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82화 (182/463)

182화: 몽땅 끌어들이다

장 선생이 말이 없자 대황자가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

“그래서 그 물증을 언제까지 남겨둘 셈이냐? 관짝 재료로 쓸 때까지?”

“왕야, 왕야는 아직은 잠룡입니다. 그 성질, 억누르셔야 합니다. 만사, 황상의 생각을 읽으셔야 합니다. 귀비는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떻게 움직일지, 무슨 말을 할지, 모두 황상, 귀비의 뜻대로 하셔야 합니다. 황상과 귀비께서 모두 왕야와 사왕야가 우애 좋게 지내는 걸 바라시면, 그것부터 하셔야 합니다.”

장 선생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대황자가 화를 내며 말을 무질렀다.

“어째서 내가 먼저 해야 해! 그놈이 아우다! 형님은 아버지와 같다 했다! 그놈이 먼저 이 몸을 공경해야지!”

“왕야, 몇 번 말씀드렸습니까. 왕야가 우애로운 형님 역할을 잘하고, 사왕야가 갈수록 못난 아우가 될수록 좋다고요. 왕야, 황상과 귀비의 편애를 바라는 것 아니십니까? 사왕야는 형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갈수록 황상과 귀비의 환심을 사는 것입니다.”

“그놈이 형님을 공경해? 모비의 눈을 가리고 부황의 눈을 가린 것일 뿐이다! 짐승 같은 놈!”

장 선생은 헛기침을 억누르고, 대황자의 고함이 들리지 않는 듯이 계속 말했다.

“그거면 됐지요. 황상과 귀비를 속이면 충분합니다. 사왕야가 왕야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게 아니듯이, 왕야도 진실로 우애로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왕야가 눈 가리고 아웅 한다면 왕야도 그러셔야지요. 황상과 귀비의 환심을 사기만 하면 됩니다.”

“선생의 말이 옳습니다.”

주유해도 얼른 나서서 설득했다.

“사실 귀비 마마는 왕야를 가장 아끼십니다. 왕야의 성격이 너무나 올곧아서, 사왕야가 이득을 보는 겁니다. 귀비 마마, 황상에 대한 효심을 따지자면 사왕야는 왕야와 비교가 안 됩니다. 왕야, 이렇게 올곧기만 하면 안 됩니다. 왕야, 무슨 일이 있어도 황상과 귀비의 환심을 사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그러지 못하면, 죽음뿐입니다.”

장 선생이 싸늘하게 말을 받았다.

대황자는 그 말에 얼굴이 새파래졌고, 주유해는 서둘러 분위기를 풀었다.

“왕야도 성격이 올곧고, 선생도 성격이 올곧아서, 원.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왕야는 황상과 귀비가 가장 아끼는 분입니다. 왕야, 그냥 효도하는 셈 치십시오. 효도라는 게 부모의 마음을 따르는 것 아닙니까. 이번 사안은 갈 길이 멉니다. 선생이 후수를 남긴 이상, 이대로 그들이 이득 보도록 끝까지 두진 않을 겁니다. 왕야, 화 좀 푸십시오. 선생, 왕야께서 바로 입궁해서 귀비께 이 일을 고하는 게 좋겠습니까?”

“음, 왕야, 이걸 아셔야 합니다. 왕야와 사왕야의 차이는 황상과 귀비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 뿐입니다.”

“흥.”

장 선생이 바라보며 하는 말에 대황자는 한참만에 내키지 않은 얼굴로 콧방귀 뀌었다. 대답인 셈이었다.

단숨에 경부 관아로 달려 들어간 주육은 한창 신나게 주사위 놀이하는 영원을 끌고 나와 답을 청했다. 이야기를 들은 영원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 일? 네게 방법이 없듯이 나는 더 없다. 거꾸로 사왕야가 아라를 원한다면 방법이 없진 않지만.”

“사왕야가 아라를 원하기만 하면, 방법이 필요할 게 무어야. 그냥 왕부로 들이면 그만이지. 형님, 제발, 방법 좀 생각해 주시오. 꼭 도와줘야 해.”

주육이 영원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라에게 뭐라고 약속한 것이냐? 이런 일도 감히 약속하다니!”

“다른 이야기는 안 했소. 사왕야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지. 다 이 입이 방정이라 문제요. 사왕야는 너 같은 여인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번 말했더니 이렇게 되었어. 널 보면 분명 몹시 예뻐할 거라고 했더니, 그걸 마음에 담아뒀을 줄 누가 알았겠어. 고 계집애가 이번 일을 겪고 식겁했나 보오. 그럴 만도 하지. 사왕야를 잡으면 그야말로 거대한 뒷배를 두는 거니까. 맞다. 연향루에서 희생양으로 내놓은 그놈, 어떻게 되었소?”

