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69화 (169/463)

169화: 주육의 의리

“가서 전하게. 우리 곡가는 대대로 이어 온 서생 가문이고, 내 부친은 거인이라고. 일개 상인 가문이, 게다가 나이도 많은데 양두대이니, 진심으로 나와 혼인하고 싶으면 일단 혼수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해. 많이도 필요 없네. 적어도…….”

곡 대낭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은자 5천은 되어야 해. 그리고 혼인한 다음, 반년, 아니 1년 치 생활비를 미리 주어야 해. 1년마다 한 번씩 주고. 섣달에 다음 해 생활비를 다 주어야 해. 1년 치 생활비는…….”

곡 대낭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자로 살아 본 적이 없는데, 혹시 적게 불렀다가는…….

“제가 보기에 생활비는 정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죠. 낭자가 태평부에서 살아 보지 않았고, 노야의 음식 기거에 1년에 얼마나 드는지도 모르니까, 첫해는 일단 천 냥을 달라고 하고, 중간이나 연말이 되면 감이 잡힐 테니 다음 해 생활비를 정하자고요.”

정 매파가 열심히 곡 대낭자 대신 방법을 생각해 주자, 곡 대낭자는 신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네.”

“그럼 정한 겁니다. 가서 나리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난 정 매파는 비틀거리는 곡 태태와 눈이 휘둥그레진 왕 어멈을 상대도 하지 않고 곡 대낭자에게 인사했다.

담 너머, 문 이야는 매우 흡족해하며 지켜보다가 공대에게 부축해 내려달라고 눈짓하고 밖으로 나가면서 분부했다.

“이 집으로 하자. 태평부로 돌아가자.”

문 이야의 마차가 청양진을 떠났다. 문 이야는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서 곡 거인의 이력과 곡가의 상세한 사정이 적힌 종이들을 꼼꼼히 읽었다. 그러고 먹을 갈고 한 손에 종이를 들어 올리고 한 손에 붓을 쥔 채 흔들리는 가운데도 놀랍게도 가지런히 글자를 써 내려갔다. 종이 서너 장을 꽉꽉 채워 글을 다 쓴 후, 후후 불어서 말린 다음 이력과 상세한 사정이 적힌 종이들과 함께 접어서 돌돌 말아 쇠통에 넣고 입구를 봉한 다음 옻칠로 밀봉했다. 휘장을 젖혀 여복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 다음 쇠통을 건네며 나직이 분부했다.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이걸 경성에 보내라. 영원 영 칠야에게 보내. 서둘러야 한다. 밤낮없이 달리고 말은 바꾸되 사람은 바꾸지 마라. 빠를수록 좋다.”

여복은 고개부터 끄덕이고는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돌아옵니까?”

“돌아올 것 없다. 서신을 보낸 다음 곧바로 자등 산장으로 돌아가라고 해라. 태태께서 물으시면, 내 명을 받고 영 칠야에게 서신을 전했다고 하면 된다. 명심해라, 우선 서신을 영 칠야에게 전하고 자등 산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둘러야 하고. 반드시 서둘러야 한다. 빠를수록 좋다.”

“예. 안심하세요, 이야. 그럼 저는 일단 태평부로 가겠습니다.”

“가라.”

여복은 문 이야의 심부름을 하러 먼저 태평부로 달려갔다.

주육은 내내 들뜬 얼굴로 잰걸음으로 경부 관아로 뛰쳐 들어와 영원을 만나러 갔다.

“영원 형님! 형님! 너희들은 다 나가라. 나가, 나가!”

안으로 들어온 주육은 실내 가득 사람들이 영원을 에워싸고 주사위 놀이를 하는 걸 보고 고함치며 손을 휘둘렀다.

“영원 형님! 급한 일이 있소. 좋은 일이야. 매우 좋은 일!”

영원은 주사위를 던지고 흔들의자에 기댔다.

“무슨 좋은 일? 이야기해 봐라.”

주육은 신이 나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주 좋은 일! 며칠 전에 아라가 용연향을 가지고 싶다고 하지 뭐야. 그 향은, 형님도 알겠지만, 매우 희귀한 거라고. 궁에 있다고 하는데, 아라 때문에 고모님을 찾아갈 순 없잖아. 그건 말도 안 되지. 그렇지?”

“본론!”

영원이 주육의 말을 잘랐다.

“이것도 본론이요! 오늘 시간이 있길래, 마침 이 일이 생각난 김에 마행가에 갔지. 연달아 향료 점포를 몇 군데나 돌아다녔는데 다 없다잖아. 나중에 급고당에 갔지. 거긴 희한한 물건을 파는 곳이니까 있을 것 같아서.”

