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78화 (178/463)

178화: 들이닥친 횡재

“소쇄!”

화가 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왕 어멈이 쾅, 하고 문을 열고 누굴 찾느냐고 고함쳤다. 밖에 서 있던 여인이 어머나, 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왕 어멈의 목소리에 놀란 게 아니라, 문이 부서지면 어쩌나 싶어서 재빨리 물러난 것이다.

“나는 가(賈)가예요. 곡 거인의 가족을 찾아왔는데, 여기가 곡 거인 댁 맞지요?”

가씨는 뒤로 물러나서 중심을 잡고는 왕 어멈을 위아래로 살피며 물었다. 왕 어멈도 그녀를 살폈다. 쉰 남짓, 진청 비단옷, 금비녀로 틀어 올린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카락, 귓가에 꽂은 커다란 복(福)자 머리 장식, 꼿꼿한 몸, 온화하면서도 귀티 나는 눈빛.

“예, 예, 예. 태태는 누구신지?”

왕 어멈은 다 살펴보기도 전에 벌써 그보다 더 싹싹할 수 없는 얼굴로 웃음을 띠었다.

“태태라니요. 곡 태태는…… 잘 지내시나요?”

보아하니 가씨는 곡 거인의 가족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했다.

“잘 지냅니다, 잘 지내요. 그리고 대낭자도 계시는데, 대낭자는 더 잘 지냅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왕 어멈은 문틀을 잡은 채 문 앞을 단단히 막고 서 있었다. 싹싹하게 맞이하긴 했으나 여인을 안으로 모시는 걸 깜빡했다. 이런 귀인이 이 집을 찾는 건 너무나,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아미타불. 태태…… 그리고 대낭자도 계셨구나…….”

가씨는 들뜬 듯이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아미타불을 읊었고, 왕 어멈은 두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드디어 태태를 찾아냈구나. 내가…….”

가씨가 눈물을 훔치며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태태께 절을 올려야겠어요. 그리고 낭자께도. 하늘이 무심하진 않으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왕 어멈은 드디어 서둘러 비켜섰다. 귀인이 이러는 걸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기려는 것이다!

가씨가 안으로 성큼 들어가자마자, 입구의 기척을 알아차린 곡 대낭자가 휘장을 열고 문틀에 기대서 몸을 반이나 내밀고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저분이 대낭자로군요!”

가씨는 흥분한 눈빛으로 곡 대낭자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대낭자의 생김새가 노야 판박이입니다. 딱 봐도…… 대낭자, 노비의 절을 받으세요.”

가씨가 땅이 더러운 것도 마다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려 했다.

“어머…… 일어나세요. 얼른.”

곡 대낭자는 깜짝 놀라 당황해서 부축하러 나가려고 휘장을 잡은 손을 놓았다. 순간 휘장이 제 얼굴을 때리자 다시 휘장을 휙 젖히고 나와서 손을 반쯤 뻗었다가 불현듯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노비? 노비였어? 우리 집안 노비?

“소쇄, 어서 어멈을 부축해.”

곡 대낭자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서 소쇄에게 명령했다. 소쇄가 나오기도 전에 왕 어멈이 이미 가씨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이고, 왜 이러세요. 어머나, 옷 좀 봐! 이 좋은 비단을. 옷 좀 보세요…….”

왕 어멈은 가씨의 더러워진 치마를 마음 아픈 듯이 바라봤다.

“태태는 잘 지내시나요? 소인 태태에게 절을 올려야 합니다.”

가씨는 몹시 들뜬 모습이었다.

“대낭자, 정말 어여쁘시군요! 꽃같이 아름다워요. 이 귀티 하며……. 노야가 대낭자의 이런 모습을 보셨더라면……. 아이고, 팔자도 참. 대낭자도 팔자가……. 대낭자, 소인 드디어 낭자를 뵙습니다.”

가 어멈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누구냐? 네 아버지의…….”

기척을 들은 곡 거인의 아내 오씨가 더듬더듬하며 밖으로 나왔다. 오 태태를 본 가씨는 괴로운 듯 고함쳤다.

“태태! 이게…… 이게 무슨 일입니까! 눈이…… 태태! 다 소인 탓입니다. 소인이 너무 늦게 왔습니다!”

가씨가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했다.

“노야는? 노야는 살아 계신가? 노야가 살아 계신 건가?”

오 태태의 목소리는 놀라고 기뻐서인지 날카롭게 올라갔고,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가씨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고개를 들고 오 태태를 바라봤다.

“태태, 노야는 벌써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소인, 소인이 돌아왔습니다.”

곡가 대문 앞에 큰 마차가 서 있고 마당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리자, 이웃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구경했다.

