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대황자의 도리
기척을 들은 사황자가 2층 창가로 다가와서, 분노해서 채찍을 휘두르는 대황자와 사환 둘을 내려다봤다. 한 사람은 대황자의 말에 짓밟혀 다리가 부러져서 피 웅덩이에 웅크린 채 기절했고, 다른 하나는 대황자의 채찍질에 살이 다 뜯겨서 피를 철철 흘린 채 머리를 부여잡고 문에 기대 있었다.
벌써 누군가가 아래층으로 뛰쳐 내려가는 걸 본 사황자는 다급하게 창문을 열어 머리를 내밀고는 매섭게 고함쳤다.
“돌아와라! 대왕야가 하는 일에 너희들이 감히 참견할 것이냐! 돌아와라!”
벌써 달려나가던 사람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목불인견이 된 두 사환을 바라봤다. 나갈 수도 없고, 물러서자니 차마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황자의 목소리에, 대황자는 고개를 들고 사황자의 시선을 빤히 마주보며 채찍을 휘둘렀다. 허공을 향해 크게 채찍을 철썩 휘두른 대황자는 말을 몰고 돌아갔다.
사황자는 매우 유감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이 망할 놈들이 일을 다 망쳤다! 큰형님이 이 자리에서 저 두 사환을 때려죽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 명 더 때려죽이고 포악하다는 명성을 남겼으면 더 좋았을 것을. 곧 때려죽일 것 같았는데, 하필 저 망할 놈들이 일을 망쳤잖아!
영원은 화를 내며 사라지는 대황자를 구석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성질머리하고는, 참 좋군!
말을 몰고 달리던 대황자는 단숨에 거리 끝까지 달려가서 고삐를 잡고 잠시 서 있다가 곧바로 수국공부로 달려갔다.
수국공부 앞에서 말에서 내린 대황자는 다가와 예를 갖추는 문지기를 상대하지도 않고, 맞이하러 사람이 나오는 건 더더욱 기다리지도 않고 채찍을 꾹 쥔 채 성큼성큼 조 노부인의 정원으로 향했다.
조 노부인은 새파랗게 뜬 대황자의 낯빛에 순간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대가아,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귀비 마마에게…….”
“무슨 일이냐고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습니까? 모르십니까? 다 같이 오냐오냐해서 저 지경이 된 것 아니고요?”
대황자는 서슬 퍼런 기세로 조 노부인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대가아…… 그 말은……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내게 묻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내게요? 그런 말이 나옵니까?”
대황자는 왜 이렇게까지 분노한 건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화가 났다. 너무나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누굴 봐도 한 대 때리고 싶었고, 심지어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대가아, 무슨 일입니까. 이 할미에게 일단 말씀해보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귀비 마마가…… 마마가 병이 난 겁니까?”
조 노부인은 안 좋은 일부터 생각하느라 지레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귀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세상에, 그건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수국공은 저택에 없었고, 기별을 들은 주유해가 허둥지둥 조 노부인의 거처로 달려갔다. 대황자가 연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감히 내게 묻습니까? 무슨 염치로요?”
“대왕야! 할머님은 연세가 많으십니다! 참으세요! 할머님의 연세가 많은데, 혹시라도…… 귀비 마마께서 어찌 견디겠습니까? 대왕야! 귀비 마마 생각해서 일단 화 좀 푸세요!”
주유해는 대황자의 고함과 비틀거리는 조 노부인의 모습에 겁에 질려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후다닥 대황자 앞으로 달려가서 다리를 붙들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화를 풀어? 귀비 마마를 생각해서 화를 풀어?”
대황자가 단번에 주유해를 걷어찼다.
“귀비 마마를 생각해서 화를 풀라고? 하!”
대황자가 날카롭게 비웃었다.
“귀비 마마 생각을 안 해야 화가 풀린다! 너도 내게 무슨 일인지 물을 것이냐? 다들 명백히 알지 않느냐? 넷째를 이 집안에서 오냐오냐한 것 아니냐? 그놈이 망상을 품은 것, 다 이 집안이 부추긴 것 아니냐? 너희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내가 장성하지 못할까 봐, 그전에 죽을까 봐, 내가 변변치 못할까 봐, 보험이 필요한 것 아니냐. 하나 더 필요했던 것 아니냐. 하나로 부족해서 하나 더 필요했던 것 아니냔 말이다! 이 망할 것들! 이 고얀 것들!”
