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우연한 만남
계소영이 이신의 말을 이었다.
“이런 걸 훌륭한 기교라고 하지. 자연보다 더 뛰어난 기교 아닌가. 조 형뿐만 아니라 나도 이곳의 경치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생각했네. 인공으로 꾸며진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이 정원, 자네 누이가 관리한 건가?”
“그럼. 누이의 안목이 비범하거든. 어쨌든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지. 이 화원의 경치뿐만 아니라, 오늘 문회도 누이가 공들여 마련한 걸세. 이곳으로 고른 것도 누이의 생각이고. 나는 수각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누이가 수각에서 보는 경치가 단조롭다고 하더군. 게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수각엔 숯밖에 피울 수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더군.”
“이 난각은 땅에 불을 지핀 건가?”
여염이 매우 빠르게 반응하고 물었다.
“어쩐지 바닥에서 따듯한 기운이 올라온다 했지. 아직 화로를 피우기엔 이른 시기인데 자네 저택엔 벌써…….”
여염이 손에 든 부채를 마구 휘둘렀다.
“굳이 틀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
이신의 말에 여염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부럽네. 일족(一族)을 세우면 법도라는 게 아무래도……. 하긴 자네 가문은 아직 일족을 세운 게 아니라서 법도랄 게 없지. 어디 우리 같은가. 그래도 우리 가문은 나은 편이지. 계소영을 보게. 대가족, 진정한 서생 가문 아닌가. 그 집안 법도가 어떤지 한 번 물어보게. 화로를 피울 시기가 아닌데 지룡(地龍)을 지필 수 있다던가? 집에서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도 다 법도가 있네. 언젠가 한 해, 대한이 되기 전에 매우 추웠던 때가 있지. 우리는 털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계소영은 춥다고 밖을 나오지 않았어. 절기가 되지 않아서 털옷을 입지 못한다고. 그런 적 있나 없나?”
계소영이 조금 거북한 듯 대답했다.
“그건 내 성격 때문일세. 내가 연연해서 그렇지, 집안 법도는 그렇게까지 엄격하지 않아.”
계소영의 사촌형으로, 춘시 준비하러 경성에 들어온 계소동이 웃으며 말했다.
“경성 백부댁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네. 고향 집은 법도가 더 엄하지. 예전에 가문 학당에 있을 때, 추워서 손발이 어는 사람이 많았어. 절기가 되지 않아서 화로를 피우지 못했거든. 숯 화로는 물론이고, 손난로도 들지 못하게 했네. 그때 우리 조카 중에, 어머니가 떠받드는 아이가 있었는데, 화로를 피울 때가 열흘 정도 남았는데 몰래 손난로를 쥐여줬다가, 다음 날 선생께 바로 들통나서 밖에서 종일 무릎 꿇은 적도 있었네.”
계소영이 조금 거북해하는 모습에 여염이 얼른 나섰다.
“그런 이야기 그만하세. 사실 우리 집안 법도도 엄청나거든. 이 대랑 가문이 제일 자유롭지.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앞으로 나는 자주 이 대랑 집에 와야겠네. 이 화원, 얼마나 좋은가! 아, 지난번에 자네 종복이 배산임수, 좋은 온천이 있는 장원이 있다고 했지? 겨울에 그 온천 장원에 가서 며칠 묵어야겠네! 같이 갈 사람 있는가? 내가 이 대랑 대신 자네들을 초대하겠네!”
여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가겠다고 고함쳤고, 이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가세. 몇 번이든, 가서 며칠을 묵어도 다 되지. 이따가 장원을 정리해두라고 하겠네.”
“여기 경치가 참 좋으니, 나는 좀 둘러보고 오겠네.”
계소영이 그렇게 말하며 난각 밖으로 나가자, 여염이 주저하다가 뒤를 따라갔다.
“나도 둘러봐야겠어. 오전의 그 시제, 제대로 파해하지 못한 것 같으이. 걸으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영감이 떠오를지도 몰라.”
