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손을 거두고 손을 내밀고
이신의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가 입을 다물고 일단 끝까지 듣기로 했다. 이동은 고개를 들어 이신을 바라보며 쓴웃음 지었다.
“장공주의 성격이…… 성격이 급하다고 하기엔 많은 면에서 참 잘 참으세요. 그런데 잘 참는다고 하기엔 또 사소한 일은 참지 않으세요. 그다음 날, 문 이야를 빌리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문 이야를 강남에 보내겠다는데 무슨 일인지 말씀하진 않고요. 우리에게 불리할 일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런 마음으로 묵인했어요.”
“합격방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축가 자제 몇이 있더구나. 아마도 문 이야가 끌어들였을 것이다. 은자로 합격한 사람 중에도 아마 문 이야가 손 쓴 사람이 몇 있을 것이고. 하지만 자질이 안 되는데 합격한 사람 중엔, 적어도 절반이 동민이 손을 쓴 것이겠지. 이번 일은 문 이야가 없더라도 과거 시험에 부정행위를 저지른 큰 추문인 건 변함없다.”
이신은 ‘묵인했다는’ 이동의 마지막 말과 은근히 느껴지는 자책을 풀어주려고 넌지시 그렇게 말했다.
“이걸 이야기하려고 했고, 또 하나는, 문 이야가 영원을 찾아갔었어요. 문 이야가 제게 말한 게 아니라, 영원이 알려줬어요. 문 이야가 자기를 찾아온 걸 아느냐고 묻더라고요.”
이신은 그다지 의외로 여기거나 놀라진 않은 얼굴이었다.
“장공주가 문씨 가문과 문 이야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어요. 한두 번이 아니에요. 장공주 말씀이, 문가 사람은 문가 조상부터 문도까지 다 성품이 같대요.”
이동은 문 이야에 대한 장공주의 평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이신에게 전했다.
“세 번째는, 얼마 전에 경성 연향루 입구에서 진왕의 외숙 양 구야가 옷을 벗고 뛰어다닌 그 일, 강환장이 심리하게 되었어요. 장공주 말씀이, 영원이 손을 쓴 거래요. 영원이 아마도 장공주가 꾸민 일을 이용해서 내가 강가와의 혼인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 같대요. 우리 집안에 좋은 일을 해주는 동시에 우리 집안이 진왕을 지지할 가능성을 끊어놓으려고요. 장공주는 이 일을 영원과 문 이야가 손잡고 한 일이라고 보고 있어요.”
“문 이야가 떠나기 전에 너와 어머니에게 강남행의 목적을 말하지 않았는데, 영원에겐 알렸단 말이냐? 아니, 알릴 필요도 없이 암시 하나면 되겠구나. 그렇긴 하지. 네가 강가에서 벗어난다면, 영원에겐 일거양득이지. 어찌 됐든 우리는 그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고, 진왕의 손을 잡기는 어려워질 테니 말이다. 보아하니, 강남으로 갈 흠차도 강환장이 낙점되겠구나.”
이신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감탄한 듯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장공주가 고서강이 뜬금없이 축가 일을 뒤집어쓴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왕 손을 뻗었으면 등에 칼 꼽힐 각오도 하라고 하셨어요. 오라버니, 우리 지금 손을 뻗은 셈 맞죠?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는데, 오라버니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집에 칼이 떨어진다면 그 칼은 오라버니가 맞게 될 테니까요.”
“장공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 절대로 입을 열면 안 된다고 당부하시더냐?”
이신이 민감하게 나지막이 물었다.
“그런 말씀은 없었어요. 그냥 한마디 귀띔하듯 하셨어요.”
이동이 눈을 내리깔았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괜찮다. 설령…… 뭐 가끔 칼을 맞을 수도 있겠지만, 네 오라비는 거죽도 거칠고 살도 두껍다. 견딜 수 있어. 장공주가 너를 벗으로 여기니, 앞으로 너는 네 생각만 해라. 난 괜찮으니 안심하고.”
이신의 온화하고 따듯한 목소리에 이동은 울컥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게다가 너와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보살펴 주느냐. 만사 날 위해서 고려해주고 사사건건 날 위해 신경 써 준다. 그런데 무슨 큰일이 있겠어? 오라비가 되어서 네게 도움 되지는 못하고 오히려 네가 곳곳에서 날 위해 마음 쓰지 않으냐.”