대황자의 손가락이 주유해와 조 노부인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무슨 생각인지 내가 다 안다. 누구든, 주가의 자손이라 이거지. 그렇지? 잘도 계산하는구나! 나를 멍청이로 여기는 것이지? 그렇지? 무슨 염치로 무슨 일인지 묻는 겁니까!!”
대황자가 조 노부인을 향해 고함치는 말에 조 노부인의 얼굴에 침이 잔뜩 튀었다.
“대가아, 술을 드셨습니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대가아와 사가아는 동복 형제인데…….”
조 노부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가 말을 잘랐다.
“동복 형제? 모비는 나를 낳고 늑대를 낳았습니다! 늑대인 줄 뻔히 알면서, 악독한 늑대인 줄 뻔히 알면서, 모비는 그놈을 편애합니다. 그놈이 하는 말을 뭐든 믿고, 듣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대왕야, 그런 게 아닙니다. 귀비 마마는 항상 공정한 분입니다. 사실 귀비 마마는 대왕야를 더 아낍니다. 그런데…….”
다급히 설득하는 주유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버럭 고함치는 대황자의 목소리에 말이 잘렸다.
“개 같은 소리! 나를 아껴? 안중에 나는 있고? 잘 들어라, 모비 눈엔 넷째밖에 없다. 모비 눈엔 아들은 넷째뿐이야! 내 눈엔 똑똑히 보인다! 상관없다. 내가 모비에게 의지해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닌데, 무서워할 줄 알고?”
대황자는 고통스럽게 고함쳤고, 조 노부인은 그런 대황자의 모습에 화도 나고 마음도 아팠다.
“대가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대가아는 장자고, 귀비 마마가 가장 예뻐하는 아들입니다. 황상도 그렇고요. 대가아야말로 황상과 귀비 마마가 총애하는 사람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지 말고…….”
“하! 아직도 나를 어를 생각입니까? 내가 세 살짜리 아이입니까?”
대황자는 조 노부인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하, 하고 냉소했다. 채찍을 치켜들어 탑상 구석에 놓인 탁자 위 꽃병을 후려치자, 꽃병과 안에 담긴 물, 꽃이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대황자가 활개 치며 돌아간 후, 조 노부인은 새파래진 얼굴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주유해는 대황자를 배웅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조 노부인 앞으로 달려갔다.
“할머님, 할머님, 괜찮으십니까? 할머님, 화내지 마십시오. 그냥…… 대왕야가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세요. 정말로 술에 취한 겁니다. 할머님, 할머님!”
조 노부인은 한참만에 겨우 숨을 내쉬었다.
“괜찮다. 태의를 부르러 갈 것 없다. 다시 돌아오라고 해라. 이 일이 퍼지면 안 된다.”
아무래도 이 나이까지 살아온 조 노부인은 주유해보다 보고 들은 것이 많은 만큼 식견이든 뭐든 당연히 주유해보다 넓었다.
“나는 괜찮다. 왜 대가아에게 화를 내겠느냐. 아니, 대가아가 아니지. 대가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아라. 누구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난 건지 알아보아라.”
“할머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럼 그냥 태의를 모셔서 평안맥을 짚어 보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 노부인이 서서히 진정한 모습에 주유해는 살짝 안도하며 권했다.
“됐다. 어서 가서 누가 대가아 화를 저렇게 돋웠는지나 알아보아라.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조 노부인은 매서운 표정과 목소리로 분부했다. 누가 대가아를 저 지경으로 화를 돋운 건지 알아내면 절대로 가볍게 용서하지 않으리라!
조사해 낸 내용이라곤 능운루 앞에서 대황자가 말로 능운루 사환을 짓밟은 일뿐이었다. 주유해는 속셈을 굴려 본 다음 직접 조 노부인에게 보고했다.
“사왕야가 능운루에서 추시 합격자들을 위한 연회를 열었답니다. 대왕야가 지나가는데, 사왕야가…….”