난각에 있던 모두 두 사람을 따라 나갔다. 우르르 몰려나간 사람들은 걸어가면서 조금씩 흩어졌다. 누군가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는 저쪽에 멈췄다. 누군가는 홀로 서서 멍하니 경치를 감상했고, 누군가는 삼삼오오 무리 지어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계소영은 홀로 걸어가며 경치를 구경했다. 매우 느긋하고 자적한 모습으로 국화가 만개한 화원을 빙 둘러서 갔다가 오색찬란한 단풍 숲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다과를 살펴본 이동은 후원에 임시로 설치한 부엌에서 나와서 단풍 숲으로 들어갔다. 이동은 난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자에 자리 잡고 앉아, 수련이 정자 안에 놓아둔 홍니로를 부치며 차를 내렸다.
이신 일행이 한가로이 걷다가 아무 곳에서나 잠시 멈춰서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도록 이곳과 다른 곳의 정자, 누각 곳곳에 모두 작은 홍니로, 차 탁자와 다구, 그리고 몇 가지 간식을 놓아두었다.
이동은 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차를 머금었다. 반쯤 차를 비웠을 때, 수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낭자, 누가 와요.”
수련이 까치발을 들고 유심히 바라봤다.
“계 대공자네요. 자리를 피해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계소영이라는 말에, 이동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가 정말로 추시에 참석했다. 거인이 된다면, 그의 재능과 명성, 그리고 계 노승상의 명망, 부친과 계가의 백 년 자산이 있으니, 황상이 따로 입을 열지 않는 한, 춘시에 반드시 급제할 것이다.
장공주가 그렇게 말했고, 이동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계소영이 거인이 되면 전생과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었다. 이왕 달라졌다면 예전과 더 달라지길 바랐다. 예전처럼 계 황후의 죽음에 연연하고, 주가를 향한 원한에 연연하지 않길 바랐다. 사실 주가는 잘못이 가장 큰 사람도 아니었고, 계 황후 죽음의 원흉도 아니었다.
계소영은 수련보다 아주 조금 더 늦게 두 사람을 발견했다. 정자 앞에 있는 수련부터 발견했고, 몇 걸음 더 다가간 후엔 등진 채 정자에 앉은 이동을 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곧바로 돌아서려 했다. 거의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막 돌아서려던 그는 뻣뻣하게 걸음을 멈추고 잠시 멈칫하다가 정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본인도 이유를 모를 행동이었다.
“계 공자.”
수련이 무릎을 구부리고 예를 갖췄고, 이동은 일어서서 정자 밖에 서 있는 계소영을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절친한 벗을 맞이하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였다. 좋은 벗 계소영을 우연히 마주친 이신처럼.
그 순간, 계소영은 강렬한 자괴감이 솟구쳤다. 상대는 이토록 떳떳한데, 자기는 옹졸하기 짝이 없었다.
“차향을 맡았습니다. 낭자였군요.”
계소영이 깊이 장읍했다.
“그럼 들어와서 차 한잔하세요.”
이동이 살짝 물러서자, 계소영은 다른 쪽으로 정자 안으로 들어가서 이동 앞에 단정히 앉았다.
수련이 은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였고, 이동은 장공주와 함께 있을 때처럼 차를 그을리고 가루로 갈아서 찻잔에 넣었다. 수련은 거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물을 끓였고, 이동은 집중해서 차를 그을리고 가루를 갈았다. 계소영은 차를 그을리고 가는 이동을 열심히 바라봤다. 정자 안엔 은주전자에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계 공자, 드세요.”
차를 내린 이동이 계소영을 향해 찻잔을 내밀었다. 이동의 목소리에 정자의 고요함이 깨지고, 계소영은 놀란 듯이 조금 당황해서 손을 내밀었다.
“아, 고맙습니다. 좋은 차군요.”
이동은 생긋 웃었다. 좋은 차인지 아닌지 마셔봐야 칭찬할 수 있는 것을. 계가의 예의 바른 모습엔 언제나 조금은 진실함이 부족했다.
“이 형의 말을 들으니, 오늘 낭자께 큰 수고를 끼쳤더군요. 고맙소, 낭자.”
계소영은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는, 그런데 또 많은 맛이 나는 이 차를 살짝 머금었다. 그는 이동이 바라보는 가운데, 머리를 쥐어짜며 가장 적절한 말과 화제를 찾으려 애썼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말을 찾아서 하거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듯했다.
“지나친 말씀이세요.”
계소영의 고맙다는 말에 이동은 참지 못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자기가 왜 고마운 걸까?
“낭자는 현숙하고 선량한 분입니다.”