급고당이라는 말에 영원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로 어째서 날 찾아왔을까. 좋은 일이 생겼는데, 혼자 몰래 독점하는 게 아니고?

“그랬더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 아주 좋은 일!”

주육이 허벅지를 철썩 내리쳤다. 영원은 그를 흘겨보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샀다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큰 장사를 건졌지! 큰돈을 버는 장사! 급고당 장궤가 날 보자마자 장삿거리가 있다잖아. 강남의 주단(紬緞) 상행인데, 큰 배로 비단을 싣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배가 잠겨서 비단을 반은 버렸대. 어쩔 수 없이 남양에서 가지고 온 용연, 침향, 담향을 싸게 팔 수밖에 없대. 그래야 비단 손실을 메꾸니까. 10만 현은! 급고당 장궤 말이, 커다란 고급 향 한 상자인데, 나도 슬쩍 봤지. 어쨌든 30만 냥의 가치는 있다지 뭐요. 바로 20만 이문을 손에 넣는다고! 큰 장사 맞지?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 내렸지. 우리가 그 향료를 사겠다고!”

“우리?”

영원이 툭 내뱉고는 얼른 차를 머금으며 놀라운 기색을 감췄다.

“응! 당연히 우리지!”

주육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형님, 이문 20만 냥이오! 바로 팔면 돼! 아예 고모님께 팔자 싶었지. 어차피 고모님은 해마다 향료를 많이 사니까. 차라리 그 돈을 우리가 벌자 싶어서. 다 생각해 놨어. 10만 더 보태서, 40만 냥에 고모님께 파는 거다!”

영원은 풉 소리와 함께 찻물을 저 멀리 내뿜었다.

“이건 네 장사고 네 재물 운이니까, 너 혼자 해라. 혼자 벌면 된다.”

영원이 손수건을 꺼내 닦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러나! 형님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나를 빼놓은 적이 없는데, 내게 좋은 일이 생겨도 당연히 형님과 함께해야지.”

주육의 의리 가득한 얼굴에 영원은 목이 메어 콜록거렸다.

“저기 뭐냐……. 이렇게 이득 보는 장사인데, 급고당 장궤가 왜 자기가 사지 않고? 사기당하지 않게 조심해라.”

영원이 콜록거리며 물었다.

“날 속여? 이 경성에서 누가 감히? 누가 그런 담이 있어서? 죽고 싶대? 형님, 나도 그렇게 물어봤지. 장궤 말이, 급하게 돈을 써야 해서 현은만 받는대. 장궤는 10만 냥을 당장 움직일 수 없대. 경성 장사꾼들이 장사를 크게 하는 것 같고, 말도 안 되게 부유한 것 같아도, 당장 현은 10만 냥을 움직이려고 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지. 맞는 말이지. 우리 저택에서도 현은 10만 냥은 아마도 할머님이나 가능할걸.”

주육은 자기가 너무 확실히 잘 깨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원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일자 바늘로도 단번에 낚을 만한 머저리로구나.

“그래서, 10만 냥을 주었고?”

“내가 현은 10만 냥이 어디 있어. 천 냥도 없지. 지난번에 형님이 준 만 냥은…… 아라에게 장식을 만들어 줬거든. 류만도 달라잖아. 류만이 얼마나 싹싹하고 어여뻐. 마음 약해져서 류만도 만들어 줬지. 생각해 보니까 운수도 있잖아? 형님이 운수를 제일 예뻐하는데 운수를 빼놓으면 안 되지. 그래서 모두 세 벌 만들고, 또 할머님과 어머님께 효도하려고 은자를 좀 썼지. 은자 만 냥으로 이것밖에 못 할 줄 몰랐다니까.”

“나도 10만 냥은 당장 없다.”

영원이 자기가 설계한 판에 들어갈 리가 있나.

“내 은자도 다 물건을 샀다. 너도 알다시피 집에서 주는 돈은 달에 맞춰 보내온다. 매달 적진 않지만, 남진 않아.”

“아? 그럼 어쩌지? 급고당 장궤하고 이야기를 다 끝냈는데? 오늘 바로 은자를 주기로 했어!”

주육은 다급해졌다.

“그럼 어쩐다. 경성에서 누가 단번에 10만 냥을 낼 수 있을까. 아니면…… 묵칠?”

영원이 다급한 얼굴로 이마를 두드렸다.

“묵칠은 안 돼! 우리가 장사 하는데 그놈 돈을 빌려야 하면, 체면은 어쩌고. 안 돼!”

