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묵 승상의 한숨
묵 승상은 아라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라. 영원은 주가 소육, 그리고 우리 집 못난 소칠과 사이가 좋다. 영원이 네게 방법을 알려준 거라고 하니, 하루 이틀은 거둬 줄 것이다. 오늘만 지나면 아무 일 없을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라. 경부 관아에 가거라. 여기서 멀지 않다. 영원이 관아에 있다. 어서 네 시녀를 데리고 가라. 뒤를 따라갈 사람을 보내주마. 네가 관아에 들어가서 영원을 만날 때까지 지켜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승상야!”
아라는 이제 묵 승상이 자기의 안전을 지켜주겠다고 하는 것임을 확신했다. 다만 안전히 칠야를 만나야만 했다.
두렵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조금 줄은 아라는 고개를 조아리고 일어서서 뒷걸음치다가 다시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다다를 데리고 나와서 찬 바람을 쐬니, 정신이 들었다.
세상에, 나 뭐라고 한 거야? 영 칠야가 알려줬다고 했어? 나, 영 칠야를 불었어!
조금 전에 안정된 마음이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나 영 칠야를 불었어! 이제 죽었네!
묵 승상은 아라가 다다를 데리고 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서서히 돌아서서 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 가던 묵 이야가 막 중문 안으로 들어온 묵 승상과 마주쳤다.
“아버님!”
“별일 아니다. 마침 잘 왔다. 함께 좀 걷자꾸나.”
묵 승상의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묵 이야는 돌아서서 묵 승상과 나란히 걸었다.
묵 승상은 간단하게 아라가 왜 찾아온 것인지 이야기했고, 묵 이야는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궁에서 사적인 형벌을 가해 사람을 죽이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망국의 징조입니다.”
묵 승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가 그런 걸 어디 아는 사람이냐. 황상은 분명 모를 것이다. 아시면 용납하지 않으시겠지. 전에는 이런 일로 걱정하진 않았는데, 이제는…….”
묵 이야의 생각이 빠르고 날카로워졌다.
“귀비가 태후가 되면요? 첫째, 대왕야와 사왕야 모두 황상과 다릅니다. 둘째, 귀비와 태후의 신분이 다르고요. 귀비가 잘못한 게 있으면 황상이 한마디 한다지만, 태후가 되면요? 자식은 효 앞에서 그저 설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 귀비가 설득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고요.”
묵 승상이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게 걱정이다. 대왕야와 사왕야는 황상에 못 미친다. 귀비는 식견이며 인품이며 그 지경이지. 수국공부는…….”
묵 승상은 말을 멈추고 쓴웃음 지었다.
“사리에 밝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수국공은 말할 것도 없고. 아둔하고 사리 분별 못 한다. 수국공 세자, 주가 소육, 이 두 적장자는 하나는 대왕야 곁에서 타이르긴커녕 사사건건 순종하지, 또 하나는 영원의 명령만 따르지. 영원!”
묵 이야는 웃음을 터트리다가 이내 헛기침하며 감췄다.
“주택헌은 그래도 조금 괜찮지만, 그것도 비교적 괜찮은 것뿐이다. 이런 모친에, 이런 외가라니. 휴!”
묵 승상의 한숨에 조바심이 가득했다. 묵 이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다.
묵 이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심결에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님이 하신 말씀, 형님과도 이야기했었습니다. 대왕야의 성격, 포악해도 지나치게 포악합니다.”
묵 승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왕야는 조금 낫지만, 스스로 비범하다고 여기고 똑똑한 줄 알고 권모술수를 너무 부립니다. 어리석은 자가 권모술수를 부리는 건데 지금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보위에 앉은 후에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는 시시한 수작을 부리다가는 소인배에게 이용만 당할 뿐입니다. 게다가 소칠에게 들었는데, 사왕야가 지금 영원을 매우 신임한답니다.”
묵 승상이 한숨을 푹 내쉬자, 묵 이야가 부친을 돌아봤다.
“대왕야와 사왕야 모두 스스로 비범하다고 여기고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나는 황상을 십여 년 모셨고 여 승상은 황상을 수십 년 모셨지. 우리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는 일이 하나 있다.”
