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사고 친 아라
선덕문 앞에 막 도착했는데, 또 대황자를 만났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대황자의 안색이…….
진왕은 무심결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몇 마디 해명하고, 중매 서달라고 부탁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황자가 버럭 화를 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오가는 곳에서 뺨을 두 대나 후려쳤다.
진왕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됐다, 됐어. 어릴 때부터 한두 번 맞은 것도 아니고. 근래가 되어서야 대황자가 궁을 나가 왕부를 세운 후, 거의 만나지 않아서 맞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맞는 기분을 거의 잊었었다. 그런데 오늘…….
진왕은 이 기분이 분노인지 슬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속에 솜이 틀어 막힌 듯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갑갑했다.
강환장이 안에서 나왔다.
“왕야,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진왕은 말이 나오지 않아서 손을 휘저었다.
서재로 들어가 탑상에 앉은 진왕은 입을 뻐끔거렸다. 말은 나오지 않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렀다.
“왕야, 일단 마음 푸십시오. 무슨 일인지 몰라도, 2년만 참으십시오. 왕야, 절 믿으십시오. 2년만 참으면 됩니다. 모든 것이 호전되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강환장은 사환에게서 따듯한 수건을 건네받고 나가라고 눈짓한 다음 직접 수건을 짜서 진왕에게 건넸다.
“자넨 항상 그렇게 이야기하는군.”
한참 만에 드디어 진정된 진왕이 수건을 받아 얼굴을 누르며 씁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절 믿으세요, 왕야. 길어야 2년입니다.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왕야, 참으셔야 합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십시오. 복 있는 자는 스스로 복을 부릅니다. 왕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고 운명이 고귀하신 분입니다. 왕야, 절대로 느긋해져야 합니다.”
강황장이 단호하게 진왕을 설득했다. 진왕이 얼굴을 닦고 나자, 강환장이 차를 건넸다. 진왕은 고개를 젖히고 마시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숙의 혼사, 무슨 일이 있어도 서둘러 정해야 한다. 안 그러면…….”
진왕은 오늘 겪은 일을 떠올렸다. 황상의 평가, 대황자의 뺨. 또다시 슬퍼졌다.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야 한다.”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왕야께서 점찍은 집이 있으면, 대왕야께 중매 서달라고 부탁하십시오. 황상께서 대왕야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면서요. 그럼 대왕야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중매 서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강환장이 방법을 냈지만, 진왕은 비참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고개를 저었다.
“큰형님은…… 이 일을 맡긴 했지만, 나를 핍박하기만 한다. 나서지 않을 게야. 아까 만났는데, 나서 달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진왕은 무심결에 얼굴을 쓰다듬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근래에 궁에서 나와 왕부를 세운 후로 나날이 황자로서 존귀와 체면을 깨닫고 있었다. 예전과 달랐다. 이번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황자에게 뺨을 맞은 일은 이제 부끄럽고 분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자네가 말한 방법은 안 된다. 큰형님은…… 나서 주지 않아. 내 힘으로…… 우리 힘으로 해야 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라. 무슨 일이 있어도 외숙의 혼사를 서둘러 정해야 한다.”
더 늦어졌다간 숨 막혀 죽을 것이다.
강환장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진왕을 바라봤다. 그가 똑똑히 기억하는 바로는, 예전에 양 구야는 오씨 낭자와 혼인했다. 오 낭자는 양 구야와 거리 하나 떨어진 곳에서 고양이 사료를 팔며 먹고살았다. 양 구야의 모친이 오 낭자를 마음에 둬서 정해진 혼사였다. 오 낭자는 혼인한 후 다음 해에 아들을 낳고, 그다음 해야 딸을 낳았다. 눈 감기 전에 손자와 손녀를 본 양 구야의 모친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런 이유로, 진왕은 즉위한 다음, 양 태후가 올케의 출신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도 오 낭자와 오가에 은총을 베풀었다. 오 부인의 부친은 후작으로 봉해졌고, 형제들도 음서로 관리가 되었다.
오 부인은 양 태후의 은총을 받고 경성 귀부인 중에서도 귀한 존재가 되었다.
