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재수 없는 아라
주육은 땀이 삐질 흘렀다. 고모가 분부한 일이라 할머니하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는 걸 안다. 고모를 찾아가야 하는데……, 고모를 만나서 어떻게 이야기하지.
됐다. 일단 관아에 보내자. 어차피 관아엔 영원 형님이 있고……. 아니지. 일단 원 형님에 가서 어쩌면 좋을지 물어보자. 어차피 연향루에 있는 아라가 달아날 것도 아니고.
경부 관아까지 달려간 주육은 말에서 내릴 때까지도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생각해 내지 못했다.
주육이 횡설수설, 하는 말을 영원은 몇 마디 만에 알아들었다.
“오늘 조회에서 사왕야가 기녀를 끼고 논다고 탄핵당했다. 귀비께서 화를 내신 건 분명 이 탄핵 건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제길! 누가 그렇게 할 일 없이. 죽고 싶대?”
주육은 탄핵이라는 말을 듣자 길길이 뛰었다. 감히 사왕야를 탄핵하다니.
“꼴 좀 봐라. 생각은? 넌 생각이라는 게 없냐? 이 경성에서, 누가 감히 이런 풍류 같은 작은 일로 사왕야를 탄핵하겠느냐? 누가 있어?”
영원이 쥘부채로 주육의 머리를 누르며 의자에 앉혔다.
“내 말이! 누가 감히? 이 경성에서 누가 감히 이런 사소한 일로 사왕야를 탄핵해? 죽고 싶나.”
주육은 영원에게 정수리를 눌리고도 계속해서 동동거렸다.
“대왕야가 있잖으냐! 이 멍청아!”
영원이 쥘부채로 주육의 머리를 모질게 내리치자, 주육은 아이고, 하고 외치면서 머리를 감싸면서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 대왕야였다고? 이런 사소한 일로? 그럼 됐어. 그건 접어두고, 아라는 어쩌지? 골치 아프게 됐군! 한쪽은 대왕야, 한쪽은 고모, 그리고 할머니까지. 사왕야도. 아이고야. 끝났다. 아라, 이번에 끝장났어.”
주육은 아까운 얼굴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영원이 그를 삐딱하게 노려보며 부채를 빙빙 돌렸다.
“네 할머님이 아라를 죽이려고 하는 거, 사왕야가 아시냐?”
“모르지! 내 말은, 사왕야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른다고. 아마도 모르겠지.”
주육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왕야는 아라를 어떻게 생각하시냐? 마음에 두셨냐?”
주육은 또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내 말은, 사왕야가 마음에 뒀는지 아닌지 모른다고. 원 형님, 왜 모르는 것만 물어. 사왕야가 아라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닌지, 내가 사왕야도 아닌데 어찌 알아.”
“그럼 아라에게 물어는 봤고?”
“아라에게 물어서 무얼 해? 그 계집애가 하는 말을 믿어?”
“그건 그렇군. 다만 말이다…….”
영원이 부채를 빠르게 돌렸다가 느리게 돌렸다가 하면서 느릿느릿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장을 쳐서 아라를 죽이기 전에, 사왕야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만일 사왕야가 아라를 마음에 뒀으면 어쩌려고? 그런 일 없다면 그냥 헛수고 한 번 한 셈 치면 되지만, 만일 확인했더니 사왕야가 아라를 마음에 뒀고,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때라면 네가 장으로 사왕야의 보물덩어리를 피떡으로 만드는 거다. 내 생각엔 말이다, 사왕야 성격으로 절대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널 장을 때려 피떡으로 만들진 않아도 적어도 피는 튀기게 하시겠지.”
그 말에 주육이 턱을 문질렀다.
“그렇긴 하지! 아라 같은 아이를 아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누가 아라를 장으로 쳐 죽였다면, 나도 흠씬 패줄 거다. 때려도 되는 상대라면 말이지.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이야. 맞다, 맞아! 형님 말이 맞다! 사왕야에게 이야기해야겠다. 그럼 대놓고 말할까, 아니면 돌려서 말할까?”
“네가 떠볼 줄은 알고?”
영원이 가차 없이 묻자, 주육이 이마를 탁 쳤다.
“형님 말이 맞다! 떠보는 건 관두는 게 좋겠어.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고모가 아라를 장을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죽이냐고 마느냐고 물어봐야겠다.”
주육은 바람처럼 달려나가 사황자를 만나러 갔다.