주육이 단칼에 부인했다. 묵칠의 은자라니, 그가 가장 시기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쩐다. 음? 아까 네 할머님이라면 10만 냥을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영원이 말꼬리를 늘였고, 주육이 눈살을 찌푸렸다.

“할머님? 할머님이야 있겠지. 내가 말씀드리면 주실 거고. 다만…….”

주육이 쓰읍 소리를 냈다.

“할머님에게 10만 냥을 얻어오려면, 10만 냥은 큰 상자로 몇 개를 담아야 하고 마차도 여러 대 있어야 하잖아. 그럼 집안사람들도 다 알게 되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큰형님이 알게 되면…….”

“무서운 게냐?”

영원이 주육을 삐딱하게 바라보자, 주육이 순간 펄쩍 뛰었다.

“내가? 뭐가 무서워서? 무서운 게 아니라, 알게 되면 분명 할머님에게 말씀드릴 테니 그러지.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다른 사람도 다 알게 될 거다. 할머님은 몰라도,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특히 백부가 내가 20만 냥을 번 걸 알게 되면 분명 공공장부에 넣으라고 하시겠지. 아니면 재산을 따로 나누고 분가하는 셈이 되게? 그건 불효에 큰 죄라고. 하지만 공공장부에 넣다니, 괜한 헛수고 한 거 아니냐고.”

“그건 그렇지.”

영원은 턱을 붙잡고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어쩐다. 본전이 없으면 안 되지 않아. 할머님의 본전을 쓰자니, 돈을 벌면 공공장부에 넣어야 하고. 어쩌지. 아니면……. 흠, 난 정말 방법이 없구나. 사왕야에게 물어볼까? 사왕야는 형부를 맡은 적 있으니 율법을 잘 아실 거다. 어쩌면 방법을 내줄지도 모르지.”

영원은 주육이 사황자를 떠올리도록 유도했다.

“이번 일은 사왕야도 어쩔 도리 없을걸. 할머님이 아직 계시고, 분가하지 않았으니까. 이치대로라면 지난번 만 냥도 원래는 공공장부에 넣었어야 해. 이 몸이 힘들게 번 돈을 망할 큰형님이 반을 가지고 간다니, 차라리 그 20만 안 벌고 말지!”

큰형님을 보통 미워하는 게 아닌 주육은 이를 갈며 이야기했다.

“그럼 어쩐다. 눈앞에 있는 은자를 버려?”

영원이 주육을 흘깃 바라봤다.

주육이 벌떡 일어났다.

“사왕야에게 가볼게! 차라리 사왕야에게 주면 줬지, 망할 큰 형님은 안 돼! 사왕야에게 반반 나누자고 할게. 아니면 육 대 사도 괜찮고. 궁에 이야기해서 향촉국에 팔라고 하지, 뭐. 아예 50만 냥에 파는 거야!”

“좋은 생각이다! 그럼 얼른 가봐라.”

영원이 헛웃음 치며 손뼉을 짝짝 쳐주자 주육은 뿌듯한 듯 실실 웃었다.

“그럼 나 간다! 돈 벌면 형님에게 동기(童妓) 한 쌍을 선물하겠소!”

“아이고 송구해라! 얼른 가라. 늦었다. 저택으로 돌아가서 은자도 꺼내 와야 하지 않으냐. 현은 10만 옮기려면 한참 걸린다. 어서 가라, 어서.”

영원이 손을 저으며 주육을 밖으로 내몰았다. 주육은 공수하고 인사하고는 신이 나서 폴짝대며 나갔다. 영원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어리석은지, 안쓰러워서 뒤통수치기가 미안해졌다.

저택 문 앞에서 마차에서 내린 진왕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정말로 너무 심하게 고민 중이었다.

궁에 문안 올리러 들어갔더니, 주 귀비가 외숙의 혼사를 정했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당장 얼굴을 구기고는 일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각 정도 꿇어앉은 채 꾸지람 듣는 동안 불효, 불충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주 귀비 궁에서 막 나오다가 또 황상을 딱 마주쳤다. 황상도 그 일을 묻더니, 아직도 정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싸늘한 얼굴로 잇새로 ‘무능한 무지렁이!’라고 내뱉었다.

황상의 평가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무능한 건 맞지만, 무슨 수가 있나. 양빈이 반드시 세도가여야 한다고 하는걸. 다른 건 몰라도, 세도가라는 조건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경성에 세도가 중에 누가 제 여식을 외숙에게 보내려고 할까.

명을 받은 이래, 스물은 안 되도 열다섯 가문에 말을 넣어 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집안이 한 집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이 있을까. 큰형님도 아니고, 넷째도 아닌데, 이 경성에서 누가 자신을 안중에 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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