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과거, 미래
추시와 함께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천붕을 벌써 거둔 보림암 뒤 작은 뜨락에 난초 사이에 국화가 들쭉날쭉 놓인 것이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회랑 아래, 차 탁자는 여전했고, 복안 장공주는 조금 나른한 모습으로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어제 백 노부인이 왔었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추시 문제요?”
이동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가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 셈이기도 하지. 넷째가 계소영을 낙점하지 말라고 말을 넣었다고 하던데.”
이동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얼굴로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이것 좀 봐. 첫째랑 넷째는 늘 이래. 매번, 그 두 사람, 이보다 더 어리석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다음엔 괄목상대할 일을 해.”
복안 장공주는 그래도 태연하고 평온해 보였다.
“황자, 국본이 그런 말을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나? 국본이 천하와 백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긴 아는 걸까? 국본이 뭔지 알기는 알까? 그건 됐다고 쳐, 그런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이 바로 상대에게 전해졌어. 그것보다 창피한 일이 있을까?”
“그것보다 창피한 일이라면, 그 다음번에 할 일이요?”
이동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자기가 헛웃음 쳤다. 복안 장공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말이 맞네. 나날이 퇴보하는구나. 갈수록 창피해져. 하지만 황상 눈엔 아들은 이 두 사람뿐이지. 첫째 아니면 넷째.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두 아들이 갈수록 멍청해지는 거야.”
이동은 한숨을 내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멍청한 것이 계가를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더니 결국 적이 되었어. 휴. 계 노승상은 스무 살에 천하 문인의 수장이 되었어. 문하생이 온 천하에 널리 퍼져 있지. 몇십 년 동안 계가는 수많은 서생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어.
지금 계가에서 마음이 동했고 곧 더 큰 뜻을 품겠지. 그러다가 온 일가의 생사를 걸겠지.”
복안 장공주는 연신 쓴웃음 지었다.
“영가도 뜻을 품었는데, 계가도 품었어. 이 경성, 이 천하에서 또 누가 마음을 품었을지 모르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지.”
“대왕야와 사왕야 눈엔 서로만 있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이동의 뼈 있는 말에 복안 장공주는 한참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을까. 두 사람이야 안중에 서로밖에 없어도, 세상 사람 눈에도 황자가 둘밖에 없겠냐고. 영원이 경성에 들어왔고, 계소영이 갑작스럽게 과거를 보고 출사하려 하는데, 둘 다 눈이 삐었어?”
“두 사람으로선 상대가 가장 큰 위협이고, 다른 사람은 그다음이니까 틀린 건 아니에요.”
이동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 형제들은 서로를 가장 큰 적으로 여기고 형제끼리 서로 죽이다가 다른 사람 좋은 일을 하고 말지.
장공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 형제 둘은, 차라리 남 좋은 일을 할망정 상대가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지. 영원이 경성에 온 이래 많은 일을 일으켰지. 다만 그 모든 일이 남을 해롭게 하긴 해도, 자기도 이득은 없었어. 다섯째와 영씨가 하루라도 빨리 그 감옥 같은 별궁에서 나오지 않는 한, 영원이 아무리 고생해도 결국은 다른 사람만 좋은 일이 될 거야.”
“계가에서 진왕을 골랐나요?”
“아마도.”
이동이 나지막이 묻는 말에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계가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셋째를 고르는 사람이 많을걸? 신하로선 네 황자 중에 셋째가 가장 나을 테니까. 성격도 좋고, 무르고, 진언도 잘 듣고.”
“네.”
이동은 예전 생각을 했다. 그랬다. 진왕은 성격이 좋고 진언도 잘 들었다. 하지만 그 좋은 성격은 현자뿐만 아니라 소인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진언을 잘 듣지만, 소인배의 진언을 더 잘 들었다.
“시비를 분간하지 못하고 굳은 심지가 없이 성격만 물러서 진언 듣는 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에요. 소인배의 진언이 충언보다 훨씬 듣기 좋을 테니까요.”
“네가 조정 대신들보다 더 똑똑하구나.”