좋은 혼처였다.
강환장은 마음을 다잡고 웃음 띠며 제안했다.
“왕야, 소생에게 누이가 둘 있습니다. 큰누이는 글공부하여 예를 알고 성격이 온화합니다. 집안 다스리는 일에도 정통했습니다. 용모는…… 저와 흡사한데 저보다 더 곱습니다. 왕야께서 싫지만 않으면……. 수녕백부는 경성에서 별것 아닌 집안이지만, 그래도 가문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입니다.”
“자네 누이? 안 된다, 안 돼.”
진왕이 곧바로 반대했다.
“자네 집안이 얼마나 엉망인가. 자네 누이는 악랄하고 독한데, 안 되지! 아…….”
저도 모르게 툭 내뱉은 진왕은 놀랄 정도로 창백해진 강환장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런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자네 누이는 너무 어려. 외숙과 나이가…… 그러니까,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자네 누이가 억울하단 말이지. 그런 뜻이 아니다. 자네 누이야 당연히 좋지.”
진왕은 말할수록 겸연쩍어졌다. 아까 너무 놀라서 너무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왕야의 말씀이 옳습니다. 양 구야와 제 누이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긴 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왕야.”
깊이 장읍한 강환장은 한참 만에 다시 일어났다. 다시 일어났을 땐, 안색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소화는 보기 드문 사람이지. 매우 보기 드물어. 소화의 인품이 이리 뛰어나니, 누이도 분명 청출어람이겠지. 내 말은…….”
“아니면 왕야, 제가 왕야와 함께 경성의 낭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적당한 사람이 없는지 골라볼까요?”
강환장이 진왕의 말을 자르자, 진왕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진지한 일이니 그렇게 해야지!”
연향루 아라는 주육이 보낸 용연향을 바라보며 화가 나서 계속 손수건을 비틀었다.
칠야가 사황자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머리가 깨질 정도로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얼마 전에 어렵사리 용연향은 궁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용연향 핑계로 주육을 통해 사황자를 만날 기회를 잡아 보려고 했는데, 주육이 곧바로 용연향을 보내올 줄이야.
“언니, 양 구야, 또 쭈그리고 있어요. 육소야가 쫓아냈다고 하지 않았어요?”
다다는 창가에 엎드려서 정원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은 양 구야를 바라봤다. 고민도 되고, 역겹고, 불평이 절로 터졌다.
“육소야 말도 믿니? 그중에 좋은 인간이 하나라도 있어? 다들 입만 살아서!”
안 그래도 고민 가득하던 아라는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사황자를 잡으라는 명령이 내려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 방법이 전혀 없다. 칠야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위봉낭이 그랬다. 칠야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제대로 하지 못하면 차라리 머리 박고 죽는 게 낫다고. 적어도 깔끔하게 죽을 거라고.
분명 겁주려고 하는 말일 테니, 완전히 다 믿지는 않았다. 다만 칠야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사실일 것이다. 칠야는 둘째치고 위봉낭도 무서웠다. 죽인다면 바로 죽일 사람이니까.
이 일을 제대로 못 해내면…….
아라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왜 좋은 수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 거야!
“언니, 저 두꺼비가 매일 들여다보고 있는데, 역겹지도 않아요? 차라리 육소야를 만나 보실래요? 맞다. 아니면 칠야? 칠야는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다다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위봉낭은 무섭지만 칠야는 무섭지 않았다. 얼마나 좋은 분이야. 온화하고 통 크고. 생긴 건 또 얼마나 잘생겼어!
“짜증 나 죽겠네! 좀 쫓아내! 꺼지라고 해!”
아라가 버럭 고함쳤다.
“당연히 쫓아냈죠. 그런데 때리지도 못하고 밀지도 못하고, 말로 하면 들은 체도 안 하는데 어떻게 쫓아요.”
다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아라를 흘겨봤다. 쫓아낼 수 있었으면 아라가 말하기 전에 행수기녀가 진작 쫓아냈을 것이다. 잿더미에 떨어진 연두부처럼 불지도 못하고 때리지도 못하고, 말도 심하게 못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
“가서 전해.”
