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때려죽여라, 때려죽여!
“그야 부인 한마디면 다 될 일이지요.”
오 어멈이 정신을 가다듬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됐네. 그래도 대가아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좋겠어. 어찌 됐든 대가아 거처의 일이니까. 게다가…….”
진 부인은 게다가 고씨의 시녀라는 말을 삼켰다. 대가아가 고씨 편들자고 얼마나 자신에게 대들었던가.
“옳은 말씀이세요. 세자야는 집을 이뤘고, 임무를 받은 몸이니 마땅히 돌아오길 기다려야지요.”
오 어멈은 진 부인이 말하는 대로 따랐다.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이 집안에서 나가야 하는지 생각뿐이었다.
진 부인은 주절주절, 기뻐하다가 또 고민하다가, 또 새 며느리가 들어온 다음의 아름다운 생활을 떠올리다가, 마지막에 묵란에게 돌아가서 몸을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
묵란은 고 이낭의 거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쭈뼛거리며 진 부인의 정원에서 나왔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 나무 아래로 다가가 서서히 쭈그리고 앉았다.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멍하니 넋을 놓았다.
저택에서 나간다고 말할 기회를 찾지 못한 오 어멈도 인사하고 물러나서 얼굴을 구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오 어멈을 본 묵란이 벌떡 일어났다. 묵란은 얼굴을 단단히 구긴 채 혐오를 감추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오 어멈을 빤히 바라보다가 별안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금강석 귀걸이가 놓인 손바닥을 오 어멈 앞으로 높이 치켜들었다.
“어르신, 부탁이에요. 모르는 척해주세요. 절 좀 살려주세요.”
오 어멈은 싸늘한 눈으로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금강석 귀걸이를 들어 올렸다. 샛눈을 뜨고 유심히 살펴보고 흔들어 보다가 곁눈으로 묵란을 힐끔 봤다.
“고 대야가 준 것이냐, 아니면 고 노야가 준 것이냐? 대내내의 물건이지?”
묵란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제가 훔친 거예요. 고가에서요. 고가에서, 이런 걸 줄 사람은 없어요. 고가는…… 상을 내리지 않아요…….”
묵란의 그 말이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오 어멈이 묵란을 바라보는 시선에 연민이 조금 느껴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귀걸이를 품에 찔러넣고 앙상하게 마른 묵란을 살피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공덕 쌓는 셈 치자. 마침 세자야가 저택에 안 계시니 세자야의 씨라고 우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자야도 길어야 두어 달, 아무리 길어도 석 달이면 돌아오신다. 그때는 어쩌려고? 배 속의 그 아이, 아무리 빨라도 연말, 연초는 되어야 낳지 않니?”
묵란은 계속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맞아요! 어르신, 제발 살려주세요!”
“하이고, 방법 하나 알려주마. 하지만 소용 있을지는 네 팔자에 달렸다.”
“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강가 사당, 알지? 사당에 가서 꿇어라. 고 이낭이 네 세자야의 보물이란 걸 온 경성 사람이 다 안다. 고 이낭의 시녀인 네가 이낭을 속이고 세자야와 사통하고 아이까지 뱄다. 고 이낭은 시기 질투 많은 사람이라 너와 네 배 속 아이의 목숨을 없애려고 하겠지. 종친들에게 살려달라고 빌어라. 종친들도 구해주지 않으면, 넌 어차피 못 사니까 그 길로 사당 입구에 머리 박고 죽고 치워라. 혹시 구해주면, 세자야가 돌아오더라도 이 악물고 맞다고 버텨라.”
묵란은 얼떨떨하다가 순간 깨달아서는 기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이왕 이야기한 거, 몇 마디 더 하마. 아이를 낳으면, 몸 풀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면 바로 달아나라. 아이는 강가에 남겨두고. 분명 누군가가 키워주겠지. 넌 강가에 남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도망가라. 그러면 어쩌면 살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오 어멈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걸음을 내디뎠고, 묵란은 그 뒷모습을 향해 또 고개를 조아리다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고 조심조심 각문으로 나가서 강가 사당으로 달려갔다.