“즉결 참수.”

영원이 느릿느릿 말하자, 주육이 부르르 떨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하긴, 황가의 존엄이 달린 문제니 황가와 얽히면 사소한 일이 없다고 아버지도 말씀하셨었지. 됐다, 됐어. 그건 됐고, 원 형님, 방법 좀 생각해 주라고!”

“아라를 데리고 사왕야를 만나러 가기로 한 것이 어려울 게 무엇이냐. 추시 방이 나왔지?”

“곧이오. 이삼일, 사나흘이면 시험이 끝날 것이고, 시험이 끝나면 곧 방이 붙지. 형님,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말고 본론 이야기하자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본론이다!”

영원이 주육을 흘겨봤다.

“추시 방이 붙으면 새 거인이 세상에 나온다. 내년 춘시도 몇 달 남지 않았으니 사왕야도 문회, 화회 등 이런저런 걸 슬슬 열어야겠지.”

영원이 마구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었다.

“나라를 위해 인재를 모아야 하니까. 문회, 화회엔 당연히 무희, 기녀가 필요하지. 그때 아라를 데리고 가서 사왕야 앞에 보이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니냐?”

“그렇지!”

주육은 큰 깨달음을 얻고 허벅지를 내리쳤다.

“하지만……. 아! 아라가 자기도 교방에 이름을 올렸다고 했지. 교방에 이름이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지. 형님, 정말 좋은 수요!”

“계소영은 급제하려나.”

영원은 두 다리를 높이 치켜들고 갑자기 한마디 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헉!”

주육은 말을 하다가 말고 정신을 차렸다. 계소영과 내기를 했었지, 참!

“이번에 급제하더라도 다음 시험이 있는걸. 춘시는 추시보다 훨씬 더 어렵소. 이번에 급제하면 무얼 해. 삼일천하지, 뭐.”

영원이 매우 기분 안 좋은 모습으로 다리를 흔드는 걸 본 주육은 다가가서 의아한 듯 물었다.

“형님, 왜 그러지? 기분이 안 좋은가? 무슨 일 생겼나?”

영원의 골치 아픈 얼굴이 더 짙어졌다.

“별일 아니다. 그저, 우리 형제가 반년 동안 고생했는데, 네가 금어대를 얻은 것 외에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것 같아서 그러지. 지금까지 난 매일 관아에서 심부름이나 하고 주사위 놀이나 하고. 너와 묵칠, 자람도 나을 것이 없지. 내 보기에 내년 춘시에서 계소영은 급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식으로 춘시, 추시에서 급제한 진사가 되는 거지. 앞으로 승관할 때도, 아무 수단 없이 공정하게 해도 우리보다 배는 빠르게 올라갈 거다. 내 보기엔 말이다, 운 나쁘면 2년 안에 계소영이 우리 상관이 될 수도 있다.”

주육이 화가 난 듯 혀를 찼다.

“쯧! 공정은 무슨! 우리가 그놈을 두려워해야 하나?”

“계소영의 부친이 천관이다. 그 줄을 생각하면, 너희 집에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더냐? 우리 가문에 그쪽으로 또 누가 있고. 아이고!”

영원은 울적한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줄곧 고민했는데, 차라리 북삼로로 돌아갈까도 싶다. 기껏해야 큰형님, 그리고 아버지를 견디면 되는 것 아니냐. 경성에서보다 낫겠지. 이 경성에서 살자니, 이 몸의 코에 식초를 들이붓는 기분이다!”

“누가? 누가 형님 코에 식초를 들이붓는다는 거야? 누가 감히? 형님, 말만 해. 이 아우가 나서 주겠어!”

주육이 노기등등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됐다. 별일도 아니다. 참으면 그만이다.”

영원은 무사안일이 최고라는 듯 손을 저었다.

“형님, 그럼 계소영이 급제하도록 두면 안 되겠군!”

주육이 영원에게 다가가 속삭이자, 영원이 삐딱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럴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나야 없지. 하지만 사왕야는 있지! 계가와 우리 가문은 원한이 있다고!”

주육은 아예 의자를 끌고 와서 귓속말했다.

“계소영 고모가 예전에 우리 고모님이랑……, 그 왜 있잖아. 그때 난 아직 어렸을 때였지. 일곱 살, 여덟 살쯤 되었을 때였지? 할머님과 함께 고모님을 뵈러 입궁했을 때, 계 황후와 계가를 욕하는 걸 들었어. 언젠간 계가를 부숴버리겠다고 하셨어. 음, 고모님을 만나야겠어! 아예 황상께 말씀드리도록 해서 황상 입에서 말씀이 나오게 해야겠어!”