아라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뱃속 가득한 화를 풀 길이 없었다.
“가서 내가, 아니 나라고 하지 말고……, 그래, 육소야, 주가 육소야가 그랬다고 해. 벌거벗고 이 거리에서 두 번 왔다가 갔다가 뛰어다니면 내가 마당 안에서 차 한 잔 마시게 해준다고.”
다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언니, 정말로 들어오게 하려고요? 저렇게 역겨운 사람을…….”
“바보니? 마당 안이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 마당 문을 넘게 해준다고! 정말로 벗고 달리면,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서 차 한 사발 마시게 해준다고!”
아라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하는 말에 다다는 ‘어?’ 하더니 곧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냈다.
“알겠어요, 알겠어. 바로 갈게요!”
다다는 치맛자락을 들고 동동 아래로 내려가서 심부름꾼에게 ‘마당 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는 끝에 특별히 한마디 더 덧붙였다.
“명심해요. 똑똑히 말해야 해. ‘마당 문’이에요! 저기 문턱! 문턱에 앉아서 차 한 사발 마시게 해준다는 거예요!”
심부름꾼들은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두엇이 함께 나갔다. 재미있는 구경할 땐 거리낄 것이 없는 법이다.
문 안이라는 말을 들은 양 구야는 마당 문인지 건물 문인지 방문인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곧바로 방문이라고 인식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아라와 보내는 무수한 운우지정을 떠올리고는 술이라도 마신 듯이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는 심부름꾼이 뭐라고 더 말할 사이도 없이 일어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온 경성 세도가 여식의 명단을 살펴보던 진왕과 강환장은 절반을 다 보기도 전에 양 구야가 옷을 홀딱 벗고 온 거리를 뛰어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환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진왕은 피를 토할 뻔했다. 강환장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벌어졌다. 양 구야가 못 말리게 어리석은 건 알지만, 전엔 이토록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이건 어리석은 게 아니라 미친 짓이다!
“어서 가자! 가서…… 어찌 된 일인지 보자.”
진왕은 가자고 고함치면서도 일어나지를 못했다. 너무나 화가 났고, 너무나 놀라서 손발이 풀렸다. 다행히 사환이 눈치가 빨라서 우르르 달려와 부축해서 들어올렸다. 강환장이 앞장서고, 사환들이 진왕을 끌고 뒤를 따랐다. 중문을 지나 말에 오른 다음에야 기운이 돌아온 진왕은 사환이 이끄는 대로, 양 구야가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곳으로 향했다.
연향루 아래엔 극단이 온 것처럼 떠들썩했다. 다다는 창으로 상반신을 거의 내밀다시피 해서 고함치며 웃어댔다.
“세상에! 언니, 어서 와서 저것 좀 봐요!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어리석지? 세상에, 언니 얼른! 달려오고 있어요! 아이고, 정말 못 봐주겠다! 흉측해! 세상에! 더러워 죽겠네! 토 나와! 세상에…….”
연향루가 있는 거리는 짧은 편이 아니었고 진왕부는 연향루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진왕과 강환장이 달려왔을 때, 양 구야는 마침 두 번을 다 달리고 벗은 채 연향루 마당 문 앞에 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면사 휘장을 간절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구야께 옷을 입혀 드려라!”
강환장은 양 구야를 보자마자 진왕이 분부하기 전에 고함쳤다. 양 구야의 옷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물론 설령 찾을 수 있다고 해도 사환들은 지금 그걸 찾을 겨를이 없었다. 사환 중 누군가는 자기 옷을 벗어서 양 구야에게 걸쳐 주었고, 그중 똑똑한 하나는 옆 점포에서 뭐에 쓰는 건지 모를 너른 천을 꺼내 와서 양 구야 몸을 둘둘 말았다.
진왕은 화가 나서 어질어질한 상태로 양 구야를 가리켰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외숙 이게……. 알아봐라! 누가 구야를 이런 꼴로 조롱했는지! 알아내면…… 알아내면…… 때려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