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하늘에서 떨어진 떡
사황자가 얼굴 반쪽에 고약을 바르고 나왔을 때, 대황자는 이미 일각 정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황자로서는 처음 받는 중벌로 이미 온몸이 아파서 무뎌지고 쓰러질 듯이 비틀거렸다.
어슬렁어슬렁 그의 곁으로 다가간 사황자가 큭큭 웃으며 대황자의 곁을 빙글 돌았다.
“제대로 꿇고 있어요, 형님. 앞으로 무릎 꿇을 날이 많을 거요. 모비 말씀이, 내 화가 풀려야 형님을 용서해줄 거라고 했소. 사실 화는 풀렸는데, 일어나게 해줄 생각은 없는걸. 마침 잘 되었지. 이 김에 무릎 꿇는 법을 잘 배우세요. 다 형님을 위해서입니다!”
사황자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앞으로 무릎 꿇어야 할 날이 아주 많을 테니까요.”
사황자가 대황자의 얼굴에 소매를 휘두르고는 휘적휘적 사라졌다.
대황자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이동이 보림암으로 들어갔을 때, 또 보슬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회랑에 서 있던 복안 장공주는 장미 덩굴 아래로 걸어오는 이동을 보고는 문득 새하얀 백옥 조각상 같다고 느꼈다. 이동을 알게 된 이래, 장공주는 항상 그녀의 표정으로 감정을 읽었다. 기뻐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혹은 울적하거나. 지금처럼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이는데, 또 온 세상 모든 것이 충만해 보이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간 이동은 회랑으로 들어가 잠시 서 있다가 탁자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집중하고 차를 내렸다.
향긋한 차 냄새가 나자, 복안 장공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의자로 돌아가서 앉았다. 주전자를 들고 열심히 차를 내리는 이동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저께 첫째와 넷째가 주씨 궁에서 싸웠다는군. 이 동복형제 두 사람, 언제 칼끝을 겨눌지 모르겠어.”
이동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복안 장공주의 말을 못 들은 듯이 차를 따르고 주전자를 내려놓은 후에야 고개를 들고 장공주를 바라봤다.
“진작 알고 계셨잖아요.”
“그래.”
장공주는 한참 만에 그렇게 대답했다.
“알긴 알았지. 하지만 전엔 영원이 없었어.”
복안 장공주는 차를 따른 후 더욱 푸른 빛을 띠는 도자기 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영원이 없었다면, 형제끼리 그저 승부를 내는 것에 그쳤겠지. 그런데 지금은…….”
“장공주께선 그걸 바라시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일방적인 바람일 뿐이에요.”
그 형제의 쟁탈전 결과를 한 번 본 적 있는 이동은 가차 없이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가 멈칫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나 좀 봐. 속세 일에 해탈했다면서, 수행하느라 다 내려놓았다면서, 임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싸울 걸 생각하니까, 이렇게…….”
이동은 고개를 들어 복안 장공주를 바라보다가 한참 만에 나직이 말했다.
“피로 이어졌는데, 그게 인지상정이죠. 저처럼요. 저는 어머니만 생각하면…….”
옛일을 떠올린 이동은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혹은 오라버니가 잘못된다고 생각하면……. 누구나 그래요. 자기 몸에 피가 흘러야 아픈 줄 알죠. 임가는 다른 가문하고 또 다르고요.”
“그렇지. 임가의 전쟁에 피를 흘리는 건 세상 사람이니까.”
복안 장공주는 서서히 평소처럼 돌아와서 차를 들고 홀짝였다.
두 사람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장미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새들이 나무 위에서 즐겁게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강남 태평부, 문묘 근처 어느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점포에 문 이야가 구석 탁자에 앉아 있었다. 탁자엔 서너 가지 요리와 젓가락 두 벌이 놓여 있었다.
점포 앞, 스물네댓쯤 된 사내가 비단 장삼을 입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강남 축씨 가문 젊은 대에서 가장 뛰어난 자제로, 축청정(祝靑程), 축 삼소야였다. 문 이야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수하며 인사했다.
