 온 화원을 헤집고 다니지 뭐예요. 집에 오니까 너무 좋대요. 그러면서 은자를 꺼내더니 다 같이 축하하며 한잔해야 한다잖아요. 축하할 게 뭐가 있어요. 소유 언니도 참. 덩달아 난리 부리잖아요. 정말로 은자를 들고 가서 연회를 열었어요.”
“너무 많이 마시지 않게 잘 지켜봐. 취하면 술주정할걸?”
이동이 웃으며 말했다.
“만 어멈이 노련한 어멈 몇을 불러서 지켜보고 있어요. 하지만 늦었어요. 이미 많이 마신걸요. 그러니까 저까지 붙들고 술을 먹였죠. 제가 갔을 때, 추미는 얼굴에 화장하고 창을 해준다고 난리던걸요.”
수련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만 어멈에게 전해. 흥분이 가시면, 내일도 좋고 모레, 글피도 괜찮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추미, 동유, 하섬 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해. 남고 싶다고 하면 만 어멈이 알아서 일을 마련해 주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2백 냥씩 주어서 보내라고 해. 추미랑 사촌 오라비 일은 만 어멈도 아니까, 어쩔 생각인지 물어보라고 해.”
“네. 또 한 가지. 만 어멈이 오후에 왔더라고요. 낭자가 주무셔서, 저한테 하소연하더라고요. 춘연이요. 춘연 노비 문서는 어떻게 해요?”
“강환장이 돌아온 뒤에, 만 어멈에게 직접 들고 가서 강환장에게 전해주라고 해.”
“네. 만 어멈은 춘연이 어리석다고 걱정하더라고요. 그 곡 낭자, 경성에 들어온 지 몇 개월 만에 힐수방에서 옷을 몇십 벌이나 지었대요. 대갓집이니까 특별히 옷감, 견본을 들고 가서 고르게 했는데, 만 어멈 말이 다녀온 어멈들이 다 혀를 내두른대요. 곡 낭자 성질이 대단하고 독하다고요. 홍 어멈이 그러는데, 홍 어멈이 다녀온 날엔 시녀 아이가 옷을 보느라 넋이 나가서 곡 낭자가 손을 내밀었는데 차를 제때 주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서 시녀가 든 쟁반을 엎고, 비녀로 손을 찔렀대요. 홍 어멈 말이, 비녀가 반 자는 들어갔대요. 시녀는 소리 지르고, 홍 어멈은 놀라서 다리에 힘이 다 풀렸대요.”
이동은 영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데, 비녀로 사람을 찌른 건 아무것도 아니리라. 춘연은, 자기가 선택한 이상 결과도 자기가 감당할 몫이었다.
수련은 이동이 말이 없자 더는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장 태태와 이신은 이른 아침에 경성으로 들어갔다. 이신은 예부 판결과 혼수 단자를 들고 혼수를 청산하러 수녕백부로 갔다. 돌려받지 못한 것은 강가 종친과 문서를 써서 관아에 가서 기록할 예정이었다. 장 태태는 거둬올 수 있는 점포와 장원을 정리하러 갔다. 하루에 끝낼 일이 아니었고, 저녁이 되어도 산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동은 기분 좋게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혼자 식사하고 만 어멈과 관사 어멈들을 데리고 곳곳을 살펴본 다음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경서를 골라 먹을 갈고 막 필사하려고 하는데, 수련이 놀라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이 돌아보자, 위봉낭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수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도 아닌데, 고함은 왜 질러요?”
“이 봐요, 낭자! 다음에 올 땐 문으로 들어오면 안 될까요? 들어오기 전에 기척 좀 하면 안 돼요? 꼭 도적처럼 들어와야 해요?”
수련이 더 불같이 화를 냈다. 갑자기 뒤에서 튀어 나와놓고 왜 고함치냐니,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
“도적이 맞는걸.”
위봉낭이 담담한 얼굴로 이동을 향해 공수했다.
“이 낭자, 우리 칠야가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이동은 일어나서 신을 갈아신고 수련에게 털 달린 두꺼운 두봉을 꺼내달라고 해서 걸치고는 화원으로 들어갔다.
화원의 그 화청 한가운데 있는 석탁에는 술 두 동이가 놓여 있었다. 영원은 한 손에 술잔을 쥐고 미인고(美人靠: 정자 등에 놓인 등받이가 있는 긴 의자. 미인이 기대선 곳이라는 의미이며, 등받이가 거위 목처럼 구부러져 있다고 해서 아경의鵝頸椅라고도 부른다.)에 앉아 있다가 이동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일어서지도 않고 활짝 웃는 얼굴로 앉으라고 눈짓했다.
