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211화 (211/463)

211화: 밤 방문

해가 저물고, 가늘고 둥근 초승달이 하늘에 비스듬히 걸렸다. 쉴 새 없이 모양을 바꾸는 구름 뒤로 별빛이 자취를 감춘 뒤, 성 밖은 온통 어두웠다.

자등 산장의 대문은 진작 닫혔지만, 커다란 붉은 유소가 걸린 풍등이 대문 양쪽에서 가볍게 흔들리면서 어두운 밤하늘에 따스함을 더했다.

호위, 종복 여남은 명에게 에워싸인 마차가 자등 산장 입구에 멈춰 섰다. 종복 하나가 다가가 문을 두드리자, 문지기가 머리를 내밀었다. 종복이 공손한 모습으로 나직이 말하면서 작은 상자를 건네자 문지기가 상자를 받아들고 기별하러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 때 반주를 몇 잔 곁들인 장 태태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서 기쁘고도 서글픈 마음으로 이동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손 어멈이 그 상자를 들고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태태, 장원 밖에 마차와 사람들이 왔습니다. 문지기 말이 평범해 보이지 않더랍니다. 이 상자를 가지고 왔어요. 우리 집안의 옛 물건이라면서 태태와 낭자를 뵙겠다고 한답니다.”

이동은 상자를 받아서 뚜껑을 열어 장 태태 앞에 건넸다. 상자 안에 비녀가 들어있었다. 비녀를 본 장 태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화들짝 일어나서 연신 분부했다.

“비녀다! 손 어멈! 자네가 먼저 나가게! 저택 사람 모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전하게! 자넨 이 일의 경중을 알지. 어서 가게! 옷 가지고 오고. 아동은 나와 함께 마중 가자.”

이동은 그 비녀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찾아온 사람이 아마도 여 승상이리라는 걸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장 태태는 지극히 빠른 동작으로 두봉을 입고 이동을 데리고 산장 대문으로 직행했다.

이동과 장 태태가 빠른 걸음으로 산장 대문에 도착했을 때, 여 승상은 이미 안으로 들어와서 남색 두봉을 걸치고 뒷짐을 진 채 영벽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장 태태와 이동이 오자, 손 어멈은 심복 어멈들에게 눈짓하고 보이지 않은 곳으로 조용히 물러섰다.

장 태태가 앞에서, 이동은 반 발짝 정도 물러나서 깊이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동동이 이렇게 컸구나.”

여 승상은 장 태태에게서 이동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매우 서글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모녀의 모습을 본 적 있었다. 다만 그땐 이동은 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예, 감사합니다.”

장 태태가 지극히 공손히 말하자 여 승상이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너무 좋아요. 어머니도 매우 기뻐하시고요. 여 승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이동이 장 태태 곁에서 나직이 말했다. 그녀가 강가를 벗어난 일은 세상없는 경사이니, 여 승상이 안 좋은 일로 여기길 바라지 않았다.

“나도 안다.”

여 승상은 유심히 이동을 살펴보면서, 뭐라고 위로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가 강가에서 벗어났다. 강가가 그 꼴이니 확실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버림받은 여인 아닌가. 아직 스물도 안 됐는데, 사람을 잘못 만난 바람에 버림받은 여인이 되었으니.

이동의 증외조모는 그녀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에 홀로 되었다. 그녀의 외조모는 증외조모와 비슷한 나이에 홀로 되었고, 그녀의 모친은 외조모와 비슷한 나이에 홀로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또 이렇게 되었으니.

여 승상은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 위로 눈물을 흘렸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저희 모녀의 운명입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저희 팔자가 좋지 않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자꾸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셨지요. 괜찮습니다. 아동에겐 제가 있습니다.”

장 태태가 말을 멈췄다가 계속 이었다.

“오라비도 있고요.”

“신가아는 좋은 아이지.”

여 승상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살짝 틀어 눈물을 삼켰다.

“내년 춘시 후에 신가아에게 좋은 아내를 골라주게. 가문 같은 건 따지지 말고. 며느리는 인품 좋고 성격 좋은 게 제일 중요하네. 자네는 사리 밝은 사람이니 내가 길게 말할 필요 없겠지. 결정 내리기 힘들면 나를 찾아오게. 내가 제대로 봐주겠네.”

“예.”

