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바닥이 없는 사람 마음
이동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었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전엔 자기가 강가를 벗어나도록 영원이 도와줄 거라고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조차도 아직 의심스러웠다. 강가를 벗어나기가 그렇게 쉽나. 인생을 두 번 산 그녀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데.
그런데 영원을 지기로 생각하기는, 무슨.
“강환장은 이미 셋째와 한배를 탔어. 네가 강환장과 다시 좋아진다면, 첫째와 넷째를 제거한 다음엔 이가와 영가는 제 갈 길 가야겠지. 아니지, 서로 칼을 겨눠야겠지. 그러니 지금도 같은 배를 탔더라도 각자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 경계하며 뒤의 수를 남겨야 해. 서로를 믿을 수가 없지. 하지만 네가 강가에서 벗어나고, 이가와 강가가 사돈에서 원수가 된다면…….”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너도 작정하고 강가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으니, 영원 그놈, 운이 참 좋아.”
“장공주께서 이렇게 다 파악하고 계신데, 뭐가 운이 좋아요.”
“그래도 좋은 거야. 나도 네가 벗어나도록 돕고 싶은데, 아직은 쥐새끼만 때려잡고 옥 꽃병은 다치게 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어. 영원이 해내면, 이번 일, 그리고 지난번 방화까지 용서하고 추궁하지 않으려고.”
이동은 가슴이 시큰해지고 눈이 촉촉해져서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복안 장공주는 그렁그렁해진 눈물을 못 본 듯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문도는 세상 이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 안목도 매섭고. 네 계획을 분명 똑똑히 파악했을 거야. 영원과 손잡은 건 이가를 위해, 널 위해서야. 이가 입장에서는 첫째와 넷째 연줄은 잡지 못하고, 셋째는 강환장이 선점했으니 다섯째일 수밖에 없지. 문도 입장에서는 첫째나 넷째와 손잡는 건 너무 쉬운 일이라 재미없을 거고. 셋째는…… 아마 셋째는 눈에 차지 않겠지. 그러니 다섯째가 제일 좋을 거야. 가장 어려우니까.”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피식 웃었다.
“그럼 장공주는요? 다른 사람의 계획을 이렇게 다 꿰뚫어 보면서, 본인은요?”
“나?”
복안 장공주는 침묵하다가 결국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셋째가 가장 좋은 인선이었다. 하지만 이미 이 암자에서 늙어 죽기로 결심했다.
“문도는 야심이 큰 사람이야. 하지만 이가가 있어서, 그리고 너를 통해 내 힘을 빌려서 영원과 결탁할 자격이 생겼지. 이가가 없이 영원을 찾아갔다면, 그건 의탁이야. 의탁과 결탁은 천지 차지지. 그는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뒤통수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다만 너무 흥분하지 않도록 잘 지켜봐야 해. 그는 몸이 부서지는 게 두렵지 않은지 몰라도, 너희 집안은 그럴 필요가 없어.”
복안 장공주는 화제를 돌리고 이동에게 당부했다. 이동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나직이 대답했다. 장공주는 그녀를 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찻잔을 튕기며 허공을 바라봤다.
“영원은 하늘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이고, 문도는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이지. 문가, 마지막 대에서 결국 소원을 이루는구나. 반역에 버금가는 큰일을 하게 되었어.”
이동은 등이 다 서늘해졌다. 장공주의 말, 갈수록 두려워졌다.
“쳐다보지 마.”
복안 장공주가 돌연 시선을 거두더니,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이동을 바라봤다.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마음이 있어도 힘이 없어서 영원을 막지 못해. 문도를 상관하지도 못하고. 그리고 황상은…….”
복안 장공주가 처량하게 웃었다.
“어차피 임씨 후손이잖아. 아버지, 임가에게 미안하지만 않으면 돼. 다른 건…… 어느 대는 안 그랬나? 한번은 계 노승상에게 물은 적 있어. 왜 황상은 주사를 쓰냐고. 계 노승상이, 그건 주사가 아니라 사람의 피라고 하더라. 황상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그 글이 모두 무수한 목숨이 달린 일임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거라고. 한 글자가 잘못되면 무수한 피를 흘릴 수 있다고. 사실 계 노승상이 하지 않은 말이 있지. 할 수 없었겠지. 주사는 모든 황족의 피야. 오래된 건 마르고, 새로운 피가 다시 흐르지.”
이동은 시선을 피했다.
그 안에, 벼슬아치들과 백성의 피가 더 많아요.
강남, 태평부.
축청정은 진회하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고 정교한 놀잇배가 가까워지더니, 배에 탄 시녀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삼소야! 여기예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던 축청정은 서둘러 몇 걸음 만에 달려갔다. 배가 가까워지자 시녀가 손을 내밀었고, 축청정은 그 손을 잡고 폴짝 뛰어 올라갔다.
놀잇배의 속도가 빨라지고, 배는 강물의 흐름을 따라 빠르게 하류로 내려갔다.
축청정이 휘장을 젖히고 선창 안으로 들어갔더니 선창 안에 향기가 코를 찔렀다. 선창 반을 차지한 탑상에 문 이야가 다리를 틀고 한 상 가득 차려진 상 앞에 앉아 황주를 들고 느긋하게 홀짝이고 있었다.
“이숙!”
축청정이 기쁜 얼굴로 장읍하며 예를 갖췄다.
“앉게, 앉아.”
문 이야는 매우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잔을 내려놓고 손짓했다.
“이숙, 찾아다녔습니다. 급한 일입니다.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습니다!”
장읍하고 일어나기도 전에 축청정이 다급하게 말했다.
“좌 선생이 날 만나자는가?”
문 이야는 담담하기만 했다.
“예? 어찌 아셨습니까?”