이신은 정말로 자책이 들었다.
“오라버니가 날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는 뭐가 걱정이냐면…… 어쨌든 걱정돼요.”
이동은 뒤를 얼버무렸다. 오라버니가 그녀와 어머니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그녀는 뒤늦게, 죽기 전에야 겨우 깨달았었다.
“걱정할 것 없다. 안심해라. 설령 몸이 부서진다고 해도 나는 너와 어머니를 평안하게 지켜낼 것이다.”
이신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지만 매우 단호했다. 이동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신은 이미 한 번 그렇게 했다. 자신과 어머니를 지키진 못했지만, 그는 몸이 부서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울지 마라, 울지 마.”
이신은 비처럼 눈물을 흘리는 이동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안 울어요.”
이동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한참만에야 멈추지 않을 듯이 흘리던 눈물을 겨우 거뒀다.
“오라버니, 앞으로 몸이 부서진다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듣기만 해도 마음 아파요.”
“오냐.”
이신의 마음이 약해졌다.
“또 하나, 영원이 날 찾아왔었어요. 처음엔 하가 일로, 나와 우리 집안을 주시하고 있다고 하면서요. 나와 장공주가 밀접하게 왕래해서 지켜봐야 한다나요. 두 번째는 여기 산장으로 찾아왔어요. 주가 육소야에게 30만 냥 이문이 남는 거래 하나 줄 수 있는지 묻더라고요. 승낙하지 않았어요. 다만 몇 마디 가르쳐주긴 했어요.”
“두 번째는 도와달라고 왔다기보다 우리 진 빚을 갚으라고 온 것 같구나.”
이신은 일어서서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영가의 세력이 대단하지만, 아무래도 북삼로에 국한되어 있지. 또 그런 영가의 세력 때문에, 태조 때부터 다들 영가를 꺼리는 것이고.”
이동은 장공주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꺼리기만 할 뿐만 아니라 손도 썼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영가는 그동안 본분을 지키며 조정 일에 끼어들지 않았고, 영원은 경성에서 세력과 힘이 약하다. 우리 가문을 포섭하고, 또 너를 통하면 장공주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어쩌면 여 승상도요. 이동은 잠시 주저하다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입을 열지 않았다. 여 승상과 이가의 우여곡절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싶었다. 지금은 이야기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결정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 건 일단 당분간 생각하지 말자.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네가 순조롭게 강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일단 그것부터 잘하고 이야기하자.”
이신의 말에 이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강가에서 벗어나다니. 그렇게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이동과 이신은 구곡교를 따라 앞뒤로 걸으며 뭍으로 돌아왔다. 이신은 이동이 수련과 시녀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걸 바라보다가 성큼성큼 화원에서 나와 거처로 돌아가서 영해를 불렀다.
“사람 몇 더 보내서 수녕백부를 지켜봐라. 특히 강환장과 강 백야. 저택도 주시해야 한다. 대소사를 가리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 꼭 보고하도록 해라.”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저도 모르게 툭 묻던 영해는 이신이 힐끔 볼 뿐 대답하지 않자 자기가 쓸데없는 말을 했음을 의식하고 얼른 준비하러 나갔다.
요 며칠 조정에서 가장 큰 일이 바로 강남 과거장 부정행위라는 큰 사건이었다.
조회를 마치고, 묵 승상, 여 승상, 여러 상서, 그리고 대황자, 사황자가 자극전으로 불려갔다. 물론 강남 과거장 부정행위 안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황상은 피로하고 지친 얼굴로 탑상에 정좌했다. 대황자는 공손하게 황상의 왼손 쪽에 서서, 맞은편에서 득의양양한 얼굴로 고소해하는 사황자를 원한 가득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볼수록 원망스러워서 두 주먹을 꾹 쥐었다가 풀었다가,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가 했다.