묵 승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황상의 마음속엔 아들은 둘뿐이다. 태자 자리는 두 사람 외에 제삼자가 될 가능성이 없어.”
“휴!”
이번엔 묵 이야가 조바심 가득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즉, 대왕야와 사왕야가 다 죽어야 황상이 어쩔 수 없이 다른 두 아들을 고려할 거란 말이었다. 설사 대왕야와 사왕야가 다 죽어도, 황상은 대왕야와 사왕야의 아들을 먼저 고려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말이다.
대왕야와 사왕야는 머리는 나쁘지만, 몸은 매우 건강했다. 다 죽는 일은…….
누가 황가의 피를 손에 묻히려고 할까. 황가의 선혈이 묻은 가문은 뿌리째 뽑힐 게 분명한데.
두 사람이 말없이 한참 걷다가, 묵 승상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소칠은?”
“관아에 재미있는 일이 있다고 구경한다고 갔습니다. 아마 또 영원과 허튼짓하는 것이겠지요.”
“내버려 두어라. 어쩌면 이 형국, 정말로 영원 그놈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예.”
묵 승상이 무슨 생각으로 하는지 모를 말에, 묵 이야는 한참만에 나지막이 대답했다.
“관아에 시끄러울 일이라는 게, 또 수녕백부 일이냐?”
“예. 이가와 매파들이 강가를 고발했습니다. 사기 혼인에 모함까지 했다고요. 이가가 수완이 좋긴 한데, 이번 일은 사족인 듯합니다. 이 틈에 싹을 다 밟아버리려고 하는 것 같은 의심이 듭니다.”
아까의 화제에서 벗어난 묵 이야와 묵 승상은 한층 홀가분해진 표정이었다. 강가와 곡가의 혼약부터 그 후로 이어진 갖가지 일, 명확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보였다.
묵 승상의 표정, 말투 모두 누그러졌다.
“강가가 뿌린 씨다. 며칠 전에 여 승상이 일부러 그 이야기를 꺼내더구나. 이가에서 수완을 부리긴 했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쓸데없이 이번 일까지 일으킨 건 아마도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잘 마무리하려고 한 것이리라고, 상대할 것 없다고 하더구나. 다만.”
묵 승상이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강환장이 멀리 강남에 있으니, 진왕이 조금은 돌봐줘야 할 것을. 휴.”
“진왕이 남을 위해 나선 적이 있어야 말이지요.”
묵 이야는 진왕을 다소 무시하는 듯했다.
“책임감이 없다기엔, 양 구야의 혼사를 처리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니고. 양 구야의 혼사는 진작 해결했어야 할 일 아니냐. 어제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았더니, 양빈이 반드시 세도가 집안에 인품과 용모 모두 훌륭한 여인이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그렇게 고른 사람 중에선 다들 승낙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정하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양 구야 주제예요? 집안 배경도 없고, 인품도 없으면서 무슨 주제로 상대는 가문, 인품, 용모 다 갖춰야 한답니까? 이건 책임감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지요.”
묵 이야는 가차없이 제 부친의 말을 막았다.
“양빈 같은 아녀자가 어리석게 군다고 덩달아 어리석게 군답니까? 못 고르면 어쩌려고요. 계속 질질 끌려고요? 양가 대가 끊길 때까지요? 이게 효심입니까? 효심이라고 쳐도 어리석은 효심이지요!”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묵 승상은 또 조바심이 나는지 손사래 쳤다.
“추밀원에 다녀오너라. 아라의 일을 주 추밀부사에게 말해 보아라. 이야기 꺼내면 바로 무슨 일인지 알아들을 것이다. 주 귀비를 타일러 보라고 해라. 설득되면 좋고. 내일 황상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주 귀비의 입김이 갈수록 세지니 거스르지 않을 수 있으면 거스르지 않는 게 제일 좋다.”
“예.”
묵 이야는 묵 승상과 거처까지 같이 갔다가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추밀원으로 향했다.
경부 관아, 영원은 아라와 다다를 데려가라고 한 다음 흐느적흐느적 흔들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건 기회였다. 아라가 수국공부 사람에게 장을 맞아 죽는다면, 반드시 온 경성이 술렁이고 조정이 흔들릴 것이다.
