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76화 (176/463)

176화: 마음이 유난히 담담하다

시제를 받은 축청정은 흥분으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겨우 진정하고 가문의 세 수재를 불러서 허리를 숙이라고 한 다음 경성에서 온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시제를 세 사람에게 건넸다.

네 사람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곧 쉰이 다 되어가는 형님은 시제를 보고 흥분해서 울음을 터트리려 했다. 축청정은 식겁해서 그의 입을 막았다. 다른 둘은 놀라고, 기쁘고,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서 온몸을 벌벌 떨며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앞으로 출셋길이 열렸구나! 부귀영화, 처자식, 돈, 미녀, 무한한 권력, 하늘 높은 영예!

세 사람을 배웅한 축청정은 방 안을 몇 바퀴나 빙빙 돌았다. 얼마나 돌았을까, 무한한 흥분이 드디어 조금씩 가라앉은 듯해서 탁자에 앉아서 먹을 갈려고 물을 따르다가 손이 흔들려 온 탁자에 물을 쏟고 말았다.

그는 속으로 경을 외우며 물을 깨끗이 닦고는 새로 먹을 갈고 붓을 들다가, 갑자기 함께 온 외사촌 아우를 떠올리고는 붓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축청정이 여섯 살 때 부친이 중병에 걸렸다. 나중에 목숨을 보전하긴 했으나 몸이 매우 허약해져서 하루에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었다. 그동안 그의 일가의 생활비든 그가 글공부하고 문회하느라 드는 일체 비용을 모두 외숙이 내주셨다. 심지어 외숙 덕분에 그 지역에 유일한 거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사촌은 외숙의 외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고, 축청정은 외사촌을 줄곧 친아우로 여겼다. 외사촌도 그를 친형님처럼 대했고.

이 시제를…….

축청정은 종이 위에 떨어진 먹물 자국을 내려다봤다. 시제를 외사촌에게 감춘다면, 외사촌, 외숙의 얼굴을 어찌 볼까. 나아가 어머니의 얼굴을 어찌 볼까.

하지만 이숙이…….

축청정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숙은 외사촌에게 알려주면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외사촌이 얼마나 출중한가. 자신보다 더 출중했다. 공정한 과거라면 분명 급제하겠지만, 지금은…….

이 사실을 감추면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없다!

축청정은 붓을 벼루에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외사촌이 있는 옆 방으로 들어갔다.

포정사 관아가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당, 문 이야는 다리를 틀고 탑상에 앉아 있고, 여복이 바로 옆에 서서 나직이 보고했다.

“노복이 떠난 다음, 축청정이 축가 세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고작 반각 정도였고요. 세 사람은 들뜬 표정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반각 정도 있다가 축청정이 옆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곧 외사촌과 함께 나왔고요. 아래층으로 내려가 술과 안주를 시켰습니다. 매우 기뻐 보였습니다.”

“흥. 의리는 있군. 이게 죽을 자리라는 걸 모르는 건가. 다른 세 사람은?”

“공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대가 들어와서 문 이야를 향해 보고했다.

“다 나갔습니다. 이야, 이 상황으로 봐서, 며칠 내에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로 그걸 바란 거다. 그렇게 되면…….”

문 이야가 샛눈을 뜨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막료 노릇 하는 인간이 해가 갈수록 자질이 떨어지는군. 시험장 규칙도 모르면서 포정사 관아에서 밥을 빌어먹다니. 몇십 년 동안 살면서 이렇게 어리석은 놈은 또 처음이다. 정말이지, 나날이 못 해!”

여복과 공대는 눈빛을 주고받고는 일제히 문 이야를 바라봤다. 이것도 다 계산하신 것 아니십니까.

“슬슬 경성에 도착할 때가 되었군.”

문 이야가 느긋하게 하는 말에 뭐가 경성에 도착하는지 아는 여복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도착했을 겁니다. 영 칠야의 답신은 언제 도착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금방 올 거다. 영가는 우리 가문과 비교할 수 없지. 며칠 동안 신중해야 한다. 추시 방이 나올 때쯤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마쳐야 한다.”

