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83화 (183/463)

183화: 가을 바람이 불다

계 천관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제 잘못입니다. 주가가 이런 작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영가아를 억압하려고 이렇게 할 줄 차마 생각 못했습니다.”

백 노부인이 살며시 아들을 토닥였다.

“이건 네 탓이 아니다. 장공주 말이, 주가가 이번 일은 매우 잘했다고 하더구나. 정정당당한 계략이지. 우리가 흠을 잡을 거리가 없다. 주가에서 웬일로 이런 뛰어난 수완을 벌였구나.”

“그럼 강남 문제는요?”

계 천관은 고개를 들고 모친을 바라봤다. 백 노부인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강남 추시의 부정행위, 그 건을 온 세상에 다 알려야 합니다. 세상이 시끄러워지면 강남 서생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내년 춘시에 북부 서생을 밀어붙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강남의 진정한 재자를 많이 등용하여 강남 민심을 다스려야 할 겁니다.”

백 노부인이 아들을 직시했다.

“그리 마음먹었으면 네 생각대로 하여라. 네가 마음먹으면 된다. 영가아가 일개 거인이 되는 문제로 사왕야가 직접 말을 꺼낼 정도다. 강남 일에 우리가 손을 쓰면, 우리가 손 쓴 것을 감추긴 어렵다. 영가아가 올해 거인이 되고, 내년에 진사가 되면, 우리 집안과 주씨 가문, 궁에 있는 그분, 그리고 두 분 왕야와 새로운 원한이 생긴다. 언젠가는 온 가문이 멸문할 큰 화가 되겠지.”

“어머니. 백세 천자는 없다지만, 황상은 올해 겨우 마흔다섯입니다. 아무리 짧아도 10년은 더 사실 겁니다. 황상이 떠난 후에 대황자 혹은 사황자가 보위에 오르면 또 적어도 30년 아닙니까. 계가가 지금처럼 탄압받으면, 멸문하지 않아도 몰락할 것입니다.”

계 천관은 백 노부인과 상의한다기보다 자기를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끝까지 양보해도 결국엔 죽음뿐입니다. 그럴 바에야 앞으로 나가는 게 낫습니다. 방법이 없을 땐 나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결심했다면, 그 걸음을 몇 걸음이나 내디딜지, 어떻게 내디딜지, 방향이 있어야 한다. 황상에겐 모두 아들이 넷이니, 일단 그것부터 정해야 한다.”

“여 승상과 함께 네 황자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삼왕야가 성품도 너그럽고, 성질도 온화합니다. 진언도 잘 듣고, 외척이 세를 부릴 일도 없습니다. 평범하긴 하나, 평범한 게 꼭 나쁜 점만은 아닙니다.”

백 노부인이 한참만에 대답했다.

“다음 법회 때 장공주와 이야기해 보마. 장공주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찬찬히 이야기해 보마.”

계 천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님, 장공주는 보림암에서 오랜 시간 칩거했습니다. 궁 안엔…… 저는 실로 장공주를 모르겠습니다. 권력을 농단할 생각이라기엔 보림암에 칩거하고 세상일을 외면합니다. 그렇다고 속세를 떠나서 수행한다고 하기엔, 궁 안의 일을 훤히 꿰고 있습니다. 궁정을 멀리한다고 하면서도 또 궁의 일을 붙들고 놓지 않습니다.”

백 노부인이 대답하지 않자 계 천관이 멈칫하다가 계속했다.

“그리고 혼사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태후가 고른 사람이 흡족하지 않아서 그랬겠지요. 그건 틀린 게 아닙니다. 여인은 사람을 잘 골라야 하니까요. 하지만 나중엔 태후도, 황상도, 직접 고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보림암에 숨어서 출가도 아닌 것이, 집에 있는 것도 아닌 듯이 삽니다. 대체 이게 무엇입니까? 애초에 황상은 선황 앞에서 하늘에 맹세했습니다. 장공주의 일생을 편하게 돌보겠다고요. 장공주가 이러면 황상이 어찌 고개 들고 삽니까. 황상이 성격이 좋고 배포가 커서 다행이지요.”