역대 황조 어느 대에서도 세상 사람이 가장 꺼리는 일은 사적으로 형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궁에 신형사(愼刑司)를 둬서 궁녀, 내시가 법도를 어겼을 때도 심사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다. 조정에도 대리시, 형부 등 법률에 따라 벌을 정하는 부서가 있는 것이고. 궁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공연히 사람을 죽이는 건 망국의 징조였다.
오늘 여기서 아라가 죽으면, 주 귀비, 그리고 사황자가 사사로이 형을 휘둘러 사람을 죽인 것이 된다. 주 귀비와 사황자가 지금도 이렇게 거침없고 거리낌 없는데, 어느 날 주 귀비가 태후가 되고 사황자가 황상이 된다면 그땐 어떨까, 하고 누구나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라가 죽으면, 조정 안팎이 위기를 느낄 것이다.
아라의 죽음은 의미가 중대하고 작용이 중대했다.
영원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라는 그의 사람이었다. 그가 거둬서 줄곧 쓰던 사람으로, 비록 어리석고 지금까지 쓸모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날 그녀를 거둔 이래 지금까지 쫓아내지 않았다.
그의 수하들은 언제나 용맹하게 앞만 보고 달렸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라 이 어리석은 물건은 죽게 되어서야 겨우 조금 쓸모가 생겼는데.
하지만 아라는 그의 사람이었다…….
영원은 심란하기 짝이 없이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번잡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사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왜 얼이 빠져서 이런 무지렁이를 수하로 받아들였을까.
자기가 어리석었던 것이니 자기가 감당할 수밖에.
휴. 됐다. 됐어.
“위봉낭!”
영원이 고함치자, 위봉낭이 들어왔다. 영원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위봉낭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이를 갈 듯이 분부했다.
“최신에게 다녀와라. 아라와 비슷한 몸집의 시신을 준비해두라고 해라. 만에 하나 일이 벌어지면, 네가 직접 그 어리석은 것을 경성에서 내보내고 사람을 시켜 멀리 보내라. 쯧. 무지렁이 같은 것. 정말이지…….”
영원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팔걸이를 탁탁 내리쳤다. 위봉낭은 조금 의아한 듯 영원을 힐끔거렸다.
가짜로 죽은 척하고 빼돌리는 건 사소한 일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셨을까. 그 아라가 또 무슨 어리석은 짓을 했기에 칠야의 심기가 이 지경일까. 휴. 정말로 어리석은 것!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두 사람을 골라서 보내라.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리석은 것!”
애초에 내 사람으로 들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강가와 이가의 혼담이 오갈 때 대체 곡가와의 혼약 이야기가 나왔는지 아닌지, 그리고 곡가가 나타나면 첩이 되겠다고 이가가 승낙했는지 아닌지는 조사하면 쉽게 나올 일이었다. 바로 작년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 당시 양가에서 청한 매파, 당사자, 하나도 빠짐없이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중에 강가와 곡가가 정혼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 부윤은 대당에서 곧바로 판결서를 썼다. 강가는 이가와 혼담이 오갈 때 곡가와의 혼약을 거론한 적 없으며, 이가는 강가와 곡가의 혼약에 대해서 하는 바가 전혀 없고 곡가 낭자가 나타나면 이가 낭자가 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들은 적 없었다고. 이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는 반드시 근원을 발본할 것이고 찾아내면 중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가에서 소문을 퍼트린 거라는 이가의 주장은 근거가 없으니, ‘의절하는 것으로 강가, 이가, 곡가의 혼사 갈등을 마무리 지어 달라.’는 이가의 요구는 경부 관아에서 판결하지 않고 예부에서 처리하도록 예부로 올렸다. 예부에서 알아서 하라지 싶었다.
이신은 분노해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강가를 욕했다. 강가가 너무 비열하고 파렴치하다고 욕하며, 근거가 없어서 관아에서 강가를 처벌하지 못하면 스스로 혼수를 들고나오고 인연을 끊겠다고 했다.
형 부윤은 우물거리며 헛웃음만 쳤다. 이런 일은 알아서 하라지.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