영원이 노려보자, 주육이 ‘아’ 소리를 냈다.

“그건 안 되지. 후궁에서 국정에 관여해선 안 되지. 황상께선 그걸 제일 싫어하시지. 역시 사왕야를 찾아가야겠다. 그리고 고모님께도 사왕야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음, 그렇게 해야겠어! 갑니다! 영원 형님, 화내지 말라고. 이 경성에서 우리가 무서울 사람이 어디 있나? 저녁에 내가 한턱내겠소. 형님, 기분 좀 풉시다. 그 김에 아라의 불길한 일도 씻어주고.”

주육은 계소영의 앞날을 막을 생각에 흥분해서 두 눈을 빛내며 서둘러 몇 마디하고는 달려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원의 얼굴이 조금씩 흐려졌다.

문도의 말이 맞았다. 모든 관건이 주 귀비에게 있었다.

그런데 그 관건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추시 마지막 날, 시험장 입구에서 이신과 여염은 받침대 위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계소영이 나오길 기다리며 시험장 문을 지켜봤다.

기운이 다 빠진 서생들이 봉두난발을 하고 바구니를 든 채 하나둘 시험장에서 나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계소영도 봉두난발하고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 여염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신을 바라보며 웃어댔다.

“저 친구 저 꼴 좀 보라고. 저 친구도 이런 날이 오는군!”

“예전에 자네는 안 그랬고?”

이신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여염도 웃으며 이신과 함께 계소영에게 다가갔다.

“나도 비슷했지. 하지만 저런 꼴을 보니 역시 후련하군. 재자, 우아한 서생 할 것 없이 시험장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들어갈 땐 재자, 나올 땐 거지!”

여염과 이신이 다가갔을 때, 계소영 곁엔 사환과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여염과 이신 두 사람을 본 계소영은 기운 없이 공수했다.

“일단 돌아가서 잠부터 푹 자고 두 분에게 인사하러 가겠네.”

“인사는 필요 없네. 나와 이 형은 자네의 이런 낭패스러운 꼴을 보러 온 거니까.”

여염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장원에 갇혀서 몇 달 동안 밤낮으로 같이 지내는 동안 마음이 맞게 된 이 세 사람은 어느새 정이 깊어지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순조로웠는가?”

“그럭저럭 괜찮았네.”

이신이 다정하게 묻자 계소영이 대답했다.

“얼른 너희 공자를 모시고 돌아가라. 자넨 푹 쉬고, 내일 우리가 연회를 마련해 주겠네.”

여염과 이신이 뒤로 물러나자, 계소영은 두 사람을 향해 공수하고 사환을 붙들고 마차에 올라서 저택으로 돌아갔다.

아들을 방으로 들여보낸 계 천관이 서재로 돌아가자 심복 관사 수안이 따라 들어가 나직이 보고했다.

“노야, 아까 기별이 들어왔습니다. 사왕야가 말을 넣었답니다. 우리 대야가 재능과 명성이 높긴 하지만, 사실 그 이름값을 못 한다고요. 거인으로 뽑히기엔 부족한 점이 많으니 신중하게 보라고 했답니다.”

계 천관은 꿈쩍도 하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있지만, 눈가에 분노가 치밀었다.

수안은 계 천관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까 주 추밀부사가 궁에서 나와서 고 사사를 만나러 갔습니다. 두어 달 안에 벌써 다섯 번째 만나는 겁니다.”

계 천관은 한참만에 대답했다.

“음. 알겠네. 산서 추시 방을 지켜보라고 하게. 나오면 곧바로 옮겨서 보내고.”

수안이 공손하게 물러간 후, 계 천관은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모친 백 노부인을 만나러 후원으로 향했다. 백 노부인은 아들의 말을 다 듣고 한숨을 살포시 내쉬었다.

“너와 영가아 모두 네 부친의 기개를 닮았지. 하지만 너와 영가아 모두 네 부친의 배포와 속셈이 없다.”

“어머님.”

계 천관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듯 고개를 떨궜다.

“네 탓이 아니다. 네 부친 같은 분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느냐.”

백 노부인의 표정은 담담했다.

“장공주는 그런 네 부친도 경탄하던 분이다. 그런 분의 말씀이 틀림이 있겠느냐. 우리와 주가의 은원은, 우리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만 상대는 불구대천의 원한으로 여긴다. 영가아가 과거를 보기로 했을 때, 이런 방해가 있을 거란 걸 나는 진작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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