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검은 손
마지막 말을 하는 축 대야의 얼굴은 사람 잡아먹을 듯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탕 칠야가 얼른 일어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 같은 축씨 아닙니까. 대랑이 성격이 급해서 이럽니다. 나와 대랑이 경성에서 달려오느라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왔습니다. 뭐 하러 이런 고생을 했겠습니까. 다 여러분을 위해서 아닙니까. 대랑이 오는 내내 지쳐서 화가 나서 이럽니다. 다 가족인데, 말로 찬찬히 하십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다 가족 아닌가.”
축 노태야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태평부 축가, 경성 축가, 산서 축가 모두 한 가족이다. 가족이기만 하면 기회는 있다.
“이렇게 하세. 대랑, 일단 가서 쉬게. 푹 자고 일어나서, 내일 다시 이야기하세.”
축 노태야가 웃음 띤 얼굴로 말하면서 축청정을 향해 얼른 사과하고 물러서라고 눈짓했다.
“제가 나이가 어려 철없이 굴었습니다. 못 할 말을 한 점, 백부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축청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깊이 장읍하며 지극히 간곡하게 예를 갖췄다.
어찌 됐든 한 걸음 위로 올라가려면 경성 축가, 혹은 고 사사의 지지가 필요했다. 지지해 주진 않더라도 적어도 고 사사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었다. 고 사사의 심기를 거스르면 경성 축가를 거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까 너무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굴었다.
축청정이 핏대를 세우며 대드는 모습에 축가 대야는 오히려 성질이 좀 죽었다. 그는 싸늘하게 코웃음 치고는 축 노태야를 향해 공수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축 대야와 탕 칠야를 배웅한 축 노태야는 축청정을 불러 혼낸 다음 또 한참을 당부했다. 그리고 얼른 돌아가서 쉬라고 사람들에게 분부했다. 내일 다시 경성 축가와 탕가와 차분히 이야기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성 축가와 다시 가족이 되어야 했다.
거처로 돌아온 축청정은 소세하고 누워서 눈을 감고 책을 외웠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다시 눈을 뜨고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참만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감고 계속 책을 외웠다. 그렇게 새벽까지 시달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때 방 구석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검은 옷을 휘감은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더니 축청정의 침상 머리맡에 섰다. 고개를 숙인 채 축청정을 잠시 들여다보던 그림자가 가는 끈을 꺼내서 노련하고 재빠르게 축청정의 목에 끼우고 힘껏 뒤로 당겼다. 축청정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검은 옷은 끈과 함께 축청정을 어깨에 둘러메고 밖으로 나갔다. 뜨락 중간 석류나무에 그를 매달고 다리를 툭툭 치고는 돌아서서 훌쩍 사라졌다.
하늘이 어렴풋이 밝았을 때, 문 이야는 기상하자마자 축청정이 석류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닦던 문 이야는 멍해졌다가 계속해서 천천히 이를 닦고 입을 헹군 후 소식을 전한 공대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백인유아이사(伯仁由我而死), 내가 죽인 것은 아니지만 나 때문에 죽었구나.”
(※백인이 나로 말미암아 죽다. 백인을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커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말. 동진의 왕도王導가 한 말.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았지만 책임이 있을 때 비유하는 말)
“축가 그놈이 스스로 목을 조른 것 같지 않습니다. 높은 벼슬에 올라 재물을 벌 생각밖에 없던 사람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경성에서 온 축 대야 짓일까요?”
공대가 자기의 판단을 이야기하자, 문 이야가 고개를 저었다.
“축가와 탕가가 태평부에 온 이유는 첫째, 뒤처리를 위해서, 둘째, 축가라고 사칭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다. 사칭한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축청정을 죽이겠느냐. 그자가 아니라…….”
문 이야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축청정이 나를 만났으니, 나를 위해서 그를 죽인 것이다. 휴. 멀리 보낼 생각이었는데.”
“죽이는 게 낫지요. 멀리 보내요? 어떻게요? 제가 알아서 달아나지 않으면 마땅히 죽여야 할 항보량은 나리가 멀리 보내지 않아도 알아서 달아나겠지만, 축가 놈들은 하나같이 벼슬자리에 올라서 돈 벌 생각뿐입니다. 나리가 보내준다고 해도 떠나지 않으려고 할걸요!”