사황자는 그런 대황자를 수시로 힐끔거렸다. 사실 고소해하는 것까진 아니었다. 고서강도 덩달아 휘말려서 거의 손에 넣은 내년 춘시 시험관 자리가 날아갔다. 사황자도 손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 일로 대황자가 자기보다 더 낭패를 겪은 걸 생각하고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탑상 앞에 놓인 둥근 의자 두 줄 중 왼쪽 상석에 묵 승상이 앉아 있었다. 묵 승상은 황상을 바라보며 곁눈으로 수시로 대황자와 사황자를 힐끔거렸다. 여 승상은 묵 승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대황자의 분노한 눈빛과 수시로 접었다 폈다 하는 주먹을 바라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묵 승상과 여 승상 아래에 계 천관 등 상서들이 앉아 있었다. 원래 고서강도 이 자리에 있어야 마땅한데 요즘 그는 병가를 내고 강남 사건을 완곡하게 회피하고 있었다.
“이야기해 보게.”
황상은 서안에 놓인 합격방과 잔뜩 쌓인 상주서를 싫다는 듯 훑어보며 명했다. 그는 이렇게 규칙을 파괴하는 일을 가장 통한했다. 물론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도 통한했고.
“신의 생각으로는, 강남 부정행위 건에서 동민은 파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은 첫째, 적합한 인선을 뽑아 강남으로 보내 철저히 이 사안을 조사해야 하고, 둘째, 강남서로 추시의 모든 시험지를 거둬서 다시 심사해야 합니다.”
사황자가 묵 승상의 말을 잘랐다.
“시제가 팔려 온 거리에 나돌았는데, 그 문장을 미리 썼는지, 돈을 주고 사람을 시켜서 썼는지 어찌 압니까? 어떻게 심사한단 말입니까?”
“다시 심사해야 한다는 신의 말의 중점은 이미 등용한 사람을 떨어뜨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낙방한 시험지 중에서 인재를 고르는 것입니다. 올해 추시는, 강남서로에서 많이 등용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강남 민심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남 재자를 많이 등용하라고? 묵 승상, 국가의 일로 사적인 은혜를 갚겠다는 건가?”
대황자가 노려보며 냉랭하게 묻자 묵 승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대왕야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해야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황자의 말은 상관하지 말고 계속 이야기하게.”
황상이 성가신 듯 손을 젓자, 묵 승상이 허리를 숙이고 계속 말을 이었다.
“과거 부정행위 문제는 크게 키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언제나 그리해왔고요. 큰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는 일로 무마하는 게 좋습니다. 내년에 바로 춘시가 열립니다. 춘시가 끝나면 강남로의 이번 추시에서 선발된 거인의 시험지를 다시 꺼내서 세세히 살펴보고, 춘시와 거의 비슷하면, 즉 추시의 등용에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추시와 큰 차이를 보이면 그때 문책하면 됩니다.”
“신, 동의합니다.”
여 승상이 동의하자, 황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하라고 묵 승상에게 눈짓했다.
“세 번째, 앞장서서 일을 키운 자는 엄중히 처벌해야 합니다.”
“그래.”
황상이 묵 승상의 말에 동의했다.
대황자는 아까 상관하지 말라던 황상의 말에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상이 이런 말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 말이 제 얼굴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맞은편에 서 있는 사황자의 얼굴에 조롱이 짙어서이리라. 힐끔 보니, 사황자는 신이 나서 눈썹이 다 꿈틀거렸다.
“누가 강남에 가는 게 좋을지 이야기해 보게.”
황상이 모두를 훑어보며 말하자 묵 승상이 입을 열었다.
“형부 좌우 시랑 중에 한 사람 고르고…….”
묵 승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황자가 말을 잘랐다.
“형부의 두 시랑, 모두 큰형님과 관계있는 사람이고, 동민은 또 큰형님 문하 출신입니다. 부적절하지요.”
“너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
대황자가 분노하며 따지고 물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고서강을 좀 보세요. 일이 생기니 일단 회피하지 않습니까. 제 식구를 심문하는 것인데,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사황자는 한마디도 양보하지 않았다.
“짐의 신하다! 짐의 신하가 언제 너희들의 사람이 된 것이냐?”
황상이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황자는 사황자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코웃음 쳤고, 사황자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코웃음을 돌려주었다.
묵 승상, 여 승상은 형부 시랑 둘이 대황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훤히 알고 있었다. 굳이 관계가 있다고 하면, 대황자가 예전에 형부를 맡은 적 있어서 몇 년 일찍 알고 지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사황자가 그런 이유로 형부 사람을 트집 잡으면, 대황자가 지금 맡은 예부에서는 더 뽑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