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의리가 넘치는 호 노야
“그럼 혼약은? 그건 뭐라고 하셔?”
그것이야말로 곡 대낭자가 가장 신경 쓰는 일이었다.
“다른 집 종복이 그런 말을 어찌 묻겠어요.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대낭자, 안심하세요. 예전에 제가 노야를 모실 때부터 호 노야를 잘 알고 지냈습니다. 첫째, 호 노야는 우리 노야와 가장 가까운 분이고요, 둘째, 호 노야는 의리도 있고 능력도 있답니다. 대낭자는 호 노야의 양녀잖아요. 호 노야가 대낭자를 돕지 않으면 누굴 돕겠습니까?”
가씨의 말에 곡 대낭자는 살짝 마음이 놓였다.
“대낭자가 경성에 오면 호 노야 댁에서 묵으라고 하셨습니다.”
가씨가 곡 대낭자를 흘끔 보며 하는 말에 곡 대낭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처자의 몸으로 홀로 밖에 사는 건 확실히 좋지 않아.
“곡 거인의 가족이십니까?”
밖에서 쩌렁쩌렁하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곡 대낭자는 가씨를 바라봤고, 가씨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호 노야가 보낸 사람이 마중 온 모양입니다! 제가 나가 볼게요.”
가씨가 휘장을 젖히고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신가요?”
곡 대낭자의 마차가 오진(五進) 정원이 딸린 대저택 앞에 멈춰 섰을 때, 호 노야는 이미 목을 빼고 오매불망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곡 대낭자를 보자마자 호 노야가 눈물을 철철 흘렸다.
“딸아! 난 네 아버지를 본 줄 알았구나. 네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네 아버지와……. 곡 형! 마음이 너무 아프네!”
호 노야는 가슴을 두드리며 기뻐했다가 슬퍼했다가, 여간 떠들썩한 것이 아니었다. 가씨도 덩달아 눈물을 훔치며 옛이야기를 했다. 곡 대낭자는 감동이야 없었지만 호 노야가 자기를 대하는 모습에 마음 놓고 안도했다.
곡 대낭자를 안으로 모신 시녀, 어멈들은 우선 소세 시중을 들고, 물 흐르듯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호 노야는 곡 대낭자를 아끼는 마음을 표현해도 해도 부족한 듯이 간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도 쉴 새 없이 분부했다.
“은사강당(銀絲姜糖: 생강 사탕)은 왜 없느냐? 어서 사 와라. 그리고 율자고(栗子糕: 밤떡)도! 얼른 사 오지 않고 무얼 하느냐? 대낭자의 의복과 장신구는? 치수를 몰라? 쓸모없는 것들! 그럼 지금이라도 가라! 힐수방에 가라! 즉시 가라! 돈이 얼마나 들든, 은자는 상관없다! 대낭자가 경성에 막 들어왔으니 모든 것을 새로 준비해야 한다! 얼른 가라! 있는 대로 다 가지고 와라! 얼른, 얼른!”
곡 대낭자는 은자는 얼마가 되든 상관없다는 말에 조금은 감동했다. 보아하니 이 호 노야라는 사람은 진심인 듯했다.
차와 다과를 드디어 다 갖추고, 또 거처를 정해주고 의복, 장신구를 채워주는 등 각종 잡다한 일을 마무리한 후, 호 노야가 드디어 자리에 앉아 곡 대낭자와 함께 그녀 아버지의 과거, 그와 그녀 아버지의 친분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곡 대낭자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채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건 전혀 관심 없었다. 지금 그녀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혼사였다. 그녀의 지아비가 이미 성혼한 큰일이 문제였다. 호 노야가 그녀를 위해 나서줄지, 그것만 신경 쓰였다.
곡 대낭자의 눈짓을 받은 가씨가 틈을 보고 웃으며 말을 꺼냈다.
“호 노야, 예전에 우리 노야와 강가 노야가 혼약을 맺은 일, 기억하시는지요?”
“물론이지! 왜? 그 혼서?”
호 노야가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때? 곡 형이 혼서를 집으로 보낸 겐가? 그 당시 곡 형은 직접 고향으로 돌아가서 딸을 데리고 경성으로 오겠다고 했는걸. 혼서를 받았으면서 왜 경성으로 오지 않은 것이냐?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곡 대낭자는 가씨에게 눈짓하고는 훌쩍대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찍었다. 가씨는 예전에 그녀와 지아비가 남양에 간 일, 돌아온 일, 노야의 유품을 가지고 태평부로 돌아간 일, 곡 대낭자가 그때야 부친이 혼처를 정해준 것을 알게 된 일, 그래서 부랴부랴 경성으로 들어오게 된 모든 사정을 줄줄 읊었다.