공대는 문 이야를 보호하려고 축청정을 죽인 거라는 말을 듣고 태도가 순간 변했다.
“이야는 큰일 할 분입니다. 우물쭈물하지 마십시오. 나리 탓이 아닙니다. 그냥 죽은 겁니다.”
문 이야는 공대를 상대하지 않고 뒷짐 진 채 창가에 서서 한참만에 또 한숨을 내쉬었다.
“성밖에 다녀오너라. 사찰을 골라서 며칠 동안 법사를 열어 주어라.”
공대가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그러지요. 돈 좀 써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야, 이야의 마음이 편해지기만 하면 됩니다.”
자등 산장, 사람들이 모두 깊은 잠이 든 시각, 수련은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며 모든 곳이 제대로 된 걸 보면서 밤샘하는 어멈과 시녀들에게 몇 마디 당부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뒤통수에 서늘한 바람이 불길래 휙 돌아봤더니, 위봉낭이 저쪽에서 다가와 그녀를 지나쳤다.
수련은 저벅저벅 동쪽 상방 내실 쪽으로 들어가는 위봉낭을 그제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들어왔지? 조금 전에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수련이 정신 차렸을 때, 위봉낭은 벌써 동쪽 상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동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침상에 기대서 책을 읽다가 기척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위봉낭이 그녀를 향해 공수했다.
“이 낭자, 우리 칠야가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답니다.”
이동은 책을 내려놓고 수련에게 눈짓했다.
“다른 사람은 깨지 않게 해. 옷을 가지고 오고.”
이동이 머리를 말아 올리며 분부하자 그동안 위봉낭을 몇 번 만났던 수련은 적어도 도둑 잡으라고 크게 외치진 않고 서둘러 다가가 옷 시중을 들었다. 은남색 치마, 월백 겹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말아 올리는 동안 이동이 위봉낭에게 분부했다.
“가서 칠야에게…….”
“지금 후원 화청에서 기다리고 계시는걸요.”
위봉낭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이동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이동은 그녀를 힐끔 보고 아무런 말 없이 수련이 머리를 올려주길 기다렸다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밖에 바람이 붑니다. 두봉을 걸치세요.”
위봉낭이 밖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이동은 걸음을 멈추었고 수련은 화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너무 없어서 놓쳤잖아!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받다니!
수련은 허둥지둥 두꺼운 은남색 두봉을 꺼내왔다. 두봉을 여민 이동은 수련에게 나올 것 없다고 분부하고 위봉낭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후화원 화청 문 앞, 감청색 두봉을 걸친 영원이 뒷짐을 지고 하늘의 조각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화원은 달구경 하기에 매우 좋았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영원은 월동문 쪽을 돌아봤다.
이동이 두꺼운 두봉을 걸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가는데, 위봉낭은 영원을 보자마자 어디로 간 건지 사라졌다. 이동은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영원을 향해 걸어갔다.
말아 올린 새카만 머리카락, 단단히 여민 은남색 두봉, 두봉 아래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은남색 치맛자락, 가볍고 얇은 비단신까지, 영원은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이동은 영원이 훑어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청 입구로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며 곧바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 올라와서 이야기합시다.”
영원은 이슬에 촉촉이 젖은 이동의 신발을 바라봤다. 이동은 영원의 시선을 따라 반쯤 젖은 자기 신발을 내려다봤다. 실내에서 신는 얇은 비단신이었다. 갈아 신는 걸 깜빡했다.
영원이 찾아왔다는 말에 그녀는 강가에서 벗어나는 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고, 너무 들뜨고 급해졌다.
이동은 계단 위로 올라가 영원과 좌우로 화청 입구에 서서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별일은 아닙니다. 수녕백에게 십여 년 동안 알고 지낸 좋은 벗이 생겼습니다. 곡씨라고.”
이동을 바라보는 영원의 시선이 결국 다시 반쯤 젖은 그녀의 신발로 힐끔 향했다.
“오라버니에게 들었어요.”
이동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역시 그 일로 온 거였어.
이동의 빛나는 눈빛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영원이 싱긋 웃었다.
“좋은 일이라는 걸 어찌 압니까? 나쁜 일일지도 모르는걸. 이렇게 나를 믿습니까? 하긴, 나 영원이 하는 일이…….”