“삼소야, 이쪽이네”
축청정은 문 이야를 보고 실망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들어가서 문 이야 앞에 서서 다시 주저하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문 이야가 매우 친절하게 웃음 지으며 일꾼을 불렀다.
“요리가 다 식었다. 물려라. 당두에게 말해 알아서 요리 몇 가지 올리거라.”
일꾼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날렵하게 탁자의 음식을 치우고 새로 차를 올렸다. 축청정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다시 문 이야를 살폈다.
“삼소야, 생일이 유월 초아흐레인가? 이제 막 스물다섯, 한창때로군”
문 이야는 뛰어난 후손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애틋하게 바라봤다.
“이야는…… 경성에서 오셨습니까?”
축청정은 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문 이야가 정통 하남 말씨로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네. 말투를 들어도 알겠지. 다만 이번에는 경성에서 온 것이 맞네. 삼소야의 문장, 진작 봤었지. 4, 5년 전만 해도 다소 유치하고 어설펐는데, 몇 년 동안 뛰어나게 성장했지.”
문 이야의 말에 축청정은 은근히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삼소야의 문장은 나쁘지 않으나, 급제하기엔 아직 일러.”
축청정의 표정이 하늘에서 땅으로 뚝 떨어진 듯했다.
문 이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뿐만 아니라, 다른 소야들도 다 그렇네. 솔직히 말해서, 강남 축씨 가문에 무릇 좀 출중한 자제라고 하는……, 흠, 내가 다 글을 보았네. 몇 년 동안 지켜봤는데. 흠.”
문 이야는 근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보게. 내 나이가 벌써 이런데, 몇 년을 더 볼 수 있겠나.”
문 이야가 힘껏 목을 가다듬으면서 등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첫째, 도저히 더는 기다릴 수 없고. 둘째.”
문 이야가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내년 춘시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일세. 그래서 내가……. 흠흠. 어쩔 수 없이 강남을 돌아다니고 있네. 우리 축가 자제는 올해 추시에만 통과하면, 내년에 강남 축씨 가문에서 진사가 여럿 나올 걸세.”
축청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무나 놀라운 말이었다.
“하지만…….”
문 이야는 깊이 한숨을 내쉬고 또 숨을 몰아쉬면서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다시 가다듬었다.
“자네는 축가 자제 중에 가장 출중하네. 그런데도 급제하기엔 아직 이르지. 아이고!”
축청정의 마음이 다시 구름 위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4, 5년만 있으면 때가 무르익을 걸세. 하지만 자네가 무르익을 즈음엔 기회가 사라져.”
문 이야의 얼굴에는 근심이 수십 겹이나 쌓여 있었다.
“이제는 비상시에 쓸 방법을 쓸 수밖에 없네. 다행히 강남은 동민이 있지.”
문 이야가 다시 등허리를 두드리며 쿨럭거렸다.
“비상 방법이라니요? 그런 게 통합니까? 저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동 사사 줄을 저희가 어떻게 잡습니까…….”
축청정은 더듬으면서 말하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전에는 안 되지만, 지금은 달라졌지!
“설사 잡을 수 있더라도 잡으면 안 되네.”
문 이야가 눈을 내리깔고 허탈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강남에 남은 자손은 정말로 더는 지체하면 안 되네. 지금도 보게, 하물며……. 아이고! 어찌 됐든 삼소야, 안심하게. 내가 온 이상, 아무 수고 없이 돌아가진 않을 거네. 그러니 자네도 최선을 다해야 하네. 강남 자제는 이번 추시만 잘 보면, 진사가 여럿 나올 걸세. 그렇게 되면 어르신도 강남 후손에 대해선 마음을 놓을 수 있지.”
“어느 어르신이십니까?”
축청정은 진사라는 말에 마음이 들떠서 진정되지 않았다.
“그건 신경 쓸 것 없고, 여기 만 냥일세.”
문 이야는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서 축청정 앞에 밀어주었다.
“내일 아침 일찍, 능운루 제일 북쪽에 있는 독채로 가서 좌 선생을 찾게. 좌 선생이 누군지는 알지?”
“알지요, 알지요.”
만 냥이라는 말에 축청정의 의심이 싹 녹아서 사라졌다. 다른 건 다 접어두고, 친척이 아니라면 공연히 만 냥을 줄 사람이 어디 있나.
