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85화 (185/463)

185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다

항보량이 깨어났을 때 목은 아프고 눈앞이 캄캄한데, 주변이 조용해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항보량은 목을 비틀면서 몸을 움직여 사방을 더듬었다. 바닥에 지푸라기가 깔린 것이 땔감방인가 싶었다. 항보량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앞을 더듬었다. 벽이 만져지자 벽을 따라 더듬었다. 창문이 만져지길래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 더듬자 문이 만져졌다. 밀어봐도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항보량은 부르르 떨었다. 너무 방심했구나. 좌 선생이……, 아니, 동 사사가 이렇게 간 큰 짓을 할 줄이야. 안건을 고발한 수험생을 거리에서 잡아서 곧바로 옥에 던지다니. 내가 이곳에서 죽겠구나.

항보량은 벽을 타고 주르르 주저앉아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참만에 손 떨림이 멎자 일어서서 벽을 더듬더듬 만져나갔다.

위아래로 세 번 더듬었을 때, 까치발을 해야 닿을 수 있는 작은 창이 만져졌다. 힘껏 밀었더니 틈이 생겼다.

햇살이 비치자, 눈앞이 온통 금빛으로 가득했다. 한참 후에야 빛에 적응하고 돌아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역시 땔감방, 아니 땔감방이 아니잖아!

방의 절반엔 볏짚이, 다른 절반엔 채찍, 긴 의자, 그리고 화로와 인두가 마구 놓여 있었다. 어렴풋이 피비린내가 코끝을 맴도는 순간, 항보량는 식겁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긴 땔감방이 아니라 형방이다!

달아나야 해! 얼른 달아나야 해!

생사의 갈림길에서, 항보량은 용기와 지혜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긴 의자를 밟고 올라가서 그 작은 창문을 힘껏 열었다. 창문이 반쯤 열리자, 항보량은 의자를 길게 세우고 기어 올라가서,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좁은 창에 몸을 억지로 구겨 넣어 비집고 나왔다. 등이 쓸려서 핏자국이 스며 나와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창문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항보량은 아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일어나서 주변을 살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담장이 높지 않았다. 항보량은 담장을 넘어 방향을 알아보고는 태평부를 향해 미친 듯이 달아났다.

문 이야는 태평부 성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운 마차 안에서 차를 홀짝이며 그물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항보량이 낭패스러운 모습으로 겁에 질린 채 성문을 향해 달려오더니,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문 이야가 빙그레 웃었다.

영 칠야가 북삼로에서 비적 토벌의 전문가라고 들었더니, 비적 토벌하는 데 전문일 뿐만 아니라 악질적인 일에도 전문이로군.

태평부 성문 안에서 말 열몇 마리가 달려 나왔다. 종복, 사환 일고여덟 명에게 에워싸여 나온 서생들은 웃으며 항보량을 맞이하러 다가갔다.

문 이야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딱 맞췄군. 계가에서 일을 제법 잘 처리했어.

“돌아가자.”

문 이야가 분부하자, 마차 앞에 앉아서 졸던 공대는 눈도 뜨지 않고 말 궁둥이를 걷어찼다. 말이 히잉 거리며 마차를 끌고 성으로 돌아갔다.

“남쪽에서 소식이 왔느냐?”

문 이야가 그물창 너머로 물었다. 여복에게 묻는 말이었고, 여복이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그쪽 인원더러 직접 소식을 들고 오라고 했으니, 그렇게 빨리는 못 옵니다. 그래도 사나흘이면 올 겁니다.”

공대가 말을 받았다.

“이야, 정말 선하십니다. 저 서생도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관아로 찾아간 것도 분명 벼슬자리 하나 얻으러 간 거라고 나리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퇴로가 없어서 나선 거 아닙니까. 그런 사람을 뭘 그리 깊게 생각하십니까? 머리가 날아가면 날아가는 거지요! 쌤통입니다!”

“의도가 불순하긴 해도 악한 건 아니다. 앞날을 걸었으면 됐지, 목숨까지 잃는 건 과하다. 지나친 일을 저지르면 덕을 해치게 돼. 그럴 필요 없어.”

문 이야의 느긋한 말에 공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지만, 여복은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말을 태태도 한 적이 있었다.

