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말하지 않아도 난 알아요
“잠깐만요! 하나 더.”
영원이 무심결에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고개를 숙인 이동의 시선에 영원의 푸른 비단 신이 보였다. 중간이 불룩 솟은 그의 신발은 꽤 소박했다.
“낭자, 앞으로 장공주와 함께 수행할 겁니까?”
이동은 고개를 들고 눈살을 찌푸리며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 또 머리를 긁적였다.
“못 들은 거로 합시다. 또 하나, 힐수방이 낭자의 사업입니까?”
이동은 얼떨떨해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제 것은 아니고 외할머니가 어머니께 물려주신 거예요.”
“역시 낭자의 사업이었군요. 힐수방에서 내년 물품으로 정말로 푸른 옷감을 잔뜩 주문했습니까?”
“예.”
이동이 한마디로 확실하게 대답했다.
“반루도 낭자의 사업이고요?”
“제 것이 아니에요. 이가의 사업입니다.”
“이가 것이 낭자의 것 아닙니까?”
영원이 웃는 얼굴로 채찍을 돌리며 묻는 말에 이동이 고개를 저었다.
“제겐 오라비가 있어요. 이가 것은 제 것이 아니랍니다.”
“아!”
영원의 채찍을 돌리는 손길이 멎었다.
“이신! 아직도 계가 별원에서 열심히 글공부 중입니까? 그리고 여염, 이가와 여가의 인연, 낭자도 아십니까?”
“알아요.”
“이신도 압니까?”
“모를 거예요.”
이동은 어이없는 듯 영원을 바라봤다. 범인 심문해? 또 뭘 물으려고?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녀는 조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영원은 고개를 숙인 채 채찍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말머리를 바꿨다.
“장공주가 내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까?”
이동이 대답 없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영원이 다시 채찍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답하기 어렵겠군요. 장공주가 혹시 말 못 할 이야기를 낭자에게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이동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공주는 사실 조정과 임가에 관심이 아주 많으시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은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물었고, 이동은 한 걸음 물러나서 다시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췄다.
“영 칠야, 볼일 없으면 이만.”
“잠깐요!”
영원이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볼일 있습니다. 낭자, 나는…….”
영원이 채찍을 밖으로 빙빙 돌렸다.
“사실, 내가 망종인 건 그냥 겉모습입니다. 영씨 가문에게 경성은 호랑이 굴 같은 곳이라……. 낭자,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아십니까?”
이동은 침묵했다.
“낭자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바라는 걸 꼭 이루길 바란다고 했지요. 낭자의 진심입니까?”
“예.”
이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대답했다. 영원은 안도하는 듯했다.
“낭자의 바람을 이루길 바란다고 했던 것도, 내 진심입니다. 문도가 경성에 없으니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든 정북후부에 기별을 보내십시오. 영원,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필요 없어요.”
이동은 가차 없이 단번에 거절했다. 장공주가 있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영원에게 부탁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낭자를 찾아와도 됩니까?”
영원이 가차 없이 묻자, 이동이 그 말에 울컥했다.
“저는 일개 규중 여인입니다. 도움이 되지 못할 거예요. 영 칠야.”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낭자와 장공주, 모두 여중호걸입니다. 그리고 내 누님도요.”
“그럼 이만.”
영원이 싱글벙글 웃으며 하는 말에, 이동은 몇 걸음 물러서서 돌아섰다.
“낭자. 저기…… 그럼 또 봅시다.”
영원은 몇 걸음 따라가다가 멈추고 공수했다. 이동이 마차에 오르고 마차가 서서히 출발해서 빠르게 멀어지는 걸 바라보던 영원은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서서 말에 올라 경성으로 직행했다.
이동은 마차에 단정하게 앉아서 아까 영원이 했던 말과 표정을 세세히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또 곱씹어 보다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지극히 영리한 사람이니, 떠보려고 온 거라면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엉성한 말을 하는 걸까? 전혀 상관없는 남 앞에서, 어떻게 뒤에 했던 그런 말들을 할 수가 있지? 그렇게 나를 믿어? 아니면 장공주에게 전해주길 바라는 걸까?