호 노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 곡 형은 정말 고상한 사람이지. 강 형과 똑같아. 아도물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아. 자네 부부를 남양으로 보낸 것도 다 대낭자의 혼수 때문이었겠지. 아이고! 가련한 곡 형! 그런데 강가가 이미 혼인을 맺었으니…….”
“나와 그 사람의 혼약이 먼저예요!”
곡 대낭자가 다급하게 하는 말에 호 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물론이지! 맞는 말이다! 곡 형이 세상에 없으니, 내가 나서야지! 절대로 네가 핍박받는 꼴은 못 본다! 안심해라. 다만.”
호 노야가 잠시 말을 멈췄다. 곡 대낭자는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숨을 죽이고 호 노야를 빤히 바라봤다. 이어지는 말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말일까 봐 두려웠다.
“이건 꼼꼼히 계획해야 할 일이다. 우선, 내가 강 형을 찾아가 의중을 떠봐야겠다. 순순히 이 혼인을 인정하고 이가와의 혼인을 무른 다음 정식으로 너를 맞이하면 제일 좋겠지. 행여라도……. 흥!”
호 노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싸늘하게 웃었다.
“대낭자, 안심해라. 강가는 나를 만만히 대하진 못한다! 싫어도 받아들이게 할 것이야!”
“고마워요, 아저씨!”
곡 대낭자는 크게 안도하고 바닥에 엎드려서 절을 올렸다. 아버지의 벗, 너무 좋은 분이셔. 강 아저씨도 이렇게 좋은 분이시길!
이동과 이신은 진하 부두에서 나와서 경성과 자등 산장의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이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동과 상의했다.
“난 바로 경성으로 가마. 예부를 건드려야 할 일이다. 여 승상이 긴 세월 예부에 계셨으니, 여 대랑을 만나보겠다. 기회를 봐서 이야기를 떠봐야겠어. 예부가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한번 알아보마.”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 승상과 외할머니의 과거를 떠올렸다. 여 승상 쪽은 일이 시작된 다음에 알게 되는 게 좋을 것이다.
이신은 영해 일행을 데리고 경성으로 향했고, 이동은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수련이 수시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오늘 일이 매우 기괴했다. 어디가 잘못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어도 다 이상하기만 했다.
마차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수련이 다급하게 머리를 내밀었다가 금세 다시 들어와 고했다.
“낭자, 만 어멈이 할 말이 있대요.”
“응.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어. 올라오라고 하고, 넌 뒤에 마차를 타고 와.”
이동이 수련에게 분부했다.
마차에 오른 만 어멈이 대뜸 하는 첫마디는 곡 대낭자가 별로라는 얘기였다.
“그 낭자, 별로던데요! 낭자가 잘 살펴보라고 해서 지켜봤는데, 그 낭자가 대체 누굽니까?”
“그 낭자는 곡 낭자야. 강가 노야와 친분 깊은 곡 거인의 외동딸.”
이동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 일의 진위는, 그녀도 진짜로 여기기로 했다.
경험 많고 노련한 능구렁이 만 어멈은 듣자마자 이상한 걸 깨달았다.
“예? 그 강 노야에게 갑자기 절친한 벗이 생기더니, 이번엔 그 절친한 벗의 외동딸이요? 이게…….”
“세상엔 원래 묘한 일이 많아. 놀랄 게 뭐가 있어. 그 곡 낭자, 강환장과 오래전에 정혼한 사람이야.”
만 어멈은 튀어 오를 뻔했다.
“뭐라고요? 어찌 이런 우연이……. 아이고 어머니, 낭자! 세상에 원래 묘한 일이 많지요, 암요!”
만 어멈은 놀라서 고함치다 말고 태도가 백팔십도 변했다. 어찌나 자연스럽게 바뀌는지.
“이 일은…… 아이고! 낭자, 낭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저를 부르신 이유가……?”
만 어멈이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면서도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부른 이유는 말이지…….”
이동도 웃었다. 그러고는 곡 거인과 호 노야가 어떻게 강가 노야와 만났는지, 어떻게 사귀었는지, 어떻게 친분이 깊어졌는지, 그리고 호 노야가 어떻게 곡 거인의 딸, 강 노야의 아들 중매를 섰는지, 혼서는 어떻게 썼는지, 곡 거인은 어떻게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지, 호 노야는 왜 고향으로 돌아갔는지, 강가는 어쩌다가 곡가와 소식이 끊겼는지, 나중엔 또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히 말해 주었다.
만 어멈은 눈썹을 휘날리며 들었다.
“이건 정말……. 세상엔 묘한 일이 참 많군요! 보세요, 얼마나 공교로운 일인가요. 문 이야인가요?”
