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94화 (194/463)

194화: 심부름

방향도 모르고 무턱대고 단풍 숲을 뛰쳐나와서 호수를 마주하는 순간, 물기를 머금은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계소영은 혼돈에서 깨어나 뒤를 돌아봤다. 나무에 가려 정자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아도 그녀가 이미 자리를 떴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계소영은 서서히 돌아서서 물결이 찰랑이는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몰아쉬고 내쉬고, 모든 것을 자기가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을 때야 걸음을 내디뎌 호숫가로 걸어가 구곡교를 따라 호수 중앙의 수각으로 들어갔다.

수각 가장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즐겁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때 생각했었다. 주 귀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고모의 비극과 처참한 죽음이 없었을까? 그 모든 것이 주 귀비의 잘못이었을까?

나라를 망친 것이 정말로 그 화근들, 간신들, 소인배들이었을까? 생각한 적은 있지만, 한 번도 깊이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하는 게 두려웠다. 자신은 나약한 필부니까.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이치에 얽매인 나약한 인간이니까.

자신은 어릴 때부터 성현의 서책에 속박되어서 옳고 그름도 가릴 줄 모르게 되었다. 자신은 그녀보다 못했다.

계소영은 뒷걸음질 쳐 기둥에 기댔다. 이렇게 식견이 탁월하고 세속을 초월한 여인이 이미 혼인해서 강가에 들어갔다. 강환장 같은 저속한 무지렁이와 혼인했다. 이 세상, 이 천하에 공정함이 있는 건가.

곡 대낭자의 배는 곡 대낭자의 재촉 아래, 해가 밝기 전에 출발하고 해가 완전히 저문 후에야 정박하고 쉬었다.

가 어멈은 곡 대낭자의 말을 조금도 거역하지 않았다. 곡 대낭자가 하나를 분부하면 가 어멈은 열을 했다. 열을 해내고도 계속 자책했다. ‘소인 이제 늙었습니다. 대낭자의 분부를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하다니. 예전이었다면, 경성 명문가였다면, 이래선 절대로 안 되지요.’

그 말은, 곡 대낭자가 하나를 분부하면 종복들은 적어도 백은 해야 가까스로 봐줄 만하다는 의미였다.

소쇄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소쇄는 접어두고, 왕 어멈은 가 어멈과 비교할 가치도 없었다. 가 어멈이 자주 이야기하는 경성 명문가 종북과도 비교할 필요가 더더욱 없었다. 곡 대낭자는 왕 어멈이 나날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소쇄는 뱃멀미가 심해서 일어나지 못했고, 왕 어멈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가 어멈 혼자로는 부족했다. 설령 충분하더라도 가 어멈 말에 따르면, 명문가 법도에 낭자 곁에 어멈 하나가 시중드는 법은 없다고 했다.

태평부에 도착하자, 가 어멈은 곡 대낭자의 허락하에 곡 대낭자를 시중들 시녀 둘을 사 왔다. 곡 대낭자는 두 시녀에게 하나는 옥연, 하나는 단청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옥연과 단청이 대낭자 시중을 들게 되자, 가 어멈은 신경 쓸 일이 한결 줄어들게 되었다. 곡 대낭자는 옥연과 단청의 시중을 받으며 갈수록 명문가 낭자의 호강이 무엇인지, 명문가 부인의 관록이 무엇인지 깨달아갔다.

밤낮없이 달린 끝에, 경성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날이 저물고 배를 정박한 후, 뭍으로 물건을 사러 다녀온 표두가 돌아와서 은밀하게 가씨를 찾아왔다.

“곡 낭자의 그분이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군. 곧 유양 부두에 정박할 듯하다네. 곡 낭자가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하라고 나리가 분부하셨네.”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데?”

가씨가 선실을 향해 입을 비죽이며 묻자, 표두가 싱긋 웃었다.

“마음 놓게. 뛰어난 인품에 용모도 훤칠해. 분명 첫눈에 반할 거네.”

