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66화 (166/463)

166화: 달빛이 좋은 밤

“휴. 칠야, 마음 푹 놓으세요.”

복백은 마음 아픈 듯이 연신 한숨을 내쉬고는 서신을 품에 넣고 물러갔다.

영원은 탑상에 단정하게 앉아서 울적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 생각하다가 위봉낭을 불렀다. 위봉낭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영원의 표정은 이미 평소와 다름없어졌다.

“아라는 요즘 어때?”

“도저히 못 가르치겠습니다. 너무 멍청해요.”

위봉낭의 평가는 매우 가차 없었다.

“네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아라 같은 사람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야. 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장점이 있지. 아라에게 어떻게든 사황자 줄을 잡으라고 전해.”

위봉낭이 멍해졌다.

“예? 아, 네! 한마디만요?”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가르치란 말이냐? 그건 아라가 알아서 할 일이다. 신경 쓸 것 없어.”

“예.”

위봉낭은 다급히 대답하고 공손하게 물러나서 연향루로 직행했다.

위봉낭에게 지시를 끝낸 영원은 훨씬 홀가분해져서 뒤로 등을 기댔다. 대황자와 사황자의 싸움이 어떻게 됐을까. 여기서 불을 한 번 더 붙이면, 절대로 풀 수 없는 응어리가 질 텐데…….

영원이 벌떡 일어나 소리 높여 분부했다.

“옷 갈아입혀다오! 성 밖으로 나갈 거라고 유월에게 전해라. 지금 당장!”

항상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이동이 목욕하고 막 누우려는데 창가에 인영이 얼핏 스쳤다. 이동이 벌떡 일어나 앉자, 그림자를 못 본 수련은 이동의 움직임에 놀라서 따라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이동은 수련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문발을 주시했고, 수련도 이동의 시선을 따라 문간을 바라봤다. 문발에 사람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자, 수련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녹매도 이상한 낌새를 채고 서둘러 문 쪽을 바라봤다. 문발이 젖히더니 위봉낭이 고개를 내밀고 이동을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이동은 위봉낭을 살폈고, 주변을 둘러보던 수련은 적당한 것을 찾지 못하고 성큼 다가와 이동 앞을 막아섰다. 녹매가 밖으로 나가 사람을 부르려고 살금살금 옆으로 움직이는데, 위봉낭이 녹매를 스쳐 다가오면서 어깨를 덥석 잡아 빙그르르 돌려서 이동 옆으로 끌고 갔다.

“시녀들이 다 훌륭하네요. 간도 크고. 사람 부를 것 없어요. 난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낭자께 말씀만 드리고 돌아갈 거예요.”

계획이 들통나서 위봉낭에게 붙들린 녹매는 어색하고 두렵기도 했다. 이동은 그런 녹매를 향해 옷을 가져다 달라고 나긋나긋 분부했다. 위봉낭은 녹매를 놓아주고 이동 앞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틀어 수련을 향해 빙그레 웃고는 이동 앞에 손을 내밀었다.

“읽어 보세요.”

위봉낭이 손바닥에 놓인 종이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이동은 종이를 들어 올려 펼쳤다. 종이 위에 힘이 넘치고 수려한 필체로 ‘급한 일이 있으니 잠시 나와서 만나 주십시오. 영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동은 안도하며 일어서서 종이를 촛불에 태우고 위봉낭을 돌아봤다.

“내가 나가는 건 불편하니, 모시고 들어와. 후화원에 화청이 있어. 거기서 기다릴게.”

“네.”

위봉낭은 쓸데없는 말 없이 한마디로 대답하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위봉낭이 방에서 나가는 걸 보고서야 수련은 다리가 후들거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래도 조금 괜찮은 녹매가 손을 떨며 이동에게 옷을 걸쳐 주었다.

“낭자?”

“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동은 수련을 일으키라고 녹매에게 눈짓했다.

“네가 온화하고 우아하다고 말한 영 칠야가 만나고 싶다잖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러니 도적 소리를 듣죠!”