“알면 됐네.”
문 이야가 또 흠흠거렸다.
“좌 선생을 만나서 다른 말은 할 것 없고, 고 사사가 동 사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고만 말하게. 그리고 은자를 드리게. 다 드리게! 자네가 드리는 거라고 하게! 잘 부탁한다고 하고.”
“그 다음엔요?”
축청정은 잠시 기다리다가, 문 이야가 입을 다물자 멍하니 물었다.
“그런 다음엔 일어나면 되네.”
문 이야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 자손은 더는 미루면 안 되네. 자네가 추시에 합격하면, 내가 좋은 막료를 찾아주겠네. 내 말, 다 명심했나? 명심하게, 은자를 모두 드리고, 다른 말은 하나도 하지 말고, 바로 물러 나오게.”
“그럼…….”
축청정은 다급해졌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끽소리도 없이 만 냥을 주라고? 만 냥을?
문 이야는 근심으로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이고! 관료사회는 다 그렇네! 서로 넌지시 알기만 하면 되지 긴말하지 않네. 내가 말한 대로만 하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내가 나중에 사람을 보내겠네.”
문 이야가 탁자를 잡고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럼……, 제, 제가 숙부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축청정이 다급히 다가가 제 숙부를 부축했다.
“찾아올 것 없네. 이번에 자네들을 위해 일부러 온 걸세. 내가 다 보고 있는데, 자네가 날 찾아올 일이 뭐가 있어? 은표 잘 챙기고, 얼른 돌아가게. 명심하게. 입 꾹 닫고, 내가 한 말만 되새기고 잘 듣게. 그리고 은자를 잘 지키고. 가 보게, 가 봐.”
문 이야는 갈수록 나이가 들어 잔소리 많은 노인네처럼 보였다. 축청정은 매우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문 이야의 손을 놓고 작은 봉투를 꼭 쥐고서, 문 이야가 비틀비틀 후문으로 나가는 걸 바라봤다. 그러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뛰듯이 달려나갔다.
문 이야는 허리를 폭삭 숙이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쿨럭쿨럭하며 등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걸음도 멀리 내딛지 않아서 짧은 골목을 언제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를 모습이었다. 골목 입구에서 기다리던 공대가 발을 굴렀다.
“이야, 서두르세요. 왕복 백릿길입니다.”
“재촉하기는. 갔느냐?”
문 이야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벌써 갔습니다. 서두르세요. 얼른 출발해야 합니다.”
공대가 마차로 폴짝 올라타 자리 잡고 앉았고, 여복은 휘장을 걷었다. 문 이야가 후다닥 걸어서 몇 걸음 만에 마차에 오르자, 공대가 고삐를 당겨 마차를 성 밖으로 몰았다.
성 밖으로 나간 마차가 한참 더 간 다음에야 문 이야는 휘장을 조금 걷고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이 시작되었으니, 다른 쪽도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른 아침, 영원과 주육은 하찮디하찮은 일로 또 자극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해가 머리 위로 쨍쨍해졌다가 서쪽으로 슬슬 기울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돌아가서 잘 반성하라고 황상이 입을 열었다.
영원은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무슨 일인지 훤히 꿰뚫어 봤다. 주 귀비 궁에서 난 난리는 알지 못했지만, 대황자가 분노한 얼굴로 사황자를 사방으로 찾아다닌 일은 알고 있었다. 대황자와 사황자가 싸웠고, 주육이 방자하게 그 일을 축하한 일이 들통난 게 틀림없었다. 황상은 대황자와 사황자의 불화를 숨겨야 할 테니, 대놓고 주육을 벌할 수는 없고, 대놓고 벌할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핑계를 찾아 벌을 줄 수밖에.
그리고 왜 자기까지 얽혔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주육을 벌주려고 덩달아 같이 주는 건지, 아니면 황상 생각에 자기도 주육과 같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자기가 주범이고 주육은 끄나풀이라고 여기는 것인지…….
무슨 일인지 훤히 아는 영원은 불평불만 없이 무릎을 꿇었지만, 주육은 억울해서 눈물 콧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