그 말에 가씨도 웃었다.

“그럼 된 거지! 따지고 보면 저 낭자도 복 받은 거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길래.”

“잔말이 뭐 그리 많아? 임무 할 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임무를 망치면 어쩌려고. 장난이 아니라고! 우린 내일 점심 때쯤 유양 부두에 도착하네. 유양 부두에 정박하면 그다음 날 아침에 떠나세. 일은 내가 준비할 테니, 부두에 도착하면 자네가 곡 낭자를 데리고 가서 얼굴을 보이게. 어떻게 데리고 나가는지는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건 걱정하지 말고.”

가씨가 자신만만하게 장담했다. 이번 임무는 의외일 정도로 순조로웠다. 첫째는 조력자가 하나같이 유능했고, 둘째는 저 낭자가 참말이지 어리석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어쨌든 이번 일에 얻는 게 많으니, 멍청하지 않더라도 시치미를 떼야 했다.

경성 연향루, 아라는 구리 거울을 바라보면서 꼼꼼히 입술연지를 발랐다. 너무 붉은 것 같아서 살짝 지웠더니 또 너무 옅은 것 같아서 다시 덧발랐다.

어째서 또 너무 붉은 것 같지?

아라는 조금 다급해졌다.

“다다, 내 입술 좀 봐봐. 너무 붉지 않니? 오늘 연지가 왜 이리 이상하지? 너무 붉지 않으면 너무 연해!”

다다가 얼굴을 들이밀고 살펴봤다.

“소저, 난 괜찮은 것 같은데요? 소저는 예뻐서, 진해도 예쁘고, 연해도 예쁜걸요!”

“쓸모 있는 이야기 좀 하면 안 되니? 됐다, 됐어. 네가 뭘 알겠어. 행수 어른은? 행수 어른을 모셔와. 이 연지 좀 봐달라고 해. 그리고 옷도. 옷이 너무 소박한 것 같아.”

아라가 옷까지 타박하자, 다다는 입을 비죽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지도 않고 창가로 가서 머리를 내밀고 심부름꾼을 불렀다.

“아삼! 행수 어르신은? 올라오시라고 전해. 소저가 중요한 일이 있대!”

아라는 행수기녀를 부르라고 해놓고는, 행수기녀의 태도가 진지하지 않네, 나이가 많아서 안목이 못 쓰네, 타박했다. 마차가 문 앞에 멈추고, 심부름꾼이 계속해서 재촉할 때까지 난리를 부리다가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와중에 두봉을 골라 걸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며칠 전 사황자가 추시 합격자를 위한 연회를 열 때, 주 육소야가 식언하지 않고 정말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게다가 정말로 사황자 앞에 그녀를 데리고 가서 진지하게 그녀를 소개했다.

하지만 평생 배운 기술을 써서 사황자를 석류나무 아래로 유혹하기 전에, 대황자가 능운루 아래층에서 그 사달을 일으켰다. 그 난리 통에 능운루 전체가 끓는 기름에 불을 빼버린 것처럼, 연기만 모락모락 나고 열기는 계속해서 식어갔다.

사황자도 불안해 보이더니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핑계를 대고 돌아가 버렸다.

사황자 앞에 얼굴을 내밀었으니 주육은 약속을 지킨 셈인데, 얼굴만 내밀고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능운루에서 나온 아라는 마차에 올라타서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어렵게 잡은 기회인데, 어렵게 사황자 앞에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어려운 기회가 대황자의 채찍질 한 번에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아라는 마차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연향루로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슬프고, 생각할수록 두려웠다. 칠야의 심부름을 받은 후로 벌써 달포가 흘렀다. 이 심부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어느 날 밤 위봉낭이 다리를 붙들고 어딘가에 내던져버릴지도 모르는데.

아라는 생각할수록 두려워졌지만, 두려워할수록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서인지, 위봉낭이 들어와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그녀를 한참 빤히 보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디어 위봉낭을 본 아라는 겁에 질려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데 웬걸, 위봉낭은 다리를 붙들고 어딘가로 그녀를 내던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은표 몇 장과 몇 마디 말을 던졌다.