들뜬 마음을 어렵게 조금 가라앉힌 가씨는 마부에게 마차에 실린 크고 작은 상자들을 안으로 들이라고 분부했다. 마부를 내보내고 왕 어멈이 대문을 닫은 뒤, 가씨가 자리에 앉아 사정 이야기를 했다.

가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의 지아비는 남양에서 해산물 장사를 하는 작은 장사꾼이었다. 어느 해에 그녀와 지아비가 경성에 물건을 팔러 갔다가 모함당해 죽을 날을 받고 옥에 갇혔는데 곡 노야가 그녀와 지아비를 구했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노비가 되어 곡 노야에게 의탁했는데, 곡 노야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걸 보고 본전을 마련해서 진주와 향료를 사서 돌아오려고 배를 탔다.

그런데 웬걸,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부부는 남양에 흘러 들어가게 되었고, 몇 년 되지 않아서 지아비가 역병에 걸려 그 길로 세상을 떴다. 그녀가 고생하며 겨우겨우 그녀를 태워줄 배를 구하는 사이 십여 년이 흐르고 말았고, 경성으로 돌아갔더니 곡 노야가 벌써 세상을 떠난 걸 알게 되었다. 그길로 수소문한 지 1년 넘어서야 겨우 청양진과 태태, 대낭자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럼 본전은? 진주량 향료는? 가지고 왔어? 저 상자는 뭐지?”

곡 대낭자는 가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빛을 빛내며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본전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낭자는 바다의 폭풍을 모르시겠지만, 살아난 것만 해도 불조께서 보우하신 겁니다. 진주와 향료는 그래도 조금 가지고 왔습니다. 남양에서 이런저런 삯일을 해서 본전을 겨우 모았고, 배를 찾았을 때 마침 향료가 쌀 때라 모두 향료로 사서 왔습니다. 경성에 와보니 향료 가격이 괜찮길래 모두 팔았습니다. 모두 3,100냥을 벌었지요. 복륭 전장 본점의 은표로 바꿨습니다. 다 상자 안에 있습니다.”

가씨가 붉은 칠한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3천 냥!”

곡 대낭자부터 오 태태, 그리고 왕 어멈까지 모두 힉 소리를 냈다. 가씨는 매우 유감이고 자책하는 얼굴이었다.

“소인이 무능해서 여기 3천 냥이 답니다. 여기 상자들은 모두 곡 노야의 유물입니다. 경성의 벗에게 맡겼던 것들이지요. 제가 이번에 싹 다 가지고 왔습니다. 태태…… 아이고, 태태의 눈이…… 대 낭자께서 정리하시지요. 노야께서 손수 봉한 것들이랍니다. 소인…… 가련한 노야, 가련한 태태. 대낭자가 이리도 참한데…….”

가씨가 다시 눈물을 훔쳤다. 곡 대낭자는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상자를 둘러봤다. 그녀는 이제 상자 말고 가씨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쇄, 상자를 내 방에 옮겨. 내가 아버지 대신 정리해야겠어.”

가씨가 벌써 일어나서 소쇄와 함께 상자를 모두 곡 대낭자의 방으로 옮겼다.

곡 대낭자는 저녁 먹을 겨를도 없이 상자를 밤새 꼬박 정리했다. 날이 밝았을 때, 곡 대낭자는 문을 빼꼼 열고는 벌써 일어나서 마당에 물을 뿌리는 가 어멈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손짓했다.

“가 어멈, 들어와 보게. 얼른!”

“갑니다.”

가씨는 얼른 대야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곡 대낭자는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도 흥분으로 두 눈을 빛내며 빛바랜 대홍빛 첩자를 10대 독자인 사내아이를 떠받들 듯이 내밀었다.

“이것 봄 봐봐. 이 일, 자네도 알아?”

가씨가 손을 내밀자 곡 대낭자는 후다닥 손을 거두고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손수건으로 제 손을 닦고 첩자를 열더니 가씨에게 보라고 눈짓했다.

눈치가 빠른 가씨는 두 손을 등 뒤에 두고 최대한 멀찍이서 숨을 죽이고 바라보다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노야, 정말이지…… 대낭자를 이렇게나 아끼셨군요! 노야가 계셨다면…….”

가씨는 뒷걸음치더니 또 눈물을 훔쳤다.

“알고 있었어? 이 가문, 이 가문에 대해 들은 적 있어?”

곡 대낭자는 또 눈물을 훔치는 가씨의 모습에 성가신 듯 눈살을 찌푸렸다. 가씨는 얼른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었다.