태평부 성문 앞에 다가온 항보량은 주저하며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자신을 그 마을 형방에 잡아넣은 것은 분명 동 사사의 사람이리라. 성안으로 들어가면 그물 안의 물고기가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이대로 도망쳐 다니자니 울분을 풀 곳이 없었다.

그렇게 주저하는 사이, 웃고 떠들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고 순간 매우 놀라고 기뻐서 손을 휘저으며 다급히 다가갔다.

“계 형! 계 형! 날세, 나야!”

강남 과거 부정행위 사건은 깊은 밤에 터진 불꽃처럼 음으로 양으로 눈꽃처럼 팔랑팔랑 경성 각처에 날아들고 천하 각지에도 퍼져나갔다.

강남서로 포정사 동민이 추시에 참석한 서생들을 가격대로 줄을 세우고 나이가 많든 적든 가리지 않고 상도덕을 지키며 장사하는 것처럼 거리에서 시제를 가격을 부르고 팔았다고.

합격방 명단에 오른 모든 이의 이름 뒤에 각자 은자 얼마를 썼는지, 혹은 어느 댁 자제인지 명시되었다. 정말이지, 합격방 한 장을 훑어보면 은자의 많고 적음과 가문의 고하가 한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분노한 서생들이 강남 과거 시험장 대문을 부수고 무수한 지전과 재신(財神: 재물신.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게 해 주는 신) 상을 안으로 던졌다. 항보량이 앞장서서 사달을 일으키며 합격방을 붙였다. 매우 격분한 뛰어난 문장과 은자, 가문이 적힌 그 합격방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강남로에 퍼졌고, 또 광풍처럼 경성 곳곳과 천하 각처로 퍼져나갔다.

경성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탕가 적장손 탕호우는 합격방에 적힌 고서강 세 글자에 혼이 빠지게 놀랐다. 합격방에 오른 축가 자제 뒤에 고서강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분노한 고서강, 고 사사 앞에서 온몸이 입이라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하고, 탕가 웃어른, 단순하지 않은 그 웃어른이 진짜 연관된 일인지 아닌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고 사사는 탕가와 이 일로 옥신각신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심혈을 기울여 상주서를 쓰고 있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이 일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탕가는, 어쩌면 탕가도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주 추밀부사 역시 머리가 깨질 듯했다. 고 사사를 내년 춘시 시험관으로 강력히 추천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 강남 축가 자제 이름이 쪼르르 오른 이유는 분명 내년 춘시를 노리고 벌린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휴, 고가니 탕가니, 어쩌면 이리 변변치 않을까. 문제 있는 사람을 추천한 바람에 황상이 죽어라 화를 내고 있는데. 상주서를 어찌 써야 할까. 어찌 써야 황상의 분노가 자기에게까지 미치지 않을까.

대황자는 누구보다 제일 분노했다. 그가 천거한 모든 이가 대놓고 명단에 오른 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이었다. 동민을 잃은 것이야말로 큰일이었다. 동민은 그의 문하에 많지 않은 3품 관리인데 이번 일로 동민은 끝장났다.

이번 일은 음모고, 동민은 누군가에게 모함당한 것이라는 장 선생의 말에 지극히 동의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누가 자기를 모해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자기를 모해할 수 있을까. 형제를 제외하고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진주를 불태우고 재물을 벌 길을 끊어놓더니 이제는 내 사람을 모해해?

이런 와중에 사황자는 이 떠들썩한 난리를 구경하느라 기분이 매우 좋았다.

고서강이 연루된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서강이 내년 춘시 시험관이 되지 못하면, 자신이 천거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당부하면 된다. 사소해도 너무 사소한 일이었다. 강남 사건이 터지고 대황자가 천거한 사람이 방에 이름 올린 것도 사소한 편이라면, 동민이 얽힌 일이야말로 큰일이었다. 기쁘지 않을 수가 있나.

사황자는 즐거워하면서 부황과 모비 앞에서 어떻게 이 불을 어떻게 더 키우고 더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일로 첫째가 부황의 총애를 잃고, 부황이 그자의 어리석음을 알아본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서재에 정좌한 계 천관 앞 서안에 명세가 적힌 강남 합격방, 항보량의 게시물, 그리고 강남 일족 가주인 사촌 아우의 긴 서신이 놓여 있었다.