장 태태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가 장공주와 잘 지내는 건 매우 좋은 일이다. 다만 장공주는 평범한 여인과 다르다. 장공주가 하는 말은, 네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들을 건 듣고, 듣지 말아야 할 건 그냥 흘려듣고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넌 아직 어리다. 몇 년 있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울타리는 있어야 한다. 네 어미가 평생 너와 함께 할 순 없다. 오라비가 아무리 좋아도 앞으로 자기 집안을 이뤄야 하지 않으냐. 세상에 좋은 사내는 많다. 다 강가 같지 않아. 만사 마음을 열고 생각해야 한다.”

여 승상이 구구절절 당부하는 말에 이동은 하나하나 대답했다.

“별일은 없고, 그냥 얼굴 보러 온 것이다. 너희 모녀가 좋은 걸 보니 마음이 놓인다. 이만 돌아가마. 두 사람도 어서 쉬어라.”

여 승상은 잔소리 많은 웃어른이 노년에 할 일 없어 한 번 들른 것처럼 굴었다. 장 태태와 이동도 괜히 만류하지 않고 서둘러 그를 배웅했다.

두 사람은 대문 앞에 서서 여 승상의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돌아서서 대문을 닫았다.

“우리 집안과 여 승상의 인연, 알고 있던 것이냐?”

장 태태가 제 팔짱을 낀 이동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네, 장공주가 알려주셨어요.”

이동이 나직이 대답하자, 장 태태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나도 네 나이쯤에 알게 되었다. 네 외할머니 성격을 너도 알지 않으냐. 고집스럽고 완강하셨지.”

“그렇지도 않아요.”

외할머니를 떠올린 이동은 포근하면서도 씁쓸했다.

“나이 드신 후에는 그렇지, 젊었을 때는 얼마나 깐깐했는지 모른다. 여 승상은 안원후부 소 노야의 금지옥엽과 혼인했다. 그 당시 안원후부는 매우 위세가 높았지. 소 낭자는 오냐오냐 자라 교만했고, 여 승상과 혼인한 그다음 해, 아니, 그해였던가, 네 외할머니의 소금 판매 허가를 없애고 소금 점포 열 몇 곳을 문 닫게 했단다. 네 외할머니가 얼마나 화를 내던지.”

장 태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소금 점포 때문에 네 외할머니는 평생 화를 내셨다. 나중에도 나와 너 때문이 아니었다면 경성으로 옮겨오지도 않으셨을 거다.”

“그건 여 승상이 잘못한 거니까요. 모르셨을 리가 없어요.”

“잘했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큰 잘못은 아니지. 지금이야 위풍당당한 승상이지만, 그 당시 소가와 혼인했을 땐 데릴사위나 마찬가지였다. 저택, 혼인할 때 입을 옷까지 소가에서 준비해 주었단다. 그래, 네 말도 맞지. 아무리 그래도 잘못했지. 네 외할머니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다.”

한참 설명하던 장 태태가 웃으며 덧붙였다.

“네 외할머니가 떠나기 전에 그러시더라. 우리 조손 세 사람, 갈수록 못하다고. 나는 어머니보다 못하고, 너는 나보다 못하다고 말이다.”

이동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탄식했다. 예전의 그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의 그녀도 어머니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네 외할머니가 당부하더구나. 자기처럼 굴지 말고, 부탁할 일이 있으면 찾아가서 부탁하라고. 울어야 할 땐 울라고.”

장 태태가 이야기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찾아가셨어요? 그 비녀요?”

“그래, 네 오라비를 위해서였다. 내년 춘시, 네 오라비가 급제하는 게 좋으니까.”

장 태태가 또 웃었다.

“우리 좀 보렴. 나는 비녀를 보냈고, 너는 장공주에게 부탁했고. 결국 일이 이렇게 크게 되었구나.”

“장공주께 부탁하진 않았어요. 알아서 도와주신 거예요.”

이동은 서둘러 해명해놓고, 다시 금세 웃었다. 입을 열진 않았지만, 부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조회 후, 황상이 상공들의 동의를 거친 예부의 판결을 비준하고 각처에 발송했다.

