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이 막역지우, 누구시더라?
강 백야는 후다닥 일어나서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알아보지 못해 송구하오. 누구신지요.”
“역시 강 형이군! 오랜만에 만났는데 풍채가 훨씬 더 좋아졌구려!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강 형을 이리 우연히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 우리 형제, 정말 삼생삼세의 인연이 아닐 수가 없군!”
사내는 매우 들뜬 모습이었다.
“과찬이오, 과찬. 실로 보통 인연이 아니군요.”
강 백야는 어리둥절한 가운데 웃음 띠며 인사했다. 상대의 들뜬 모습에 강 백야는 감동이 가득 차올랐다.
“세상에, 14년만인가? 그렇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14년이 흘렀어!”
그래서, 댁은 뉘신지?
강 백야는 다급해져서 미칠 것 같았다. 어째서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야! 이게 다 그 불효자식 때문에 속이 터져서이지! 이런 막역지우를 다 잊어버렸다니!
“강 형, 십여 년 동안 잘 지냈소?”
사내가 들뜬 눈물을 흘리며 정다운 눈빛으로 강 백야를 훑어보며 물었다.
“그럭저럭 괜찮소. 자네는 잘 지냈소?”
강 백야는 땀이 다 흘렀다. 대체 누구더라? 어째서 이렇게까지 생각이 나지 않을까?
사내는 강 백야 맞은편에 앉아서 차박사(茶博士: 찻집의 심부름꾼)를 불렀다.
“고급 설봉차가 있는가? 예전에 설봉차를 제일 좋아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사내가 웃으며 묻는 말에 강 백야는 속으로 매우 흥분했다. 십여 년 전에 설봉차를 가장 자주 마셨었다. 지금도 매우 좋아하고. 다만 너무 비싸서 마실 수가 없지만.
“지금도 그렇지!”
강 백야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옛 친우, 대체 누구실까?
“좋은 다과도 내오고! 이 탁자도 내가 돈을 내겠네. 그래야 우리 이야기 나누는 데 방해되지 않지.”
차박사에게 분부한 사내는 돌아보며 강 백야에게 설명했다. 강 백야는 속이 후련해졌다. 이런 배포 있는 사내가 가장 좋지! 이런 친분을 어째서, 왜,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 걸까?
“아이고!”
차박사에게 분부를 마친 사내는 이어서 강 백야와 옛이야기를 나눴다.
“그해에 가부가 병이 깊다는 서신을 받고 서둘러 돌아가서 부모님 시중을 들었소. 가부의 병환이 서서히 회복됐는데, 가모의 병이 갑자기 심해질 줄이야. 반년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소.”
사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가부도 너무 상심한 나머지 병환이 돌연 심각해져서 반년 시달리다가 가모를 따라가셨지. 그 당시…….”
얼굴을 가린 사내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죽지 못해 살았소. 그렇게 부모님 묘 앞에서 6년 동안 상을 치렀지. 휴.”
사내는 한숨을 내쉬고 한참 만에 마음이 편안해진 듯 말을 이었다.
“정리하고 경성으로 들어오려 했는데, 자식놈이 글 실력이 조금 있어서 집에 남아 2년 정도 글공부를 돌봐 주었소. 거인이 된 다음엔 견문을 넓히러 2년 정도 함께 돌아다녔고. 그러다 보니 올해에야 경성에 들어오게 되었소.”
“영랑(令郎: 남의 아들의 경칭)이 이미 거인이 되었소? 경사스러운 일이군! 축하하오, 축하해!”
강 백야는 드디어 할 말이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이 막역지우의 성이 무엇이요, 이름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불행 중에 자그마한 위로지. 14년 전, 내가 막 거인이 되어 기세등등할 때, 춘시를 보러 경성에 들어왔다가 강 형을 알게 된 것 아니오. 그 당시 우리 형제 셋이 밤새 학문을 나누고 시를 읊느라고 얼마나 즐거웠소. 맞다. 곡 형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군. 그때 다급히 떠났을 때, 곡 형이 몸이 안 좋았지.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와 곡 형 모두 강 형에게 큰 신세를 졌지. 강 형, 고맙소.”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 백야에게 깊이 장읍했다.
“아니오, 아니야. 무슨 그런 말씀을.”
강 백야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째서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냐! 곡 형? 곡 형이 누군데?
“여기 오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 강 형과 곡 형이 어찌 지내는지 알아봤었소.”
사내가 자리에 앉으며 하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멀끔한 차림의 종복이 다가와서 장읍하며 예를 갖췄다.
“나리! 알아냈습니다. 곡사광, 곡 노야는 노야께서 고향으로 돌아간 지 반달 안에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답니다. 그렇게 동보안사 뒤에 묻었답니다. 강 백야는…….”