계 천관은 서신을 여러 번 읽은 뒤 등불에 태우고 합격방을 들어 올려 위에 적힌 축씨 자제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장공주의 명을 받고 강남에 일을 꾸미러 간 사람은 이가에서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료, 문도였다.

계 천관은 다시 축씨 자제 이름을 훑어 내려갔다. 고서강이 내년 춘시 시험관이 될 가능성을 철저히 끊어놓고자 축가를 끌여들인 것이다. 조정에 춘시 시험관이 될 재능과 명망이 있는 북부 출신 양방(兩榜: 향시 거인과 회시 진사에 급제한 사람) 진사는 고서강뿐이었다. 지방 관리 중엔 두 명 더 있지만, 하나는 천남에 있고, 또 하나는 멀리 진봉로에 있어서 불러들이기엔 늦었다.

고서강이 내년 춘시 시험관으로 예정된 사실을 이 문도란 자가 자기보다 더 빨리 알았다. 어쩌면 더 깊이 알지도 모른다. 장공주가 그자를 이토록 신임하는 걸까? 이토록 이가를 신임하는 걸까?

계 천관은 합격방을 내려놓고, 뒷짐을 지고 고개 숙인 채 방 안을 서성였다.

문도가 아직 살아서 바로 상원현에 있을 줄이야. 부친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수하로 포섭하면 좋다고 주시하라고 당부한 사람 중에 가장 먼저 손꼽은 것이 바로 문도였다.

계 천관은 창 앞에 서서 초점 없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너무 방심했다. 이 문도, 역시 매우 예리했다. 문가 사람은 모두 음모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랬다. 그런 그가 상원현에 있는 걸 모르고 있었다니.

“아버지!”

계소영이 문 앞 계단 아래 서서 그를 불렀다.

“들어오너라.”

아들을 안으로 부른 계 천관은 긴 서안 위에 합격방과 게시물을 보라고 눈짓했다. 계소영은 노루글로 뛰어 읽고는 서안에 다시 올려놓았다.

“저도 조금 전에 두 문건을 읽었습니다.”

계 천관이 놀란 얼굴로 아들을 바라봤다.

“이신이 가지고 왔습니다. 이가 강남 장궤가 급보로 보낸 것이 막 도착했답니다.”

계소영의 대답에 찌푸려졌던 계 천관의 미간이 다시 돌아왔다.

“또 뭐라고 하더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호주 고향 집에 있을 때, 강남에서 장사하는 장궤들이 동민 이야기를 할 때 지극히 탐욕스럽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 있다고 했을 뿐입니다.”

“이신의 막료, 문도, 문 이야, 돌아왔다더냐?”

“돌아왔느냐고요? 그자가 강남에 갔었습니까? 이번 일, 문도의 솜씨입니까? 이가가? 어찌 감히.”

계소영의 빠른 반응에 계 천관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라. 이가가 아니라 장공주다. 장공주가 이가의 문도를 빌려 썼다.”

계소영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부친을 바라봤다. 계 천관은 놀란 아들의 눈빛을 마주 봤다.

“문도가 떠나기 전에 영원이 날 찾아왔었다. 장공주가 강남에서 작은 일을 몇 가지 하는데, 강남서로에서 계가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분명 있을 거라고 하길래 서신과 인장을 함께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됐음은 나중에 강남에서 온 서신으로 알게 되었다.”

“영원이요? 장공주가 영원과요?”

계소영은 더욱 경악했다. 계 천관은 희미하게 웃었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봤지. 장공주와 영가는 각자의 일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계소영의 눈살이 더 찌푸려졌다.

“그렇군요. 정말로 결탁했다면, 영원은 드러낼 것이 아니라 숨기려 해야 마땅했을 텐데 어째서 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했을까요?”

“음. 영가의 위세로는 장공주의 세를 빌려 호가호위할 필요가 없다.”

계 천관은 매우 흡족한 듯 아들을 바라봤다. 자신은 제 부친을 넘지 못했지만, 제 아들은 청출어람이었다.

“원래 황상은 내년 춘시에 고서강을 시험관으로 쓰려고 했다. 북부 서생을 조정에 등용할 때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계 천관이 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문도가 장공주의 심부름에 사적인 일을 섞었다.”

계 천관이 명단에 축가 자제를 가리켰다.

“고서강이 시험관이 된 것을 문도가 알고 있었습니까? 그럼 이신은요?”

계소영은 더더욱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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