단숨에 사당으로 달려 들어간 묵란은 은비녀를 빼서 목에 겨누고 강가 족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강가 족장이 나오자, 묵란은 오 어멈이 말한 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떠듬거리다가, 몇 마디 만에 무수한 고통과 슬픔이 몰려와 읍소하는 그녀의 모습에 종친 노인들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수녕백부는 흐리터분한 곳이라서 저택의 일은 일족뿐 아니라 경성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두어 마디 만에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었다.
강환장이 고 이낭을 위해서 이씨의 지참금을 털어 쓰고 고가 노야와 대야에게 몇십만 냥을 준 데다가 이씨의 혼수를 고 이낭의 거처에 옮겨서 고 이낭의 혼수처럼 쓰게 한 것, 그리고 고 이낭을 안주인처럼 여기고 그녀의 비위를 맞추는 이 모든 일을 일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세자야 시중든 것을 고 이낭에게 알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이를 가진 일은 더더욱 알리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고, 고 이낭이 자기와 배 속 아이를 죽이려 한다는 묵란의 말은 너무나 이치에 맞고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어째서 강환장에게 알리지 않았는지는 묵란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었다. 강환장은 고 이낭을 총애하고 홀딱 빠져서 모든 일을 그녀가 부추기는 대로 하는 걸 종친들이 더 잘 알았다. 수녕백부의 강 백야와 진 부인이 강환장을 전혀 다스리지 못한다는 점도 모두가 인식하는 바였다.
묵란이 어째서 강씨 일족의 사당에 찾아와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는지, 묵란이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알아서 다 나서서 해결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수녕백부에서 고 이낭을 거슬렀다간 살아남을 길이 없어지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곡가와의 혼사, 그리고 사건이 또 터져서 이씨를 첩으로 내리기로 했다는 뜬소문에 안 그래도 화가 치밀어 있었는데 또 이 일까지 터지자, 몇몇 종친들은 수녕백부가 망할 날만 남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가 강가가 망하겠구나!
집으로 돌아온 오 어멈은 식사도 하기 전에 묵란이 강가 사당에 묵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안도했다. 그 안도의 한숨을 미처 다 쉬기도 전에 걱정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떻게 강가에서 빠져나간담?
어질고 현명한 비빈으로서, 주 귀비는 조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궁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다지 관심 두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아들의 잘못을 질타하는 일을 제외하곤.
오늘 조회에서 그녀의 그 효성 지극하고 사리에 밝고 흠잡을 것 하나 없는 작은 아들을 질타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황자가 기녀를 끼고 논다고 탄핵당한 것이다.
주 귀비는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웬 불여우냐? 그 천한 것! 알아봐라! 어서 가서 똑똑히 알아봐! 웬 천것이 사가아를 꼬드긴 것이냐? 누가 사가아를 물들인 것이냐? 알아봐라!”
얼마나 간단한 일인지 눈 깜빡할 사이에 알아낸 것은, 경성에 반년 전부터 막 이름나기 시작한 기녀, 아라라는 아이였다.
주 귀비가 탁자를 내리치고 잔을 몇 개나 깨부수면서 매섭게 내시에게 분부했다.
“수국공부에 다녀오너라. 가서…… 이 일은 어르신에게 말씀드려야 할 일이다. 가서 노부인에게 말씀드려라. 내가 그랬다고, 무슨 향루에 아라라는 천것을 때려죽이라고 해라! 즉시! 천것! 사가아 같은 착한 아이를, 다 그 천것이 부추겨서 물든 것이다! 노부인께 말씀드려라. 얼른 사람을 보내 장을 쳐서 때려죽이라고 해라. 때려죽여라!”
내시는 연신 대답하고는 꽁무니 빠져라 출궁해서 수국공부로 직행해서는 조 노부인에게 주 귀비의 말을 전했다. 조 노부인도 이야기를 듣고 나서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라라니, 어째서 이리 귀에 익지? 웬 천것이냐? 감히 사가아를 꼬드겨? 세자는? 세자를 불러라! 어서 불러!”
주유해는 대황자에게 가서 저택에 없었고, 어멈, 시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 다녔다. 수국공은 저택에 없고, 주 사야도 관아에 있을 시간이었다. 허둥대며 찾아다닌 끝에 경부 관아로 구경하러 갈 준비하던 주 육소야, 주유민만 겨우 찾았다.