“말할 것 없다. 강 백야는…….”
사내는 비처럼 눈물을 흘리며 더 말할 것 없다는 듯이 강 백야를 가리켰다.
“곡 형이…… 곡 형이…… 세상에나…….”
강 백야는 하마터면 보살님을 외칠 뻔했다. 운이 너무 좋은걸! 곡 형 이름이 곡사광이라고? 그렇지만, 그래도 떠오르지 않는걸? 누구? 병으로 죽었다고? 죽었다! 아마도 너무 슬퍼서 잊은 게로군!
“그래서 강 형이……. 강 형은 내가 슬퍼할까 봐 그랬군. 정말이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군!”
사내가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통곡했다. 강 백야도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다.
“그 당시 곡 형의 재주가 가장 뛰어났지. 우리 중에 곡 형은 재상이 될 재능이 있다고 강 형도 여러 번 말하지 않았소.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사내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듯했다.
강 백야 역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세상에. 재상이 될 재능을 가진 생사를 나눈 벗이 죽었다니! 그의 죽음이 너무나 슬퍼서 잊은 걸까?
“그 당시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노닐 때, 강 형과 곡 형이 나란히 서 있으면 그 풍채가 얼마나 눈에 띄었나. 그런데…… 정말 마음 아프구나, 마음이 너무 아파!”
곡 형이…… 나와 풍채가 비슷했다니. 내 풍채에, 재상의 재능을 지닌 벗이라……. 그런 친분이 있는 좋은 벗을 잊었단 말인가?
“그만합시다, 그만해. 그 당시, 휴, 그런 시간을 강 형은 대체 어떻게 이겨냈소. 내가 알았다면, 내가 알았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거요!”
사내는 얼굴을 가렸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정말로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그만합시다! 우리 형제가 다시 만난 건 큰 기쁨이지.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군. 휴, 마주 앉아 있으면 곡 형이 떠오르지 않겠소. 너무 슬픈 일이야. 우리 배를 빌려 강을 따라 유람하며 경치 구경합시다. 그래야 마음도 좀 풀리지. 그때, 강 형과 곡 형 모두 달빛 아래 변하의 풍경을 가장 사랑했지. 그때 우리 세 사람……. 휴!”
강 백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배 위, 달빛 아래,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좋은 술에 좋은 안주, 청아한 곡조, 요염한 미인, 확실히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때 심 대가의 소곡이 가장 인기 많았지. 태후께서 종종 궁으로 불러가고 말이오. 그때 심 대가와 함께 배로 변하에서 노닐고 싶어서 몇 번이고 청해도 좀처럼 부르지 못하고 가끔 멀리서 노래하는 소리나 들었었지. 정말 좋은 노래였는데, 요즘 심 대가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군. 하하. 그때 강 형이 심 대가의 마음을 얻을 일념으로 좋은 것만 생기면 청음루에 보냈었는데.”
사내는 달빛 아래 변하의 경치를 더듬으며 심 대가 이야기를 했다. 강 백야는 들을수록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젊었을 때 그가 가장 연모한 여인이 바로 심 대가였다. 수많은 머리 장식을 보내고도 마음을 얻지 못했다. 이 벗이 그런 것까지 다 아는 걸 보면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걸까?
“그러게 말이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옛일이라 웃음이 나는군. 심 대가는 목이 상해서 더는 노래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하지만 명창 제자를 키워냈소. 운수라고, 풍채며 음색이며, 예전에 심 대가와 버금가는 아이요.”
강 백야는 예전의 심 대가, 그리고 몇 번 만나본 운수를 떠올리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운수는 예전의 심 대가보다 훨씬 요염하고 어여뻤다.
“그럼 불러옵시다! 여봐라, 가서 내 이름…… 아니 내 체면은 쓸모없지. 강 형의 이름이 있어야 가능하겠지. 가서…… 아직도 청음루인가?”
사내는 강 백야를 돌아보며 확인하고는 종복에게 계속 분부했다.
“잠두(蠶頭: 예인에게 주는 돈)를 많이 준비해서 가거라. 수녕백부 강 백야가 달빛 아래 변하에서 배로 노닐자고 운수를 부른다고 전해라.”
종복이 물러간 후, 사내가 일어섰다.
“강 형, 우린 배에 가서 기다립시다. 오늘 제대로 회포 풉시다. 그동안의 그리움을 제대로 풀어야겠소.”