주유해가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사왕야가 입막음했겠지요. 능운루 사환들이 대왕야의 말을 막았답니다. 할머님도 아시다시피, 근래 사왕야가 하가에 불을 질렀잖습니까. 그 물건이 누구 건지 할머님도 아실 거고요. 사왕야도 압니다. 알고 불을 지른 겁니다. 대왕야는 영리한 분이니 속으로 훤히 알아도 동복 형제이니 사왕야와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한 마음이야……. 아이고!”
주유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래 사왕야가 너무 지나치긴 했지.
“사왕야가 그 보석들을 불태우고, 또 대왕야의 장삿길을 막았습니다. 할머님, 소육은 우연이라고만 하는데,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에 있습니까? 은자가 하늘에서 떨어져서 마침 소육에게 뚝 떨어지겠습니까? 한 번에 2, 30만 냥이나요? 아무리 대왕야의 장삿길을 막고 싶어도 이건 아니지요. 사왕야는 대왕야가 화내는 걸 무서워하지도 않고, 소육도 덩달아 부추깁니다. 할머님, 보십시오. 대왕야가 할머님에게까지 이렇게 화풀이합니다. 이게 다 소육 때문입니다.”
조 노부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은 좋지 않았다.
“이어서 강남 일이 터졌지요. 할머님, 그 축가 자제 일, 고 사사가 이미 확실히 조사했는데, 축가에선 전혀 모르는 일이랍니다. 태평부에 남은 축가 일파는 그 당시 축가 종가와 인명 사고까지 내고 송사까지 한 사이입니다. 축가 종가가 태평부를 떠난 것도 지금 태평부에 남은 일파에게 몰려서 나간 겁니다. 그런 깊은 원한이 있는데, 축가 종가에서 그렇게 큰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큰일을 꾸미겠습니까?”
“음. 밖에서 벌어지는 큰일은 나는 모른다. 축가 종가 어르신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 분별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일은……. 휴.”
밖에서 벌어지는 큰일을 조 노부인이 알 도리가 있나.
주유해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할머니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가 하는 말에 동의하는 걸까, 아니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할머님, 강남 일도 아마 사왕야가 일으킨 일일 겁니다. 아시다시피, 강남 과거장 안건의 주범 동민은 대왕야 문하 출신입니다.”
“동민이라는 자, 동씨의 큰오라비냐?”
조 노부인이 돌연 묻는 말에 주유해는 조금 껄끄러워졌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 하지만…….”
“동씨가 예전에 사달을 참으로 많이 일으켰지. 동민……. 휴, 됐다, 됐어. 바깥일이다. 바깥일은 나는 모른다. 휴. 네 말이 맞다. 대가아와 사가아가 계속 이렇게 싸워대면 안 된다. 귀비 마마를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겠구나. 형제끼리 말로 풀지 못할 것이 무어야. 같은 어미에게서 나온 친형제가, 말로 풀지 못할 것이 무어냔 말이야. 풀지 못할 응어리가 뭐가 있어서? 입궁하겠다고 기별하고, 마차를 준비해라. 내가 귀비 마마를 만나 이야기해 보마.”
장녕궁, 조 노부인을 배웅한 주 귀비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대왕야를 모셔와라! 할 말이 있다.”
대황자가 조마조마한 마음과 함께 화가 나는 마음으로 장녕궁에 들어가니, 주 귀비의 안색이 지극히 좋지 않았다. 대황자가 예를 마치고 제대로 서기도 전에 훈계가 시작되었다.
“갈수록 말 같지 않게 구는구나. 감히 외조모에게 화풀이해? 네게 형님다운 면모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주 귀비가 훈계를 시작했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황자는 마지막 말에 목에 힘이 들어가서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 넷째를 편애할 줄 알았다. 더 기울 수 없을 정도로 기울었구나. 역시! 어머니 눈엔 넷째밖에 없어!
“네가 무슨 일을 일으켰는지 봐라! 이게 말이 되느냐? 대체 무슨 염치로 외조모에게 행패 부리는 것이냐? 외조모가 얼마나 너를 아끼는 건지 몰라? 외조모가 아니었다면 너는 목숨도 못 지켰다. 그걸 잘 알면서! 네가 두 살 때 큰 병을 앓았을 때, 네 외조모가 목숨 걸고 탕약을 보내셨다. 그 약 두 첩을 먹고 병이 나아서 겨우 살아난 것이다.”
“내가 병이 났으면 태의원에서 알아서 치료했겠지요. 밖에서 약을 들여올 필요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