영원은 어두워진 얼굴로 위봉낭을 불러서 나지막이 분부했다. 위봉낭은 길을 빙 둘러서 연향루로 가서 아라를 구석으로 끌고 가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했다.
“너와 사황자의 일, 귀비께서 아셨다. 널 때려죽이라고 하셨다.”
아라가 다리가 풀린 듯하자, 위봉낭이 힘껏 끌어올렸다.
“못나게 굴지 좀 마라! 잘 들어. 다다를 데리고 지금 바로 묵 승상부로 가서 묵칠을 찾아. 주육이 서신을 전하라고 했다고 찾아가. 너와 사왕야의 일, 묵 칠소야도 안다. 귀비께서 널 때려죽이라고 한다고, 살려달라고 졸라. 명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승상부에 들어가야 한다. 일단 들어가면, 묵 승상이 직접 널 지켜주겠다고 하기 전엔 죽어도 나오지 마. 잘 들었어?”
“드, 드, 드, 들었어요!”
아라는 비녀가 다 떨어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렇게 해. 얼른 내려가서 다다를 불러서 가. 난 간다.”
위봉낭은 아라를 놓고 돌아서서 펄쩍 뛰어 내려갔다. 아라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다다를 불렀다.
“다다, 다다. 어서 가자! 어서 가!”
아라는 마차를 부를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갔고, 다다는 아라 뒤에서 헐떡거리면서 달렸다. 두 사람의 모습에 길을 가던 사람이 모두 힐끔거렸다.
저승사자가 다시 찾아온 아라는 거의 단숨에 묵 승상부 대문 앞까지 달려왔다. 검은 바탕에 금빛으로 적힌 ‘묵부’라는 두 글자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며 겨우 안도했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 비틀비틀 묵부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다다도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아라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아서 입을 벌린 채 숨을 헐떡였다.
“소, 소, 소저……. 또……. 또…….”
다다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라가 숨을 훅 들이쉬고는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나리들, 칠소야 계신가요?”
아라가 미친 듯이 달려왔을 때부터 묵부 문지기들은 목을 길게 빼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묵부 계단에 주저앉자, 지나가는 길에 달리다가 힘들어서 앉은 건지 아니면 이 집에 찾아온 건지 몰라서 물어봐야 하는지 주저하고 있는데 여인이 계단으로 올라오더니 그렇게 물었다. 영리한 문지기들은 순식간에 이 여인의 정체를 깨달았다.
자기 댁 칠소야가 이 아라 소저에게 홀딱 빠진 게 바로 몇 달 전 일인데!
“저기 낭자, 실로 공교롭군요. 우리 칠소야는 댁에 안 계십니다. 이른 아침에 나가셨어요. 어딜 가신다는 말씀도 없었어요. 늦게 돌아오신다고만 하셨습니다.”
문지기 우두머리는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전혀 공손하지 않게 아라의 질문을 싹 다 막았다.
“그럼…….”
아라는 얼떨떨해졌다. 칠소야가 집에 없으면 어떻게 들어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칠소야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그녀의 신분으로는 불가능했다.
칠소야를 어디에 가서 찾는담? 아이고! 아까 위봉낭에게 물어봤어야 하는데! 칠소야가 댁에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라는 지척지척 계단에서 내려가 다다에게 기댄 채 묵부 입구 큰 사자상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목숨이 오가는 이때, 칠소야가 왜 집에 없는 걸까. 칠소야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봉낭 언니도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는지 모르고. 그리고 칠야도…….
어차피 칠야는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는데, 이제 어쩌나.
문지기들은 계단 맨 위에 서서 아라를 잠시 지켜봤다. 아라가 다다에게 기대고, 다다는 사자상에 기댄 걸 보고 돌아갈 뜻이 없는 걸 깨달은 문지기 우두머리가 눈짓했다. 문지기 둘이서 아라와 다다에게 돌아가 달라고 말하려고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데, 골목 입구에 묵 승상의 마차가 나타났다.
다다는 아라를 밀고 아라는 다다를 끌고, 두 사람은 무심결에 사자상 안으로 숨었고, 문지기들은 서둘러 계단 아래로 내려가 묵 승상을 맞이했다. 묵 승상이 마차에서 내리자, 아라는 사자상 뒤에서 틈으로 묵 승상을 바라보며 ‘묵 승상이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은 이상’이라고 말하던 위봉낭의 당부를 떠올렸다. 그 묵 승상이 눈앞에 있다!