강 백야도 서둘러 따라 일어나서 아래로 내려갔다. 변하 가에 커다랗고 새로운, 화려하고도 운치 있는 놀잇배가 이미 정박해 있었다. 놀잇배 위에 열대여섯쯤 된 요염하고 아름다운 기녀 서넛이 선창 문 앞에 서 있다가 두 사람을 보고 살랑살랑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두 사람이 배 위에 오르자, 종복과 시녀가 줄지어 좋은 술, 음식, 신선한 과일을 들고 올라왔다. 물건을 막 옮겨놓자마자, 종복이 쉰쯤 된 노인을 데리고 와서 공손하게 선창 앞에서 고했다.
“노야. 장기 당두가 당도했습니다.”
“뒤쪽 주방으로 데리고 가라.”
사내는 분부하고 강 백야를 돌아봤다.
“강 형이 예전에 장기 음식을 가장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오. 기름기가 적당해서 담박하고 깔끔하다고 했었지.”
“아이고, 이런. 이렇게까지 마음 써주다니.”
강 백야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진정한 벗이로세!
하지만 누구? 어째서 아직도 떠오르지 않을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작은 가마가 뭍에 멈추더니 휘장이 열리고 운수가 시녀의 손을 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강 백야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운수를 빤히 바라봤다. 잠두를 얼마나 주었기에? 정말로 운수가 오다니! 진실한 벗이로다. 오래된 벗이야말로 진정한 벗이지!
이런 벗을 잊었다니. 죽어 마땅하구나!
뱃사공이 대나무 노를 살며시 젓자, 배가 뭍에서 멀어져 물살을 따라 성 밖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선창 안엔 과일과 간식이 한 탁자 가득 차려졌고 선창 밖에선 주모가 술을 데웠다. 선창 구석에서 수려한 시녀 둘이 물을 끓여 차를 내렸다. 기녀는 강 백야와 사내의 어깨를 문지르며 나긋나긋 웃으며 재잘거렸고, 비파를 조율한 운수는 경쾌한 곡조를 연주했다. 답사행(踏莎行: 송대의 시가) 가락이 배 안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강 백야는 정신이 가물가물한 것이 선녀를 만난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술과 음식, 둘러싼 미인, 눈앞에 있는 친우!
강 백야는 사내와 함께 무수한 과거를 돌이켰다. 사내는 자기와 강 백야, 그리고 절세 풍채, 재상의 재능을 가진 곡 형이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그 당시 어떻게 즐겼는지, 어떤 곳에 갔는지, 어떤 즐거움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즐거운 일에 대해 강 백야가 뭐라고 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그는 또 무슨 말을 했는지, 곡 형은 또 어땠는지, 모두 회상했다. 강 백야는 드디어 기억을 떠올리고 깨달았다. 어렴풋한 가운데, 모든 것이 정말로 떠오른 듯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각, 배가 성 밖 호수 중간에 정박했다. 눈치 빠른 여인들이 강 백야의 목욕, 단장을 시중들었다. 선창으로 들어갔더니 운수가 얇은 사의를 입고 강 백야를 맞이해서 옷을 벗겼다.
그날 밤, 강 백야는 운수의 품에서 엎치락뒤치락, 천당에 오른 느낌이었다. 2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는 화려한 옷에 준마를 타고 기세등등 활개 치던 시절이었었는데!
놀잇배는 다음 날 정오 가까운 시간에야 다루 아래로 돌아갔다. 강 백야는 운수의 섬섬옥수를 쓰다듬으며 미련 가득한 얼굴로 배에서 내렸다.
강 백야는 목숨을 나눈 이 깊은 친분의 벗이…… 드디어 생각나는 것 같았다. 호종안, 호 노야는 빙그레 웃으며 강 백야를 바라보며 관사에게 분부했다.
“백야께서 어제 힘을 써서 말을 못 타실 테니 마차를 불러서 저택까지 모셔라. 그리고 내가 드리려고 준비한 선물도 함께 수녕백부로 가져다드려라.”
“호 형, 뭘 그런 걸 다!”
강 백야가 얼른 사양했지만, 호 노야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저었다.
“형제끼리 체면 차리지 맙시다. 다 강 형이 좋아하는 것들이오. 강 형과 만나서 정말로 통쾌하오. 강 형, 혹시 시간 나면 저녁에 금명지에 가는 게 어떻겠소? 그 당시 우리 형제 셋이 처음 만난 당일 밤 바로 금명지에서 경치 구경하며 학문을 논하지 않았소. 밤새 얼마나 즐거웠나.”
“좋소! 휴. 안타깝게도 곡 형이…….”
강 백야는 대번에 대답하고는 곡 형이 누군지 이미 떠오른 듯이 애석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 백야를 배웅한 호종안, 호 노야는 두 눈썹을 번갈아서 올렸다가 내리고서 실실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