정신을 차린 수련이 꿍얼거리는 말에 이동이 실소했다.

“옷 가지고 와. 수련 넌 따라오지 말고 여길 지키고, 녹매가 나랑 가자. 달빛이 좋으니 등불도 필요 없어.”

이동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련과 녹매 둘이 매우 재빠르게 옷을 꺼내서 갈아입히고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머리를 말아 올려 주었다. 수련은 방에서 지키고, 녹매는 아동을 따라 월동문을 지나 후원으로 향했다.

영원은 후원 가운데에 있는 화청에 이미 와 있었다. 그는 화청 한쪽 어둠 속에 서서 월동문을 지나쳐 부드럽게 걸어오는 이동을 바라봤다. 다급하게 나오느라 그런지, 지극히 일상적인 하얀색 좁은 소매 상의에 백사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도 단순하게 말아 올렸고, 조금 흐트러져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리카락에는 은근하게 나른함이 배어 있었다.

영원은 기둥 그늘에 기대서 점점 가까워지는 이동을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그 찰나가 마치 끝나지 않을 듯이 길디긴, 고요하고 황홀한 세월 같은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동의 그 짧은 걸음이 마치 그의 예전과 미래, 그의 인생을 걸어들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영 칠야.”

화청 입구에 선 이동은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영원을 한눈에 알아봤다. 우선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춘 다음에 치맛자락을 들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녹매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서 살짝 떨어진 곳에 섰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단숨에 뛰쳐들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런 시간에 낭자를 찾아오다니, 제가 당돌했습니다.”

영원이 어둠속에서 조금 나와서 깊이 장읍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신지 말씀하세요, 영 칠야.”

이동은 한마디 인사치레도 없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별일은 아닙니다.”

영원은 고개를 숙이고 자기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작은 이동을 내려다봤다. 정수리에 부드럽고 새카만 머리카락, 그리고 대충 말아 올린 머리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에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 밤, 이 달, 이 바람, 이 꽃과 은은한 이 향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이야기를.

“영 칠야, 깊은 밤에 찾아오신 이유를 말씀하세요.”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게 힘이 들자, 이동은 뒤로 반걸음 물러났다. 영원의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단정한 옷깃이 시선에 보였다.

“이제 막 밤이 되었으니 깊은 밤은 아닙니다.”

영원이 나지막이 변명하자, 이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들고 영원을 바라봤다.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영원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이동을 지나쳐 뒤로 돌아갔다. 그는 계단 하나를 내려가서, 자기를 따라 몸을 돌리는 이동을 바라봤다.

“여기 서서 이야기하면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프지 않을 겁니다.”

이동은 어이없는 듯 영원을 노려봤다. 광풍에 휘날리는 버들가지가 된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무슨 말이 이래.

“오늘은 달빛이 참 좋군요.”

이동이 빤히 보는 눈빛에 어색해진 영동은 채찍으로 머리를 긁적이고는 하늘을 가리켰다.

“영 칠야, 달구경 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 그냥 해본 말입니다. 달빛이 정말 좋아서.”

영원은 왼쪽을 힐끔, 또 오른쪽을 힐끔 바라봤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어려워하실까요.”

이동이 위아래로 영원을 살폈다.

“아닙니다. 그냥…… 달빛이 좋아서. 꽃도 좋고!”

영원이 사방을 가리켰다. 이동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의자에 앉아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영원을 바라봤다. 위엄 넘치는 웃어른이, 잘못을 저지르고 벌을 받는 아랫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영원은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져서 대뜸 계단을 올라 이동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것도 매우 거북해서 옆으로 옮겼다. 그래도 부자연스러워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예 다른 쪽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조금 편해졌다.

이동은 영원이 다가와서 옆으로 갔다가 마지막에 맞은편에 앉는 걸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봤다. 영원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의자에 기대서 꽃을 보고 달을 보다가 단정하게 앉아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이동을 힐끔 바라봤다. 매우 느긋하고 즐거워 보였다.

“영 칠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을 끝내지 못했으면 일단 돌아가세요. 생각 정리하고 다시 오시고요.”