“네 부친께서 살아계실 때 자주 내게 장공주 이야기를 했었다. 매번 장공주가 어째서 사내가 아닌지 한탄했다. 선황께서 그렇게 장공주를 아끼고 가르친 것이 앞으로 장공주에게 해가 되진 않을까 한탄하며 마음 아파하신 적도 많다. 인제 보니 네 부친의 말이 맞는 듯하구나.”

백 노부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장공주 일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일이나 신경 쓰면 된다.”

“예, 그럼 다시 강남에 서신을 보내 보겠습니다.”

백 노부인은 밖으로 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장공주 생각에 잠겼다.

강남 태평부 청양진.

곡 대낭자는 가씨와 한참 동안 상의한 끝에, 가씨의 말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경성에 들어갈 때 어머니를 데리고 갈 수도, 어머니 혼자 청양진에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를 데리고 가자니, 어머니의 몸이 너무 병약한데 가는 길에 눈을 감으면 관을 들고 다시 청양진으로 돌아와야 한다. 돌아와서는 상을 치러야 하고, 상 한 번 치르면 3년이 흐른다. 인생이 끝나는 것이다.

어머니를 청양진에 두고 가자니, 어머니는 몸도 좋지 않고 눈도 멀었다. 그런 어머니를 버리고 가는 것도 불효다. 나중에 누군가 트집을 잡으면 앞날을 망치게 된다.

함께 갈 수도 없고, 내버려 두지도 못하고. 차라리 태태를 태평부의 암자 하나를 골라 한동안 모시라고 가씨가 방도를 냈다. 경성에서 자리 잡은 다음에 사람을 보내 모셔가면 모든 것이 면밀하다고.

그렇게 하기로 한 곡 대낭자는 오 태태가 아무리 울어도 들은 체하지 않았다. 오로지 곡 대낭자의 말만 듣는 가씨는 또 얼마나 유능한지, 이틀 만에 종복과 호위를 고용하고 배를 빌렸다. 그렇게 짐을 모두 꾸려 줄줄이 마차에 실어 배에 옮긴 다음 오 태태를 끌고 마차에 태워 배에 올랐다,

가씨는 곡가 낡은 집을 이웃에게 맡기고, 태태가 대낭자를 데리고 경성 친척에게 의탁하러 간다고 말을 퍼트렸다.

다음 날 태평부에 도착한 곡 대낭자는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암자를 찾고 오 태태를 암자로 보내는 일을 모두 가씨에게 맡겼다.

오 태태는 딸의 손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딸아,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경성이라니……. 나는 괜찮다. 오 어멈과 함께 가거라. 소쇄도 데리고 가거라. 어미는 스스로 돌볼 수 있다. 딸, 조심해야 한다…….”

왕 어멈은 눈물을 훔치며 쉴 새 없이 가씨를 욕하고 대낭자에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태태를 못 데리고 갈 이유가 뭡니까? 천천히 가면 되지요. 저 가씨가 사기꾼이면 어쩌려고요. 가씨! 이 악독한 것! 우리 태태와 대낭자를 해치러 온 것이구나!”

곡 대낭자는 못 들은 체했고, 가씨는 더더욱 상대하지 않았다. 오로지 오 태태만 들을수록 걱정이 돼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딸아, 이 어미 말 한마디만 들어라. 경성 이야기…… 정말인지 거짓인지 어찌 알겠느냐. 어미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네가 속아서 어찌 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찌 사느냐.”

“대낭자, 시간이 이르지 않습니다. 이왕 마음먹은 것, 서둘러야지 늦어지면 좋을 것이 없어요.”

가 어멈은 성가셔져서 대낭자를 재촉했다.

“자넨 나와 경성에 갈 것 없으니 어머니와 함께 가.”

곡 대낭자는 왕 어멈에게 한마디하고 돌아서서 가씨에게 분부했다.

“사람은? 얼른 태태를 암자로 모시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딸아! 어미는 괜찮다. 왕 어멈을 데리고 가라. 내 딸, 왕 어멈이 네 곁에 있어야 이 어미도 마음이 놓인다.”

오 태태는 건장한 어멈 둘에게 끌려가면서 곡 대낭자의 소매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딸아, 어미는 괜찮다. 왕 어멈을 데리고 가라.”

가 어멈이 곡 대낭자를 향해 눈짓했다.