만 어멈이 바짝 다가가며 마지막 말을 물었다.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낮게 속삭였다. 문 이야, 처음 볼 때부터 평범하지 않은 걸 내 알았지!
“문 이야가 다한 건 아니야.”
이동은 대답하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곡 대낭자가 태평부 비구니 암자에 어미를 버린 일, 그리고 오는 길에 어릴 때부터 시중든 어멈을 죽인 일도 나직이 말해 주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두라고 어멈에게도 말해 주는 거야.”
만 어멈은 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이건 정말……. 그 낭자, 정말이지! 쯧! 잘 됐군요. 강가는 보살을 내보내고 야차를 들이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신경 쓸 것 없어. 강가 노야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이런 일로 당하진 않을 거야. 하물며 강가가 정말 이 혼사를 인정하려면,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혼수를 돌려줘야 하잖아. 돌려줄 능력이 없어. 그러다 보면 관아까지 나서야 할 거야.”
“그럼 우리도 잘 준비해야겠군요!”
만 어멈이 눈빛을 빛냈다.
“추미에게 소식을 전해. 정말로 관아까지 나서게 되면, 추미더러 증언하라고 해. 저택에서 그 혼사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다고.”
“예!”
“그리고 우리가 강가에서 벗어날 때, 추미도 원하면 강가에서 데리고 나와주겠다고 해. 돌아와서, 내 곁에 있을 건지, 다른 계획이 있는지, 다 뜻대로 해줄 거라고 하고.”
이동은 분부하고 만 어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만 어멈도 대충 알았다.
“그럼 춘연은요?”
“춘연, 하섬, 동유, 그 아이들이 원한다면 다 데리고 와. 우리 사람은, 본인이 원하면 모두 데리고 돌아와.”
“오 어멈은 어떻게 할까요?”
만 어멈이 넌지시 상기시키자, 이동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오 어멈은 진 부인을 평생 모신 사람이야. 결정하기 어려울 거야. 일단 이 일을 알리고, 내가 강가에서 벗어나는 날, 장원과 점포 하나씩 주겠다고 해. 자네가 장원과 점포 몇 곳을 먼저 골라서 오 어멈에게 고르라고 해.”
“예! 서둘러야지 미룰 일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성에 들어가겠습니다. 이 일은 제가 직접 가서 처리해야겠어요.”
만 어멈은 투지를 불태우며 마차에서 내려서 시녀들을 한 마차에 몰아넣고 다급하게 경성으로 달려갔다.
강남 태평부. 포정사 관아 후원, 동민은 느긋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며 두 가지 큰일을 고민했다. 첫째, 강 흠차에게 무슨 선물을 준비하느냐. 강 흠차는 고상한 것을 가장 아낀다는데, 은자만 주는 건 너무 저속했다. 우아한 물건이 있어야 했다. 둘째, 좌 선생에 버금가는 막료를 어디에서 찾아오느냐.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종복이 대뜸 들어오는 바람에 동민은 놀라서 찻물을 엎었다.
“법도를 몰라!”
동민이 버럭 고함치자, 종복이 한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떠듬떠듬했다.
“노, 노, 노, 노, 노야. 나, 난리 났습니다! 흐, 흠차가 문을, 문을 봉쇄했습니다!”
“뭐라고? 제대로 말해라! 어서! 무슨 일이라고?”
동민은 축축해진 손을 거들떠볼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흠, 흠, 흠, 흠차! 흠차! 흠차가 좌 선생의 거처를 뒤집어엎고 우리 대문을 봉쇄했습니다. 싹 뒤집어엎겠답니다!”
종복은 놀라고 겁에 질려서 얼굴이 누렇게 떴다. 동민은 찻잔을 바닥에 내던지고 종복을 밀치고 빠른 걸음으로 뛰쳐나갔다.
중문 안, 강환장은 뒷짐 지고 느긋한 얼굴로 서 있다가 동민이 뛰쳐나오자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동 사사, 이리 와서 보시지요. 지금 막료 좌 선생 거처에서 찾아낸 물건입니다. 모두 은표 4만 6천 7백여 냥이 부족합니다.”
동민의 뺨이 실룩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좌 선생의 거처를 뒤집어 놓고 내 문은 왜 막은 것이오?”
“제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은자가 부족합니다! 미안합니다만, 동 사사의 저택도 이 흠차가 살펴봐야겠습니다! 어쩌면 부족한 은자가 나오겠지요! 여봐라! 샅샅이 뒤져라!”
강환장의 기세는 동민보다 거셌다. 동민은 화도 나고 두렵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막으러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짐승 같은 호위, 아전들이 제 저택으로 뛰쳐 들어가서 뒤집어엎느라 우는 소리와 비명이 하늘을 찌르는 아수라장을 눈 뜨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