이동은 눈을 내리깔고 손에 든 찻잔을 바라봤다. 장공주에게 전할 생각은 없었다. 그 말들은, 그녀 선에서 영원히 죽은 듯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내내 빠르게 말을 몰고 돌아온 영원은 경부 관아에 들어서자마자 흔들의자에 털썩 앉아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경부 관아 사 반두(班頭)가 쫄래쫄래 따라 들어왔다.
“칠야,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큰일 났습니다! 형 부윤께서 몇 번이고 찾으셨습니다.”
“큰일? 이 경성에 큰일이 날 게 뭐가 있다고.”
영원이 다리를 치켜들고 나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큰일이고 말고요! 칠야, 못 들으셨습니까? 어젯밤에 무창 상행에 불이 나서 보석 몇 상자가 싹 다 탔습니다. 오늘 날이 밝기도 전에 하 대야가 찾아와서 난리를 피웠습니다. 사흘 준답니다. 사흘 안에 이 사건을 밝히지 못하면 경부 관아 전체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 반두가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울상을 짓는데, 영원이 뿜어낸 찻물이 그대로 사 반두의 머리며 몸을 적셨다.
“하 대야?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경부 관아를 가만히 두지 않아? 자기가 뭐라고!”
사 반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얼굴에 튄 찻물을 훔쳤다.
“칠야아! 어떻게 하 대야가 누군지도 모르십니까! 하 대야는 수국공 세자의 손위 처남입니다!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면, 우린 죽는 겁니다!”
“수국공부라…….”
영원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다가 피식 웃었다.
“주육네잖아? 이 몸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하가는 둘째치고 수국공부도 감히 그러지 못하는데? 피곤하다. 화재 같은 하찮은 일로 귀찮게 하지 말아라!”
영원은 뒤로 벌렁 누워서 한 손으로 더듬더듬 쥘부채를 잡아당겼다.
“칠야! 아이고! 수국공 세자는 육소야가 아닙니다! 비교하면 안 돼요! 그분은…….”
“그분은 뭐?”
주육의 목소리가 사 반두 뒤에서 음침하게 울렸다. 사 반두는 온몸이 굳었다가 시체처럼 뻣뻣하게 돌아서서, 한 발은 문턱 안에 다른 발은 문턱 밖에 걸친 채 이를 부득부득 갈며 노려보는 주육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바라봤다.
영원이 웃으며 뒤에서 발을 굴렀다.
“사 반두, 얼른 꺼지지 않고 무얼 하냐. 육소야에게 두들겨 맞고 싶은 거냐?”
사 반두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헤헤 웃으며 종잇장처럼 납작해지고 싶은 기분으로 슬금슬금 문틀에 붙어서 주육을 비집고 나간 다음 줄행랑쳤다.
“쯧! 저놈 뭐야!”
“들어와라, 들어와.”
주육이 혀를 차고는 채찍을 휙 휘둘렀지만, 영원이 아랑곳하지 않고 손짓했다.
“사 반두에게 화를 내서 무얼 하냐. 저 말이 뭐가 틀렸다고. 네가 네 형님하고 비교할 수나 있고? 밖에서 너를 네 형님과 똑같이 보더냐? 솔직한 말을 한 것뿐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
“비교 못 할 건 뭔데? 내가 두려워하는 줄 알아? 내가 거들떠나 보는 줄 아냐고! 그 형님이 뭐가 대단해서?”
주육은 영원의 말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다른 사람이 이리 말했다면 진작에 채찍을 휘둘렀을 것이다.
“됐다. 짜증 나는 이야기는 그만하자. 가자, 연화지에 가자. 오늘 연자를 캐라고 연화지를 개방한다는구나. 여인의 얼굴이 꽃과 어우러져 발그스레 하구나, 이런 시도 있지 않으냐. 가서 구경하고 마음 풀자. 사람을 불러서 오늘 제대로 놀아보자.”
영원이 일어서며 고개를 까딱이자, 주육은 순간 또 매우 기뻐했다.
“안 그래도 그러자고 왔지! 좋은 일이 있거든! 오늘 제대로 축하해야 한다고! 오늘은 내가 한턱낼 터이니, 그런 줄 알라고.”