영원이 뿌듯한 듯 손에 쥔 채찍을 흔들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이동은 영원의 자화자찬을 자르고 다시 물었다.
“신발이 젖었군요. 밑창이 너무 얇습니다.”
영원이 별안간 채찍으로 이동의 발 쪽을 가리키며 화제를 확 바꿨다.
“화청 바닥이 꽤 서늘합니다. 자, 이걸 밟아요.”
영원이 채찍을 거두고는 제 두봉을 벗어서 바닥에 깔았다. 단숨에 이어진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이동은 눈이 다 아른거려서 말릴 새도 없었다.
“휴, 얼른 할 말을 하고…….”
“한마디가 아니라, 할 말이 많습니다. 아프기라도 하면 괜히 내가 온 탓이 되잖습니까.”
영원이 바닥에 놓인 두봉을 가리켰다.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발 앞에 놓인 두봉을 바라보다가 올라섰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하세요.”
영원이 소리 내서 웃었다.
“이 낭자, 참…… 대범하군요! 곡 거인에게 외동딸이 하나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수녕백 강화원과 그녀 아비가 친필로 쓴 혼서를 들고 경성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에 진하 부두에 도착하는데, 가서 보시겠습니까? 가겠다면 내가 준비…….”
“됐어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오라버니와 함께 갈 거예요.”
이동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뭐가! 잠깐! 아직 볼 일이 남았어요!”
영원이 부르자, 돌아서서 가려던 이동이 그를 돌아봤다.
“몇 가지, 낭자가 아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곡 대낭자에겐 어미가 있는데 눈이 멀었습니다. 몸도 좋지 않고. 곡 대낭자는 어미가 여행길을 견디지 못해서 일정이 지체되거나, 혹여 죽어서 일을 지체할까 봐 아예 태평부 성 밖 비구니 암자에 내버리고 왔습니다.”
영원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멈 하나, 시녀 하나, 둘 다 자기가 데리고 가고 어미에겐 아무도 남겨주지 않았지요. 문도가 3천여 냥을 줬는데, 어미에겐 딱 두 냥을 주었습니다. 어미는 조금밖에 안 먹어서 많이 남겨주어도 다 쓰지 못한다고요.”
이동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들었다. 영원은 조금 분노한 모습이었다.
“이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영원은 곡 대낭자가 직접 왕 어멈을 죽인 일을 이야기했고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이동의 그런 모습에 영원은 그제야 흡족해져서 꽤 뿌듯한 모습으로 채찍을 흔들었다.
“곡 대낭자, 어리석긴 한데, 악랄하고 독한 것이 장점입니다. 이런 장점으로 수녕백부를 깔끔하게 수습할 테니까요. 그럼 우리도 수녕백부에 미안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동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순간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내가 고른 사람이 아닙니다. 문도가 고르고 고른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로 놀랐다고요! 문도가 고른 사람입니다!”
이동은 정색하면서 해명하는 영원을 웃는 듯 마는 듯 바라보다가 두봉에서 내려와서 돌아섰다.
영원은 손을 들고 ‘저기!’ 하고 부르려다가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다 했다.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 모두 다 해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동의 뒷모습이 월동문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던 영원은 뜬금없이 한숨이 나왔다. 그는 허리를 숙여 두봉을 들어 올려 탈탈 털고 휙 걸치고는 끈을 여미면서 달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화원에 비친 달빛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느릿느릿 담장으로 다가가 높낮이가 다른 여장(女牆)을 올려다봤다.
(※여장女牆: 담 위에 낮게 덧쌓은 낮은 담. 보통 요철 모양이어서 몸을 숨기거나 담 밖의 상대를 공격하기도 한다.)
갑자기 이대로 담을 넘어 나가는 것이 매우 분위기를 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돌아서서 담을 따라 각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라고 발끝으로 문을 걷어차는 소리에 유월이 허둥지둥 자물쇠를 땄다. 자물쇠를 따긴 했는데, 다시 채울 수가 없었다.
에고, 칠야가 매번 담을 넘어 들어갔다가 넘어서 나오셔서 자물쇠는 준비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무슨 문제가 생겨서 굳이 문으로 나가시려는 걸까. 준비하지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