축청정은 놀라서 멍해졌다.
“좌 선생이 찾아왔……. 이숙이 좌 선생을 찾아가셨습니까?”
“내가 왜?”
문 이야는 앉으라고 손짓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휴! 내가 그를 만나서 무얼 하나? 동 사사가 만나자고 해도 나는 안 만나네!”
“예?”
축청정은 놀라서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동 사사도 만나지 않겠다고?
“일개 포정사를 만나 무얼해.”
문 이야는 담담한 가운에 은근히 오만한 모습이었고, 거들떠볼 것 없다는 말투였다. 축청정의 눈이 더 커졌다. 잠시 후, 살며시 숨을 들이켜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이숙, 이숙…… 제가 너무 옹색했습니다.”
축청정은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서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좌 선생이 뭐라고 하던가?”
문 이야가 주전자를 들자, 축청정이 냉큼 일어나 주전자를 빼앗았다.
“이숙, 제가 하겠습니다! 우선, 좌 선생이 성이 무언지 물었습니다. 어디 사람인지, 언제 수재가 된 건지, 어디에 사는지, 가문에서 이번에 몇 사람이 왔는지, 누군지, 나이는 몇인지, 이런 것들요. 나중엔 경성에 친척이 누가 있는지 묻길래, 축가 방파 중에 경성에 오래 사는 일파가 있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별거 없었습니다.”
축청정은 술을 따라서 양손으로 문 이야에게 바쳤고, 문 이야는 집중해서 들으면서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좌 선생이 저를 능운루로 불렀습니다. 경성에서 태평부에 온 사람이 있느냐고 물으시길래, 저는…….”
축청정의 혀가 꼬이자, 문 이야가 대놓고 그를 바라봤다.
“다 말했는가?”
“아니…… 다는 아닙니다. 이숙이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저는…… 좌 선생이 다 아는 줄 알고 그렇다고 했습니다. 누구냐고 묻길래, 그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웃어른의 당부였고, 별일 아니라 이야기할 것 없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좌 선생이 이숙을 만나야겠다고 했습니다. 이숙을 만나지 않으면 은자도 받지 않겠다고요. 은자를 가지고 오진 않았습니다. 그냥, 그냥…….”
“내가 분명 만날 거라고 했나?”
문 이야의 얼굴에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이 가득하자, 축청정은 끽소리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문 이야가 잔을 탁 내려놓았다.
“만나지 않을 거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온 것이지? 그렇지?”
축청정의 고개가 더 수그러지더니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좌 선생이 화를 낼까 봐…… 혹시 이숙이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가…… 저는…… 두려워서…….”
“급제하지 못할까 봐? 그렇지? 흥!”
문 이야가 탁자를 내리치자, 축청정이 탑상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내가 자네에게 뭐라고 했나? 자넨 축가일세!”
문 이야의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위엄이 넘쳤다.
“이숙,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일어나게!”
문 이야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잘 듣게. 내가 그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일을 그르치는 걸세. 자넨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히 멋대로 행동해?”
축청정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잘 듣게. 돌아가서, 만나지 않을 거라고 좌 선생에게 말하게. 동 사사라고 해도 만나지 않네. 그리고 동 사사의 휘하에 있은 지 1, 2년도 아니면서 어찌 이리 경솔하냐고 전하게. 이렇게 경솔하다니, 내가 매우 걱정한다고!”
문 이야가 한마디 할 때마다 축청정의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리고 한마디 더 전하게. 요즘 두 분 곁에 소인배들이 들러붙었으니 그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해!”
문 이야의 매서운 말에 축청정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 이야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매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 잘 듣게. 다시 이런 실수를 하면…….”
문 이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싸늘하게 웃었다.
“강남 방파는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축가의 운이 여기까지라고 여기게.”
축청정은 혼비백산할 듯 놀라서 다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숙, 마음 푹 놓으십시오! 절대로 이런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이숙, 안심하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일어나게. 자넨 축가네. 툭하면 무릎 꿇지 말게!”
문 이야는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저 앞에 부두에 도착하면 내리게. 알아서 돌아가고.”
“예.”
축청정은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가 부두에 멈추자, 축청정은 배에서 내렸다. 배는 금세 출발했고, 다시 물결을 따라 더 빨리 사라졌다.
축청정은 마차를 고용해 태평부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좌 선생을 찾아갔고, 이번엔 다른 소리는 한마디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이숙이 당부한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더하는 것도 없이 반복했다.
좌 선생은 너무 놀라서 축청정을 붙들고 이러쿵저러쿵 물었지만, 축청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다.
“어르신의 분부가 있어서, 실로…… 어르신의 분부가 있어서…….”
좌 선생은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자, 온화하게 그를 배웅하고 곧바로 동 사사를 찾아갔다.
좌 선생의 말을 들은 동 사사는 몸이 굳었다.
“두 분 곁에 소인배가 들러붙었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좌 선생이 쓴웃음 지었다.
“무슨 뜻이 더 있겠습니까. 동옹께서 생각하는 그 뜻입니다. 다만 그 소인배가 누구일지. 경성에 두 분을 성가시게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경성…….”
동 사사가 손을 휘젓자, 좌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왕야가 궁에서 나와 왕부를 세운 그 날부터, 그 소인배가…….”
동 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빙빙 돌았다.
“설마 대왕야가 뒤처지는 건가? 우리 소식이……. 너무 느리고, 너무 적군!”
“경성에 도울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휴. 동옹.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추시가 며칠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더는 주저하면 안 됩니다. 경성에서 오신 그분, 분명 추시 방이 발표되고 성사되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분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는 것만 해도 보통 이득이 아닙니다.”
좌 선생이 나직이 제안하자, 동 사사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나직이 대답했다.
“음. 자네가 직접 처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