“데리고 가도 됩니다. 어차피 은자를 많이 주어서, 암자에 태태를 돌볼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곡 대낭자는 쉴 새 없이 우는 왕 어멈을 넌더리 나는 듯 힐끔 보았다. 왕 어멈이 말이 너무 많았다. 왕 어멈을 데리고 가서 입단속 시키는 게 좋겠다고 가 어멈도 그녀에게 상기시켜 주었었다. 태태 곁에 두었다가, 불효녀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면 어쩌냐고.

가는 내내 울어대던 오 태태가 배에서 끌려 내려가듯 내려서 처박히듯 마차에 태워지자, 가씨는 뱃사람에게 경성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태평부.

조재를 통해 곡 대낭자가 태평부를 떠나 경성으로 향하게 된 세부 내용을 들은 문 이야는 헛웃음 쳤다.

“내가 사람을 참으로 잘 보았구나. 무정하고 의리 없고 악랄한 사람이 맞았어. 지금부터 그 낭자는 너희 나리에게 맡기겠네.”

“마음 놓으십시오, 이야.”

조재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음. 추시 일이 곧 터질 걸세. 자네와 형제들은 태평부에 며칠 더 있게. 여기에 사람이 부족하네.”

“예. 모든 것을 이야의 명대로 따르라는 나리의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럼 됐네. 자넨 이만 돌아가게. 며칠 신경 써주고.”

조재가 물러간 후 문 이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공대를 돌아봤다.

“청양진 쪽은 다 처리했느냐? 후환을 남겨선 안 된다.”

“처리했습니다. 다만 정 매파가 어제도 찾아와 들러붙었습니다. 곡 대낭자가 안 되면 서생 가문 낭자가 몇 명 더 있다고요. 용모, 인품 다 곡 대낭자와 버금간다고요. 노야께서 시간이 나지 않으면 태평부로 낭자들을 보내겠다고요.”

문 이야는 목이 메어 콜록거렸다.

“태평부, 풍기가 어쩌면 이렇게 혼란스럽지. 정말로 서생 가문 낭자라더냐?”

“길게 묻지도 못했지요. 물어서 어쩌게요.”

공대가 어이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휴! 풍기가 이렇게 된 것에 동민 책임도 있겠지! 그런 동민을 없앴으니 적어도 그 점에서는 우리가 이번 일로 공을 세운 셈이겠군!”

항보량은 서생 사이에 껴서 비틀비틀 시험장 밖으로 나오다가 급하게 자기 나리를 찾는 사환과 부딪혀서 빙글 돌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구니 안의 필묵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항보량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모든 이가 밝게 웃고 있는 듯했다.

그 시제, 진짜였다니!

처음에 시제를 봤을 때부터 혼이 나갔었다.

그 시제로 다른 사람에게 열몇 편이나 글을 지어줬었다. 그때는 껄껄 비웃기까지 했었다. 사람들이 허튼소리를 믿고 지푸라기를 생명줄처럼 잡은 걸 보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었었다.

항보량은 바닥에 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시제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울리고, 후회되고 분노했다.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긴장됐다.

밖에서 시제를 보았을 때 떠오른 영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항보량은 자기가 어떻게 객잔으로 돌아왔는지, 어떻게 방으로 돌아갔는지도 몰랐다. 이른 아침 햇살이 창을 통과해 그의 얼굴을 비추자, 항보량은 몸을 움직여서 햇살을 마주했다. 햇살이 너무 눈이 부셔서 오히려 생기가 조금 돌았다.

항보량은 손을 뻗어 의자 팔걸이를 더듬어 잡고는 제 몸을 끌어당기며 서서히 일어나다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탁자에 가득 쌓인 서책, 붓걸이에 주르륵 걸린 붓을 바라보며 껄껄 웃다가 다시 통곡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구나! 아니, 아니지. 이번 추시는 돈으로 순위를 사 오는 공개적인 부정행위다. 추문이다. 내가 낙선한다면 부정행위 때문이다. 나는 재와 덕을 겸비한 사람이다. 추시를 공평하게 치렀으면 절대로 낙선할 리가 없지 않나.

탐관오리, 부정행위에 내가 피해를 봤구나.

항보량은 탁자를 잡고 벌떡 일어섰다. 내가 나서서……. 아니, 아니, 아니.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들어야겠다. 일단 동 사사를 찾아가 설명을 들어야겠어! 설명 하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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