“저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 남편이 노야를 모셨을 때, 노야가 강 백야와 매우 가깝게 지낸 건 맞습니다. 강 백야가 노야를 매우 좋아하셨지요. 그때는 정말이지. 한 몸처럼 붙어 다니셨습니다. 강 백야는 노야처럼 재주가 출중하고 청아하기 짝이 없는 분이세요. 두 분은 끝도 없이 대화를 나누셨지요. 툭하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힘들면 그대로 주무셨어요. 그렇게 마음 맞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어요!”

가씨가 극찬하자 곡 대낭자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이 강 백야, 지금은 어때? 잘 지내셔?”

“그럼요! 수녕백부는 경성에서 손꼽히는 고귀한 가문입니다. 진정한 세습 백작 가문입니다. 작위를 세습하는 가문이 세상에 몇이나 됩니까. 잘 지내지 않을 일이 무엇이겠어요.”

가씨가 곡 대낭자의 표정을 빤히 살피며 대답했다.

“그런데 왜……. 나 경성에 가야겠어! 가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직접 물어봐야겠어.”

곡 대낭자는 재빨리 결정을 내렸고 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낭자, 노야가 세상을 떠나신 지 오래라, 이 일은……. 휴. 상대가 알고 있을지 모를지 어찌 압니까.”

“아무리 그래도 도리는 지켜야지!”

곡 대낭자가 조심스럽게 대홍빛 첩자를 거두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나랑 같이 경성으로 가.”

“알겠습니다!”

가씨는 감탄하고 칭찬하는 얼굴로 곡 대낭자를 바라봤다.

“이렇게 과감한 것만 봐도 대낭자는 보통 분이 아니군요. 안심하세요, 대낭자. 소인이 낭자와 함께 가겠습니다. 어찌 됐든, 아무리 최악을 생각해도, 강가에서 대낭자에게 뭐라도 표시해야지요. 백부면 뭐요? 백부라도 국법은 지켜야 합니다!”

곡 대낭자는 잘 싸둔 첩자를 들고 빙빙 돌다가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품에 넣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려야겠어.”

곡 대낭자와 가씨가 한마디씩 한 이야기를 다 들은 오 태태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눈물을 비처럼 흘리다가 한참 만에 숨을 돌렸다.

“네 아버지만 가련하구나. 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으면……. 내 딸, 네가 이런 고생을 했겠느냐.”

“경성으로 가야겠어요. 바로요.”

곡 대낭자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이 우는 오씨를 짜증 나서 바라보다가 울고불고하는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내 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거긴 백부다. 세습 백작 가문이야. 구름 위에 사는 사람들인데, 우리 가문을……. 딸아, 우리는 줄곧 청양진에 살고 있었다.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 찾아왔겠지. 됐다. 오늘 가 어멈이 3천 냥을 가지고 왔잖으냐. 이걸로 혼수를 마련해 줄 테니, 청양진에서…….”

“경성에 갈 거예요! 지금 바로요! 은자는!”

곡 대낭자는 더 짜증스러워진 얼굴로 벌떡 일어나서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선포했다.

“내가 3천 냥을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어머니께 드릴게요. 바로 갈 거예요.”

“딸아, 어미 말을 들어라. 딸아…….”

오 태태가 다급하게 일어서서 손을 마구 휘둘러댔다. 곡 대낭자는 어머니를 상대하지도 않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 소쇄를 불렀다.

“소쇄! 얼른 짐 챙겨. 다 가지고 가. 넌 나랑 외출하고, 어멈은 마차를 고용해 와.”

“대낭자, 대낭자! 천천히요!”

가씨가 몇 걸음 만에 곡 대낭자를 따라잡았다.

“대낭자, 제 말 들으세요. 마음이 급해서 뜨거운 두부를 그냥 삼키면 큰일 납니다. 게다가 백부는 경성에 있어요. 어디 달아나지 않습니다. 준비를 잘하고 가야 합니다. 대낭자, 제 말 들으세요. 첫째, 대낭자는 연약합니다. 줄곧 마차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기엔 몸이 못 버팁니다. 배를 타야 해요. 그리고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대낭자의 인품, 용모로 호위 없이 어떻게 그냥 다닙니까. 그리고 태태도요. 태태가 계실 곳도 마련해야지요. 제 말 들으세요. 허튼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대낭자, 행여 불효라는 오명을 쓰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습니다.”

가씨가 뒤를 따르며 하는 말에 곡 대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이렇게 진심으로 날 대하다니, 앞으로 자네를 홀대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해주시다니, 앞으로 소인은 대낭자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아무럼요.”

가씨는 들뜬 얼굴로 깊이 무릎을 구부리며 얼른 제 태도를 드러냈다. 곡 대낭자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게. 제대로 상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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