철저히 조사하라는 임무가 강환장에게 떨어지자, 진왕은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겨우 돌아왔더니, 소식을 이미 들은 강환장이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의자에 널브러진 진왕은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얼굴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오늘 조회에서 놀라 죽을 뻔했다.

“왕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려울 것 없는 안건입니다. 하루 이틀이면 마무리합니다.”

강환장이 태연한 얼굴로 진왕을 위로했다.

“어려울 것이 없는 게 아니라, 세상없는 화근이다!”

진왕이 조회에서 있었던 일을 두서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회가 끝난 다음, 큰형님이 나를 노려보며 자네에게 전하라고 하더군. 제대로 조사하지 않으면 자넬 살려두지 않겠다고. 넷째는 별말 없었는데, 주 추밀부사가…… 자네에게 잘 생각하고 안건을 처리하라고 전하라고 하더군. 그게 무슨 말이겠나. 이럴 줄 알았다면…… 외숙이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 그러지 말았어야 해. 날 말렸어야지. 이제…….”

진왕은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 건을 어찌 처리한단 말인가. 주육, 심지어 연향루의 잘못이라고 하면, 넷째가 물고 늘어질 것이고, 주 추밀부사는 더더욱 물고 늘어질 것이다. 주육 혹은 연향루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고 외숙, 혹은 자기가 이 일을 감당하는 건 기꺼이 할 수 있다. 그러나 큰형님은? 큰형님이 그러길 바랄 리가 있나.

“왕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진왕의 이야기를 들은 강환장은 훨씬 안도했다. 역시나 예전과 같았다. 대황자와 사황자가 칼끝을 겨눌 날이 머지않았다. 희생양을 몇 찾아서 어물쩍 넘겨 버리고, 진왕과 자기를 잘 지켜내면, 1년 정도 뒤엔 대황자와 사황자가 서로 검을 뽑아 찌르다가 다 파멸하고 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유민의 잘못이라고 판결 내리면 안 됩니다. 이미 조사한 바로, 구야에게 일이 생길 때 주유민은 관아에 있었습니다. 누군가 덮어씌운 것입니다. 그리고 연향루는.”

강환장은 아라에게 별 인상은 없으나, 아라가 묵칠의 보물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덩달아 혐오스러웠다.

“연향루의 잘못이라고 판결하면, 그 뒤에 묵칠과 주유민이 있습니다. 주유민이 물고 늘어지면 괜히 골치만 아픕니다. 제 말은, 차라리 같이 놓아주는 게 낫습니다.”

“놓아주어라, 놓아줘! 깜빡했구나. 선덕문을 막 나오는데, 주육이 날 가로막고 아라와 연향루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더군. 자네가 아라 혹은 연향루에 죄를 물으면 자기에게 오줌을 끼얹는 거라고.”

진왕이 얼른 덧붙였다. 너무 겁에 질려서 하마터면 그 일을 잊을 뻔했다.

강환장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1, 2년만 버티면 주유민이 뭐라고. 주가가 뭐라고!

강환장이 진왕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연향루가 얽힌 건 확실합니다. 이따 아라를 심문할 겁니다. 제 말은, 연향루에서 희생양을 아무나 고르라고 할 것입니다. 평소에 양 구야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한때 충동으로 구야의 옷을 벗기고 이렇게 큰 사달을 냈다고요. 이 일을 구야의 사적인 은원으로 돌리면 됩니다. 그럼 두 분과는 아무런 상관없어집니다. 황상도 분명 그걸 바랄 겁니다. 어찌 됐든 대황자와 사황자는 동복형제입니다. 누가 다쳐도 황상과 귀비는 마음이 아플 테니까요.”

“맞다, 맞아! 소화,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조회 때, 난 정말이지…….”

진왕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마조마 살다가 겨우 궁에서 나와 왕부를 세웠다. 이제 시시비비와 멀어져서 안심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처음엔 외숙의 혼사 일이 터지더니 오늘 같은 일이 터질 줄이야.