조 노부인이 당장 아라를 때려죽이라고 명하는 걸 들은 주 육소야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조 노부인을 바라봤다. 물을 마시다가 목이 막혀서 펄쩍펄쩍 뛰면서 빙빙 돌며 콜록거린 끝에 겨우 숨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할머님! 대체 누, 누가 아라라고 하던가요? 아라와 무슨 상관입니까? 할머님이 아라는 어떻게 아시고…….”
“내 새끼, 진정 좀 해라. 목이 막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너도 이제 다 컸는데 침착하고 신중해져야지!”
주 육소야가 목이 막혀 콜록거리는 모습에 조 노부인은 애가 탔다. 쓰다듬고, 문지르고, 우선 한바탕 위로부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이야기했다.
“누구긴 누구겠느냐. 네 고모다! 조금 전에 전언이 왔는데 곧바로 때려죽이라더구나. 아이고! 요즘 세상에 천것들이 갈수록 날뛰는구나. 사가아까지 꼬드기다니. 목숨이 아깝지도 않다더냐!”
“할머님, 이 일은…… 이건, 이건! 아라가 꼬드긴 게 아닙니다.”
“응? 그럼 누구냐? 네 고모가 잘못 안 것이냐? 아라가 아니면 누가 사가아를 꼬드긴 것이냐?”
주 육소야는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달싹였다. 이런 걸 어떻게 할머님에게 해명하나.
“할머님, 아라가 꼬드긴 게 아니라는 말은, 할머님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제 말은…… 다른 의미입니다…….”
주 육소야가 양손을 휘두르며 하는 말에 조 노부인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똑똑히 말해라. 어떻게 된 일이냐? 똑똑히 말해!”
“예. 아이고! 이건요……. 할머님,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아라 탓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 겁니다!”
주 육소야가 앓는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사왕야가 아라를 보고 마음에 들어한 겁니다. 저번에, 그러니까 사왕야의 문회에서요. 아라도 교방에 이름을 올린 기녀라 사왕야가 문회를 여시니 당연히 갔지요. 사왕야가 그 자리에서 반했습니다. 그 뭐냐, 할머님도 아시잖습니까. 사왕야가 분부했으니, 그렇지요? 제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아라를 데리고 갔지요. 사왕야가 아라를 점찍은 겁니다!”
주 육소야는 사왕야가 점찍었다는 말에 힘을 주었고, 조 노부인도 곧바로 알아들었다.
“이 녀석이! 너였구나! 이 철딱서니 없는 녀석! 어떻게 사가아를 데리고 그런 짓을! 너 혼자 허튼짓하는 건 몰라도, 사가아가 너처럼 허튼짓해서 되겠느냐! 이 녀석이 정말, 갈수록 철이 없구나!”
“할머님, 진짜 제 탓이 아닙니다. 아라 탓도 아니고요. 사왕야입니다! 다 사왕야라고요! 사왕야가 말을 꺼냈는데, 들어야지 어쩝니까?”
할머님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는 주육은 울상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고! 탓하지 말라니! 어찌 탓하지 않을 수가 있어! 그래, 어리석은 네가 뭘 알겠느냐. 그 무슨 아라라는 것이 작정하지 않았다면 사가아 눈에 그런 것이 들 리가 있어? 사가아가 얼마나 훌륭한 아이냐. 그 무슨 라가 뭐라고. 네가 착해서 그런다. 그 라, 홍등가에서 굴러먹던 것을 너 같은 공자가 어찌 꿰뚫어 본다고. 수작을 부려도 너는 몰라 본다! 할미 말 들어라, 그런 기녀들은 하나같이 맞아 죽어야 마땅하다! 억울할 것 하나 없어!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라를 잡아 와라. 아니면 관아에 끌고 가도 된다. 아무 핑계나 대고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라!”
주육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정말로 때려죽이라고요?”
“그럼 가짜겠느냐? 네 고모의 분부다! 어서 가라! 넌 올곧은 아이니, 그것을 잡으면 네 아비에게 말해서 관아에 말을 넣으라고 해라. 네 고모가 입을 연 이상 때려죽여야지. 어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