“술 가지고 왔습니다. 강가에서 벗어난 자유를 축하해야지요.”
영원이 다른 잔을 이동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술은 됐어요.”
이동은 찻잔을 받아서 탁자에 올려두었다.
“오전에 장공주와 몇 잔 마셨어요. 아직도 술이 깨지 않았는걸요.”
“한 잔만요.”
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술동이를 들고 잔을 채웠다.
“받기만 하고 마시지 않아도 됩니다. 일부러 축하하려고 두 동이나 가지고 왔는데요. 그런데 혼자 마시라니, 그건 아니죠. 잔만 들어요. 함께 마시는 셈 칩시다.”
“알겠어요. 그럼.”
이동은 잔을 들고 영원을 향해 들어 보이고는 살짝 머금었다. 영원은 잔을 들어 보이고 단숨에 털어 넣고는 다시 채우고 의자에 앉아서 이동을 위아래로 살폈다.
“얼굴에 빛이 다 나는 것 같군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동이 실소를 터뜨렸다.
“낭자, 올해 몇 살이죠?”
영원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별안간 묻는 말에 이동은 그를 흘겨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원은 자문자답했다.
“열아홉이든가? 난 스물둘. 전에 몇 번 만났을 때, 이상하게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느껴지던데, 오늘은 분명 나보다 어린 게 맞네요! 내 느낌은 틀린 적이 없죠. 그러니, 오늘 낭자가 다른 날과 다른 게 맞습니다.”
“이번에도 전 제가 공자보다 나이 많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아주 많이요.”
이동은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이니까.
“이것 봐봐. 한마디도 지지 않지. 이것만 봐도 예전과 다른걸.”
이동은 멈칫하다가 이내 웃었다. 그래, 기분이 매우 좋고 홀가분해. 그래, 따지지 말자.
“찾아온 용건이 있나요?”
이동이 화제를 바꿨다.
“금 사슬을 깨서 벗어던지고 바다로 돌아왔잖아요. 큰일이죠.”
“그게 다예요? 다른 일은 없고요? 이런 사소한 일로 몸소 오셨어요?”
이동은 손에 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중대한 책임을 진 사람이고 지금 늪을 걷는 것처럼 힘겨울 텐데, 정말로 축하 인사 하나 하려고 달려왔다?
“이야기나 하려고 왔죠.”
영원이 다시 잔을 비우고 또 채웠다.
“이 술, 우리 집에서 가지고 온 겁니다. 우리 북삼로에는 지금쯤 눈이 몇 번 와서 곳곳에 눈이 쌓여서 아주 추울 겁니다.”
“집이 그리우세요?”
이동은 조금 안쓰러운 듯 영원을 바라봤다.
“조금은.”
영원은 한참만에 한숨을 내쉬며 인정했다.
“곧 새해니까.”
올해는 혼자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영씨 일족은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서 사실 새해라고 해도 그렇게 떠들썩하진 않지만.”
영원은 술을 마시며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었다.
“어렸을 때는 제조(祭灶)부터 정월 보름까지, 거의 한 달 동안 학당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수련 시간도 반으로 줄일 수 있어서 아침에 반 시진 정도 더 잘 수 있어서 새해가 오길 꽤 기다렸지만, 나이 든 다음엔 그런 기대도 없어졌죠.”
(※제조祭灶: ‘소년小年’이라고 부르는 음력 12월 23 또는 24일에 부뚜막 신이 승천하여 그 집안의 일 년 상황을 천제天帝에게 보고한다고 하여 그날 제사를 지어 보내는 풍습)
이동은 조금 허탈해졌다. 어릴 때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
“어릴 때 수련하는 게 제일 싫었습니다. 매일매일 새벽에 불려 일어나서 말뚝에 묶인 채 기마자세를 하는 게 제일 싫었죠. 부친이 큰형님과 둘째 형님을 시켜 번갈아 지켜보게 하더라고요. 둘째 형님은 마음이 약해서 내가 울기만 하면 봐줬어요. 조금 더 울면 누님도 넘어갔고. 큰형님은 누님을 제일 두려워하니까, 누님이 넘어가면 큰형님은 상관할 것 없었고. 나중에 부친이 알게 되어서, 누님과 큰형님, 그리고 둘째 형님을 사당으로 보내 무릎 꿇게 하셨죠. 날 아끼는 게 아니라 망가뜨리는 거라고.”
“그래서 무술 수련은 잘했나요?”
이동의 물음에 영원이 그녀를 흘겨봤다.
“당연하죠! 나 같은 사람이, 그 정도로 망가질 리가 있겠습니까? 나 영원이 망가질 리가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