아라는 충동적으로 다다를 밀어내고 묵 승상을 향해 달려갔다.
“승상야, 살려주세요!”
다다는 아라에게 밀려서 비틀거렸다. 안 그래도 어리둥절해서 머리가 어질거리던 다다는 아라가 살려달라고 고함치자, 아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로 후다닥 저도 달려나갔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라가 사자상 뒤에서 달려 나오며 고함치자, 문지기들은 간이 떨어질 뻔했다. 혹시 묵 승상이 놀라시기라도 하면……, 우리는 다 죽었다!
노련한 묵 승상은 태산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도 비슷하긴 해서, 아라가 튀어나오자 민첩하게 뒤로 물러나서 마차 뒤로 몸을 숨겼다. 상대가 나약한 어린 낭자라는 걸 알아보고는 경계심을 살짝 내려놓은 묵 승상은 앞을 막아선 문지기들, 종복 뒤에 선 아라, 그리고 아라 뒤에서 살려달라고 미친 듯이 외쳐대는 다다를 살폈다.
“승상야, 살려주세요. 귀비 마마가…….”
아라는 문지기들이 일렬로 서서 제 앞을 가로막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다다가 뒤에서 살려달라고 꽥꽥 외쳐대자 그 소리에 도저히 계속 울 수가 없어서 다다를 휙 돌아보며 밀쳤다.
“입 다물어!”
묵 승상은 웃음이 났다. 어디서 온 주인과 종복인지, 시녀는 멍청해 보이고, 어린 낭자도 똑똑해 보이진 않는군.
“승상야, 살려주세요. 귀비 마마가 절 때려죽이려고 해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사왕야가…….”
다다의 입을 닥치게 한 아라는 돌아서서 계속해서 울며 애원했다. 묵 승상이 얼마나 영리한 사람인가, 남들은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만 보고 가을이 온 걸 안다지만 나뭇잎 반만 떨어져도 아는 그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곧바로 완벽하게 깨달았다.
오늘 조회에서 사황자가 탄핵된 일에서 시작된 일이로군. 귀비가 일개 기녀에게 화풀이하다니! 묵 승상은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기녀에게 화풀이한 것도 모자라 그 기녀는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이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니, 자신의 식견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여기엔 왜……. 그렇지, 소칠을 찾아왔겠군.
“칠소야는 저택에 없느냐?”
묵 승상이 문지기에게 묻자, 문지기가 얼른 그렇다고 대답했다.
“중문으로 데리고 가라.”
묵 승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라와 다다는 누가 누구를 민다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밀치며 문지기를 따라 측문으로 들어갔다.
아라는 내심 안도했다. 드디어 들어왔어. 음, 들어온 이상 다시 나가라고 해도 때려죽여도 안 나가!
“아라 소저이지? 말해라. 무슨 일이냐.”
중문 안, 묵 승상은 뒷짐 진 채 말투, 표정 모두 지극히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아라는 그 온화한 모습에 마음이 포근하고도 시큰해졌다. 백관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다니!
“그게…… 육, 육소야가, 귀비 마마께서 절 때려죽인다고 해서요. 제가 사왕야와…… 아니, 사왕야가 저랑…… 저랑…….”
“주가 육소야가 네게 말한 것이냐?”
묵 승상은 수국공부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주 귀비가 아라를 때려죽인대도 직접 손을 쓸 리가 없고 분명 수국공부에 지시했을 것이다. 주가 소육, 감히 그 말을 아라에게 전하고 달아나게 하다니. 아이고, 주가 소육은 우리 소칠보다 더 못 쓰겠구나.
“예. 아니, 영 칠야예요.”
아라는 뜨끔하고는 기가 죽었다. 승상야가 이렇게 다정하고 웃어른처럼 잘해주는데 헛소리할 수는 없었다.
묵 승상이 빙긋이 웃었다. 이 어린 낭자가 어리벙벙은 해도 솔직하군.
“이 일은 나도 알고 있다. 별일 아니니 일단 돌아가라. 영원을 찾아가서, 내가 그랬다고, 하루 숨어 있을 곳을 구해달라고 해라. 이틀이면 된다. 아무 일 없을 것이다.”
묵 승상은 웃는 얼굴로 허리를 살짝 숙이고 아라에게 분부했다.
“하지만…… 저는…….”
아라는 두 손을 비비 꼬기만 했다. 묵 승상 입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봉낭 언니가 그랬는데, 이 말이면 된 걸까? 어지러워서 잘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