고개를 든 계소영은 이동이 웃는 얼굴을 슬며시 보고 자기가 고맙다고 하는 건 너무 느닷없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난처해진 계소영은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손에 든 찻잔을 힘껏 노려보았다.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썼지만, 목소리는 잔뜩 굳어 있었다.
“그래요.”
이동은 계소영의 말에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하다가 웃음을 참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현숙하고 선량하다는 칭찬, 받을 만하잖아, 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내 말은…….”
계소영은 이동의 긍정 가득한 ‘그래요.’ 한마디와 그 뒤에 이어진 전혀 체면 차리지 않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농에 불현듯 마음이 편안해지고 힘이 바짝 들어갔던 등도 느슨해졌다. 순간 등이 축축이 젖은 느낌이 확연히 느껴졌다.
“낭자는 현숙하고 선량하고, 영특하고 총명하니, 강가 일은…….”
계소영은 고개를 들고 대담하게 이동을 흘깃 바라봤다. 이동은 빙긋 웃으며, 계소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으며 말을 잘랐다.
“영특하고 총명하니까, 해도 될 일, 하면 안 될 일을 아는 거예요.”
계소영은 얼떨떨해졌다. 뭐라고 계속 말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 다급하게 궁리하는데 이동이 이어서 말했다.
“예를 들어 계 공자도 그렇죠. 예전에 세상사에 미련 두지 않았잖아요. 하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였겠죠.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영특하고 총명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진심을 다 해도 돌아오는 게 아무것도 없을 뿐이겠죠.”
이동은 망연한 듯한 계소영을 빤히 바라봤다.
“다들 고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데, 하지만 고씨를 해결한들, 심지어 고가를 해결한들, 공자 생각엔 두 번째 고씨가 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두 번째 고가는요? 저는 고씨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설사 고씨가 잘못이 있대도, 그녀를 총애하고 허튼짓을 하도록 내버려 둔 사람과 비교하면,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공자 생각은 어떠세요?”
계소영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동을 바라봤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슨 뜻인지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녀는 고씨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강환장도 아니다.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그녀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그에게 분석하고 설명해주고 있었다.
“삼강오륜이 있으니, 아내 된 자로서 지아비를 비방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모든 분풀이를 고씨에게 한다? 저는 영특하고 총명한 사람이니까, 그다지 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싶지 않아요. 고씨가 애틋해서가 아니에요. 나 자신 때문이에요. 공자는 아마도 돌아가라고 날 설득하려는 거겠죠. 돌아가서 고씨를 해결하고, 후택을 정리하라고. 하지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잖아요. 후택이 정리될까요? 윗물이 더러운데, 고씨를 정리하고 말고, 그게 중요할까요?”
“낭자의 말은…… 내가…….”
계소영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말에 충격을 너무 받았다. 그가 십여 년 동안 미워해 온 사람을, 그녀는 그 사람이 원흉이 아니라고 한다. 맞는 말인 걸 그도 안다. 삼강오륜. 그랬다. 삼강오륜, 법도, 예법……. 자신은 화풀이하는 게 맞았다. 적어도 조금은 화풀이가 맞았다.
“고맙습니다, 낭자. 이 차…… 감사합니다.”
계소영은 일어서서 깊이 장읍하고 서둘러 몇 걸음 내딛다가 돌아서서 다시 장읍했다. 그러고 또 몇 걸음 내딛다가 돌아서서 다시 장읍하고…….
수련은 완전히 평상심을 잃은 계소영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봤다. 수련은 계소영이 연달아 일고여덟 번 장읍하고 지척지척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태연한 표정인 이동을 돌아보고는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낭자, 계 공자가 왜 저렇게 놀란 거예요? 뭐라고 하셨어요?”
“별거 아니야. 그냥 있는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야. 돌아가자.”
이동은 일어서서 수련을 데리고 안으로 돌아갔다.
부디, 자신의 말이 계소영을 일깨웠길 바랐다. 그는 이미 과거와 달라졌으니까. 그렇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주 귀비의 명성을 어떻게 훼손할까, 주가를 어떻게 몰살할까 고민하느라 평생 갈등하지 않길 바랐다. 그 화풀이와 과장된 원한이 인생 전부가 되어 사로잡혀 살지 않기를.
뭐하러, 굳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