곡 낭자와 강가의 혼약이 먼저이고, 곡 낭자는 부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몸이라서 혼약까지 무효가 되면 기댈 곳이 하나 없으니, 곡 낭자와 강가의 혼약을 인정한다는 판결이었다. 또 강가와 이가의 혼사는 절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강가가 이가의 혼수를 돌려주는 것으로 판결했다. 강가에서 정혼을 파기하고, 재물을 탐낸 부덕한 짓을 했으니 수녕백 작위는 세습에서 승습(承襲)으로 강등되었다. 즉, 수녕백 작위는 강환장이 마지막 대가 되었다.

이신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판결문을 받았다. 이 나라에서 세습 작위를 받는 건 개국 공신뿐이었다. 황자라고 해도 다섯 대까지 세습하고 끝난다. 수녕백 강가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중한 세습 작위를 대가로 내놓게 된 것에 그는 매우 만족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이동이 보림암 문 앞에서 마차에서 내리자 문 앞을 쓸던 나이 든 비구니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합장했다.

“이 시주, 장공주께서 분부하시길 뒷산으로 오시랍니다. 오늘은 뒷산에서 경치 구경하자고 하시네요.”

이동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수련과 녹매를 데리고 보림암 밖 작은 길을 따라 경쾌하게 뒷산으로 올랐다.

산 중턱에 있는 절벽을 마주한 정자에서, 복안 장공주가 벼랑 쪽에 서 있었다. 산바람에 두봉이 펄럭이는데, 스산한 가운데 고고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왔어?”

발걸음 소리에 복안 장공주가 돌아서서 위아래로 이동을 살피며 빙긋 웃었다.

“축하해.”

“장공주 덕분이에요.”

이동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복안 장공주가 비단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내 덕은 아니지. 오늘부터 더는 강가 오물을 머리에 이고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앞으로 어쩔 셈이야?”

이동은 다른 의자에 앉아서 따뜻한 물에서 데운 잔 두 개를 꺼내어 따듯하게 데운 술을 우선 장공주에게 따라주고 자기도 따라서 마신 후에야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이 많죠. 첫째,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복안 장공주가 가볍게 웃고는 계속 말하라고 손짓했다.

“세상에 좋은 사내는 많고, 다 강가 같은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저는 다시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

이동은 지난 생의 몇십 년을 떠올렸다. 다시는 안주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사내가 어떻게 대하든 마찬가지였다. 잘해준들 뭐가 달라질까.

“내년에 오라버니가 순조롭게 급제하면, 춘시가 끝난 후엔 혼사를 준비해야 해요. 혼담이 오가면 납채를 주고받고, 혼례 준비해야죠. 새언니가 적응하려면 반년, 1년은 걸릴 거예요. 아무리 어머니가 대범하고 성격이 좋아도, 어찌 됐든 가주예요. 오라버니는 어머니의 친아들도 아니잖아요. 오라버니는 별생각 없더라도 새언니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동은 잠시 말을 멈추고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제 말은, 저희 집안이 다른 집안과 다르다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양자고, 또 저처럼 시가와 절연하고 친정에 돌아온 시누도 있고. 새언니가 들어오면 편하지 않을 거예요. 반년 동안 새언니 돕는 셈 쳐야죠. 사실은 어머니, 그리고 저를 위한 일이에요. 새언니가 어머니와 잘 지내고 집안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도와야죠.”

“그렇게 깊이 생각할 것 없어. 혼담이 오갈 때 사람 인품과 성격을 잘 보면 돼. 어려운 일이 아니야.”

장공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음. 집안일이 손에 익은 뒤엔 장사도 있어요. 장사도 잘 가르쳐야 해요. 몇 년 지나서 새언니가 안팎을 잘 처리하게 되면 오라버니도 관료 사회에 익숙해지겠죠. 그럼 저는 어머니와 함께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른 지방 장사도 돌보고 경치 구경도 하려고요.”

이동은 이야기할수록 마음이 붕 떴다. 지금 이 순간, 적어도 그녀 자신은 예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면, 다른 건 어떨까. 예를 들어 장공주는 예전과 달라질까? 장공주가 예전과 달라진다는 건, 진왕이 예전과 달리…….

하지만 대황자 혹은 사황자가 된다면, 장공주는 예전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오황자? 문 이야는 이가 입장에서 오황자를 고른 걸까, 아니면 장공주 입장에서 고른 걸까.

그건 영 황후와 영가에 달려 있었다. 영원과 장공주, 그녀가 모르는 사이 벌써 몇 번 수를 주고받았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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