복안 장공주는 웃다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양날의 검이야. 영원이 다섯째와 영씨를 새장에서 꺼낼 능력이 없다면 그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아. 하지만 다섯째와 영씨를 별궁에서 꺼내 경성으로 데리고 와서 다섯째를 쟁탈전에 밀어 넣을 수 있게 된다면, 뒤에 그렇게 강한 외척이 생기는 건데…….”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의 차를 내려다봤다.
“나도 무서운데, 누가 그를 제어할 수 있겠어? 영가를?”
이동은 얼떨떨해졌다.
“그건 너무…….”
“그래. 바로 이런 상황이야.”
복안 장공주는 한참만에 고개를 젖혀 잔을 비웠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넌 걱정할 것 없어. 네 오라비는 지금 여염, 계소영과 잘 지내고 있어. 내년에 진사가 되면, 벼슬길에 순풍에 돛단 듯 탄탄대로를 걷는 것까지 아니더라도 비슷할 거야. 이번 강남 일과 관련해서 문도는 태평부에서, 영원은 경성에서 판을 벌이고 있어. 모든 덤터기를 강환장과 진왕이 써야겠지. 진왕은 무사할 수 있어도 강환장은 모를 일이야.”
“네.”
이동은 나직이 대답했다. 그녀와 강가의 전생과 현재의 변화가 너무나 컸다. 그녀로서는 수녕백부의 미래를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미래도. 그러나 이번에도 진왕이 보위에 오른다면 복안 장공주의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시 정각, 이동은 뜨락에서 나와서 회랑을 따라 미륵불전으로 향했다.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미륵불전을 빙글 돌며 향을 피우고 돌아서서 나가려는데 앙상한 노승이 이동과 맞은편에서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이동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하고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시주, 어째서 미륵불전에만 향을 피우십니까.”
노승이 이동 앞에 멈춰서서 묻는 말에 이동은 얼떨떨해졌다.
“보이길래 그냥 향 하나 피웠습니다.”
“과거의 일로 미래의 불조께 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동은 화들짝 고개를 들고 너무 놀란 얼굴로 노승을 바라봤다.
“스님, 그 말씀은…….”
“과거는 미래지만, 미래가 아니기도 합니다. 시주, 이 미륵불을 보십시오. 과거, 미래를 다 알지만 그저 미소 짓고 있지 않습니까.”
노승은 속이 보이지 않을 깊은 눈빛으로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비틀거리며 문틀을 짚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스님, 무엇을 보셨습니까? 스님,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노승은 아무런 말 없이 이동을 바라봤다.
“그럼 스님, 예전이 꿈인지 아니면 지금이 꿈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이 다시 물었다. 노승은 이번에도 말없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스님께선 과거라고 말씀하시지만, 과거가 미래예요.”
노승은 이번에도 아무런 말 없이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물끄러미 노승을 바라보던 이동은 문득 깨달았다.
“말할 수 없다고 알려주시는 건가요?”
“시주에게는 혜근(慧根: 오근五根의 하나. 근根은 능력·소질을 뜻함. 부처의 가르침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노승의 말은 완곡하게 이동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다. 이동은 예전에 눈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진 앙상한 승려를 떠올렸다. 다만 그 승려는 훨씬 젊었었는데. 설마…….
“스님…….”
“시주는 복을 받은 분입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노승은 이동의 말을 자르고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륵불상을 돌아서 후원으로 향했다.
이동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대전에서 나와서 정오의 햇살 아래 한참 서 있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이동이 나오지 않자 수련이 산문 안으로 들어왔다가, 이동이 창백한 얼굴로 넋을 잃고 햇볕 아래 서 있는 걸 보고 후다닥 달려왔다.
“낭자? 낭자!”
“어?”
정신을 차린 이동은 비틀거리며 수련을 붙잡았다.
“난 괜찮아. 조금 전에 나이 든 스님 한 분 봤어? 아까 안으로 들어가신 스님의 법명이 무엇인지, 어느 사찰 분인지, 사태께 가서 여쭤봐. 난 괜찮아.”
이동이 분부하자, 수련은 머뭇거리다가 이동을 두고 잰걸음으로 뒤로 달려갔다. 잠시 후, 수련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낭자, 나이 든 스님을 어디서 보셨어요? 여러 사태께 여쭸는데, 나이 든 스님은 없다고 하는데요? 아까 낭자 혼자 안으로 들어간 걸 본 이래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대요. 사내도, 여인도요. 낭자, 뭘 보신 거예요?”