이동은 결국 영원을 버티지 못하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생각 끝냈습니다.”

영원이 벌떡 일어나서 이동보다 빨리 계단 아래로 내려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달빛이 이렇게 좋은데…….”

이동은 할 말을 잃고 달을 올려다봤다.

둥글지도 않은 반달이 뭐가 예쁘다고.

“이렇게 달빛 좋은 밤에,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해야 하니 매우 미안해서.”

영원이 진심과 성의 가득하게 하는 말에 이동은 어깨에 축 늘어질 듯했다.

이런 운치가 있는 사람이라니, 역시 사람은 겉모습 보고는 모르는 법이지.

“대황자와 사황자가 난리를 부렸습니다.”

영원의 목소리가 매우 작았다. 너무 작아서, 이동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앞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대황자는 무창 상행에 난 불을 사황자의 짓으로 단정한 듯합니다. 그러니까 낭자, 혹시…….”

영원이 앞으로 살짝 다가갔다.

“진주 장사 같은 걸 사황자에게 한 건 줄 수 있습니까? 사황자가 아니라 주가 육소야도 괜찮습니다. 낭자는 주 육소야에게 한 건 넘기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다 내가 합니다. 20만 정도 이문 남는 장사면 제일 좋고요. 본전은 그리 크지 않아도 됩니다. 본전과 이문, 모두 내가 드리겠습니다.”

이동은 놀란 얼굴로 영원을 빤히 봤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미 매우 가까운데, 영원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더 내밀고 그녀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이동은 무의식적으로 상반신을 뒤로 젖히고는 그 김에 뒤로 살짝 물러났다.

“이런 사소한 일은 칠야 스스로 할 수 있을 텐데요. 굳이 절 찾아오실 필요가 있나요.”

이동이 단칼에 거절했지만, 영원은 이동의 거절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난 장사는 못 하니까요.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장사만 못 합니다. 낭자가 무창 상행과 한 거래를 보고 깨달았지요. 그런 게 장사구나!”

영원은 ‘장사’라는 말을 힘주어 말하고는 실실 웃었다.

“날 좀 도와주십시오. 이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도와드리지 않는 게 아니에요.”

이동은 조금 안쓰러운 듯 그를 바라봤다. 이런 청년이, 홀로 경성에서 그렇게 큰일을 해야 하니, 분명 많은 어려움이 있을 테지 싶었다.

“무창 상행과의 거래는 아시다시피 지시받고 한 일이에요. 칠야가 하시려는 일도 이 거래와 연관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고요. 제가 승낙할 일이 아니에요.”

이동은 영원을 직시하며 매우 솔직하게 말했다.

“장공주께서…….”

영원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낭자에게 부탁하려는 이 일은 대황자와 사황자의 응어리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복안 장공주가 이 낭자의 손을 빌려 대황자를 혼낸 건, 대황자가 장공주를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장공주도 임씨인 것을. 그런데 지금 자신은 복안 장공주의 두 조카 사이에 풀지 못할 응어리를 맺으려고 하고 있었다. 장공주가 아무리 수행한 사람이라고 해도, 아무리 속세를 떠난 사람이라고 해도, 이 낭자의 손을 빌려 대황자를 혼내준 일에 자기가 묻어가며 다시 이 낭자의 손을 빌려 응어리에 쐐기를 박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의 마음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까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왜 이 여인이 자기를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을까. 경성에 들어온 지 몇 달 동안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실수하고 보이지 않아야 할 모습을 보이고 말았을까.

영원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뒤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물러났다.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서 이동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내리고는 서서히 고개도 숙였다.

이동은 앞으로 다가가 계단 언저리에 서서 안쓰러운 듯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의 얼굴은 구름에 가린 달빛처럼 어두웠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계단으로 내려와 영원을 지나갔다. 몇 걸음 더 걷다가 뒤를 돌아봤더니, 영원은 등을 진 채 고개를 떨구고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동은 결국 안쓰러움에 다시 돌아서서 영원 뒤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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