“외숙도 신경 써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더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왕비께서 사환 몇을 보냈다고 합니다. 둘이서 조를 이뤄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말고 구야 곁을 지키라는 엄명을 내렸답니다.”

강환장이 눈을 내리깔고 고했다.

“역시 왕비의 생각이 면밀하군.”

“그렇습니다. 진작 사람을 보냈으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강환장의 뼈 있는 말에 진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왕비가 생각이 면밀하지 못했던 건 외숙의 혼사 정도다. 생각했어야 맞지. 됐다. 그런 가문 출신인데, 왕부 일을 맡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아.”

“왕야의 말씀이 옳습니다. 휴. 황자비는 세심하게 골라야 하는 것을요.”

진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이야기 그만해라. 내 처지를 소화도 잘 알지 않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왕비는 귀비가 직접 골랐다. 왕비는…… 꽤 어진 사람이야.”

“예. 그럼 관아에 가보겠습니다. 서둘러 마무리해야 합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강환장이 허리 숙여 물러가겠다고 고하자, 진왕이 손을 휘둘렀다.

“어서 가라, 어서. 소화. 신중해야 한다. 양쪽…… 모두 좋게 끝내야 해. 모두!”

“명심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왕야.”

강환장이 장읍하고 물러갔다.

경부 관아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북 화행의 후원.

빛이 어슴푸레 밝은 어느 상방 안에 영원이 매서운 표정으로 서 있고, 사환 대영은 휘장 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보고 중이었다.

“강환장이 아라 소저를 심문했습니다. 대뜸 누가 지시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행수기녀가 아니냐고 묻자 아라 소저는 아니라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강환장이 또 말하길, 양 구야가 연향루 마당 밖에서 옷을 벗은 걸 이미 조사해냈다고, 누가 양 구야를 협박한 건지 보지 못했냐고 묻자, 아라 소저는 못 봤다고 말하며 울기만 했습니다. 강환장은 잘 생각해 보라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영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나 진왕부는 이 일을 무마할 생각이로군. 아라에게 희생양을 지목하게 할 생각인가? 목이 날아갈 큰 죄거늘!

“강환장은 아라 소저를 심문하고 형 부윤을 만나, 하루 안에 연향루에서 달아난 행수기녀 등 모두를 잡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형 부윤이 아라도 진왕부에서 잡은 것이고, 경성이 얼마나 넓고 사람이 많은데, 연향루 사람들이 경성에서 달아났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루 만에 사람을 잡겠냐고 말했습니다.”

대영이 휘장 밖에서 계속 보고하는 말에 영원의 표정이 다소 굳어 있었다.

“그러자 강환장이 황상께서 사흘을 주셔서 형 부윤에게 하루밖에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잡는지는 알 바 아니고, 어찌 됐든 내일 이 시간까지 모두 잡아들이라고, 아니면 탄핵 상주서를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갔고, 형 부윤은 화가 나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대영이 보고를 마치자, 영원이 한마디 더 물었다.

“관아에서 나간 다음엔?”

“곧바로 수녕백부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회임한 두 첩이 희맥 상태가 다 좋지 않아서 거의 하루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의원을 부릅니다. 어제는 동시에 의원 둘을 불렀고요. 이낭 고씨가 강가 이낭자가 기르는 고양이 때문에 놀랐답니다.”

“음. 물러가고, 위봉낭을 불러라.”

영원이 분부하자, 대영이 공손하게 물러갔다. 영원은 그림자처럼 뒤에 서 있는 최신을 돌아봤다.

“최숙이 강환장을 직접 지켜봤었지? 이야기해 봐.”

“예, 착실한 사람입니다. 매일 정시에 진왕부에 가서 일하는 것 외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문회하는 것 말고 다른 짓은 안 합니다. 경성에서 과거 준비하는 서생들과 교류하는데, 그자가 교류하는 서생을 정리해서 사람을 보내 조사해 봤는데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서생과 교류한다라. 계속해.”

영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앞으로 반년 있으면 춘시가 열린다. 진왕 대신 준비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단 하나.”

최신이 영원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강환장은 기세가 매우 강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성숙하고 침착하고요. 대야와 비슷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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