‘사왕야는 계화향을 좋아하고, 여인의 화장은 농염하고 의복은 소박하고 우아한 걸 좋아한단다.’

아라는 은표를 움켜쥐고, 위봉낭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위봉낭이 남긴 말을 셀 수 없이 곱씹었다. 드디어 조금씩 되살아났다. 보아하니, 사황자를 잡은 게 맞나보네? 칠야가 은표를 주었어. 앞으로 사황자의 환심을 어떻게 사야 하는지 알려주는 말이겠지?

슬픔의 골짜기에 떨어졌던 마음이 순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아라는 싱글벙글 몇 번이고 은표를 셌다. 은표를 센 다음엔 그 말을 곱씹었다. 그 말을 곱씹은 다음엔 또 은표를 셌다. 즉, 첫 번째 심부름을 잘 해낸 것이다!

역시나 며칠 뒤 저녁, 목소리가 나긋나긋한 사환이 사황자의 말을 전하러 왔다. 이따 마차가 마중 올 테니 잘 준비하라는 전갈이었다.

아라는 위봉낭이 남긴 당부를 속으로 곱씹었다. 계화향, 이건 문제없다. 그날 그 말을 들은 후로 계화향만 사용했다. 몸부터 옷은 물론이고 온 연향루에 계화향이 촉촉해지도록 향로를 뿌려댔다.

농염한 화장, 소박하고 우아한 복장. 아라가 연지를 입술에 발랐다가 닦고, 닦았다가 바르고, 옷을 벗었다 입고, 입었다 벗는 사이, 마차가 아래층에 도착했다. 사실 치장을 다 끝내지 못했지만, 이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마차에 탄 아라는 한없이 조마조마했다. 사황자가 성질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대황자보다 성격이 좋지 않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지난번엔 너무 긴장해서 사황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꽤 잘생기긴 했었다. 옷에 수 놓인 용이 금빛으로 번쩍였었고…….

그렇게 허튼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멈추더니 목소리가 나긋나긋한 사환이 휘장을 걷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라가 마차에서 내려서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싸늘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개를 숙이라고 했다.

아라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사환의 뒤꿈치를 바라보며 사환이 걷는 대로 따라서 모퉁이를 돌고, 또 하나를 돌고, 다시 하나를 돌고……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돈 후에 포근하고 향기로운 난각 안으로 들어갔다.

사환은 난각 문 앞에 공손하게 서서, 아직도 멍하니 뒤꿈치를 바라보는 아라에게 눈짓했다.

“들어가세요.”

“예.”

아라는 문턱이 높디높은 난각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환하게 켜진 난각 안, 사황자가 속옷을 풀어헤친 채 화항에 비스듬히 누워서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아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이리 오너라, 이쪽으로 와라.”

곡 대낭자의 배는 종일 순풍에 돛을 펄럭이고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길을 서둘렀다. 점심이 가까운 무렵, 바람을 맞아 잔뜩 부푼 돛이 별안간 큰 소리를 내며 곤두박질쳤다. 갑자기 돛이 떨어진 배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강 한가운데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선실에서 책을 들고 읽는 듯 마는 듯 삐딱하게 누워서 옥연과 단청이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주는 걸 누리던 곡 대낭자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단단한 선실 바닥에 모질게 떨어진 그녀는 아프다고 고함쳐댔다.

“대낭자, 괜찮으신가요?”

왕 어멈이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곡 대낭자를 향해 달려 들어왔다.

“배가 뒤집히는 거야?”

기어 일어나기도 전에 저쪽으로 쏠려간 곡 대낭자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낭자, 무서워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어멈이 여기 있어요!”

왕 어멈은 비틀비틀 일어났다가 다시 비틀거리면서도 오로지 곡 대낭자만 보이는 듯이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곡 대낭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