“괜찮아. 잠깐 눈이 아른거려서 잘못 봤나 봐.”
이동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수련은 의아한 듯 이동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이 밝은 대낮에, 그것도 사찰 안 불조 손바닥 안에서 귀신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괜찮아. 잠깐 어지러워서 헛것을 봤나 봐. 배고파서 그런 거 같아. 가자.”
이동은 핑계를 대고 수련이 대답하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태평부.
항보량은 포정사 관아 맞은편에 서서 결심을 굳히고 걸음을 내디뎠다. 전쟁터에 발을 내딛는 것처럼 관아 입구까지 돌진한 그는 나른하고 거만한 표정의 문지기를 가리켰다.
“들어가서 내가 좀 만나자고 한다고 좌 선생께 전해라.”
문지기는 입을 반쯤 벌리고 머저리 보듯 항보량을 잠시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생이요? 좌 선생을요? 그 말씀은, 좌 선생더러 얼른 나와서 서생을 뵈라는 거지요? 맞지요?”
“동 사사의 앞날,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전해라! 지금, 바로, 만나야 한다고 전해라!”
항보량은 기세등등하게 외쳤지만, 다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입을 축 늘어뜨리고 허허 헛웃음 쳤다.
“아이고! 큰일이네요! 알겠습니다요. 그럼 저쪽에서 기다리십시오. 천천히 기다리십시오.”
항보량은 너무 긴장해서 문지기의 표정, 말투에 가득한 조롱,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하고 정말로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다가갔다. 맞은편 구석에 온몸이 뻣뻣이 굳은 채 서서 좌 선생이 나오길 기다리며 관아 대문을 빤히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단옷을 입은 종복 차림의 중년 사내가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곧장 항보량 앞에 나타나서 웃으며 공수했다.
“우리 선생을 만나시겠다고요?”
“자네는?”
항보량이 사내를 살폈다.
“아, 항 대재자셨군요. 문회에서 크게 이름을 날린 대재자시군요.”
종복은 겉으로 공손한 척해도 뼛속까지 오만함이 묻어났다.
“무슨 일로 우리 선생을 찾아오셨는지요? 말씀하십시오.”
“좌 선생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겠네!”
항보량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강인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썼다. 종복이 코웃음 쳤다.
“우리 선생을 만나서요? 지금요? 농담도 참. 서생이 아니라 흠차가 오신대도 우리 선생을 지금은 못 만납니다. 서생은 다 이치에 밝다더니, 우리 선생이 지금 무슨 일로 바쁜 건지 어째서 생각을 못 하십니까. 서생을 만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라고요? 부정행위라는 큰 사달이 벌어지는 것 아니냔 말씀입니다.”
“바로 이번 추시에서 벌어진 부정행위로 찾아온 걸세!”
항보량은 다급해졌다.
동 사사는 시험장에 갇혀서 시험지를 읽어야 해서 추시 방이 붙기 전에는 시험장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그게 국법이라 동 사사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다. 좌 선생도 분명 지금 동 사사와 시험지를 읽고 있을 것이다. 그 점은 물론 잘 안다. 하지만 좌 선생은 관리가 아니라서 만나려면 만날 수 있었다.
“예?”
종복의 안색이 변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항보량을 매섭게 노려봤다. 항보량은 마음이 놓였다.
이 종복도 그 일을 아는구나. 그렇다면 일이 쉬워지지.
“추시 시제를 파는 사람이 있었네. 천 냥에 한 문제, 아주 공평했지! 가서 좌 선생께 나를 만날 건지 말 건지 여쭤보게!”
항보량의 매서운 표정에 종복은 샛눈을 뜨고 뒷걸음치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리, 진정하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만요.”
종복이 측문으로 들어가자, 항보량은 무심결에 몇 걸음 따라가서 골목 앞에 멈춰 섰다. 안으로 들어간 종복은 잠시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는, 목을 길게 빼고 골목 안을 바라보는 항보량을 향해 손짓했다. 항보량이 다급하게 달려가자, 종복이 빙그레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 뒤에 있던 두 사람이 성큼 나오더니 손날을 휘둘러서 항보량을 때려 기절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