가는 길에 묵칠과 소자람을 만나 연화지에 당도하고 보니 자주 왕래하는 세도가 자제들도 이미 죄다 와 있었다. 대영이 진작 연못에서 가까운 2층 건물을 예약하고 아라를 비롯한 기녀도 불러 놓았다. 눈 깜짝할 사이, 2층 건물 위아래가 떠들썩해졌다.
“오늘은 주육이 내는 거니 다들 체면 차리지 말고 들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음껏 시키고!”
영원이 일어서서 모두를 향해 소리를 높이자 묵칠이 괴성을 질렀다.
“아이쿠야! 웬일이래! 난 칠 형님이 사는 줄 알았지. 소육 놈이 사는 거였어? 소육, 언제 이리 대범해진 것이냐? 좋은 일이라도 있어서?”
“개소리! 이 몸이 언제는 대범하지 않은 적이나 있고? 나는 그저 너처럼 철없이 은자 귀한 줄 모르고 막 써대지 않을 뿐이다!”
주육은 일단 묵칠에게 한소리부터 하고 잔을 들고 난간에 기대서 위아래 모두 들으라고 소리쳤다.
“이 몸이 오늘 좋은 일이 있어 기분이 너무 좋다! 제대로 축하할 생각이니, 여러분도 다들 통쾌하게 즐기게!”
“무슨 좋은 일이길래?”
소자람이 참지 못하고 영원을 당기며 물었지만, 영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알게 뭐냐. 이따 물어봐라. 어제 아라와 신선한 재미를 봤나 보지. 그렇지 않으냐, 아라야?”
아라가 웃으며 쉴 새 없이 고개를 저었다.
묵칠이 주육을 덥석 잡아끌었다.
“무슨 일로 이리 들뜬 거냐? 말해라! 나도 같이 기뻐하자.”
“말하기도 귀찮다. 말해도 넌 몰라!”
주육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야릇한 표정으로 묵칠을 흘겨봤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소자람도 다가가 물었지만, 주육은 턱을 높이 치켜들고 콧소리를 내며 영원 곁에 털썩 앉았다.
“영원 형님은 분명 알겠지.”
“뭘?”
운수의 손을 잡고 술을 마시던 영원은 망연한 표정이었다.
“내가 뭘 알아? 너야말로 대체 무슨 일로 이리 기뻐하는지 말해 봐라. 무슨 일이 그리 기뻐서 축하해야 한다는 거냐?”
주육은 상처받은 듯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형님도 몰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어젯밤에 큰불이…….”
“무슨 큰불? 어젯밤에 불이 났었어? 엉? 아하!”
영원이 탁자를 내리쳤다.
“아까 사 반두가 그랬지. 무슨 상행에 불이 났다고. 휴. 그 하가 어쩌고가 너희 가문의…… 맞다, 맞다. 네 큰 형수의 오라비라며? 그 불 말이냐?”
“형님!”
주육이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 영원을 잡아끌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형님, 내 말 들어요. 무창 상행에 난 불, 진주 주렴으로 꿰려던 진주를 태웠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 그날 무창 상행에서 진주 주렴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사왕야에게 말씀드렸지. 사왕야 성격을 내가 모르나. 이럴 줄 알았어. 가만히 있지 않을 줄 알았지. 역시! 쯧쯧!”
주육이 감탄하는 듯 쯧쯧거리며 탄식했다.
“사왕야가 갈수록 살벌하고 과감해지네. 불 한 번! 얼마나 깔끔해! 모든 게 끝!!”
영원은 놀라서 하마터면 튀어 오를 얼굴이었다.
“뭐라고? 사왕야가…….”
“쉿!”
주육이 영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형님, 술이 과했군.”
영원이 딸꾹질하면서 머쓱한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술이 과했군. 다들 내 주량이 약한 걸 알잖으냐…….”
묵칠은 영문을 몰라 했고, 소자람은 안색이 조금 변해서는 얼른 고개를 틀어 창밖을 바라보며 연못에서 연자를 캐는 미인들을 열심히 바라보는 척했다.
아라도 영문을 몰랐고, 류만은 조금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운수를 잡아당기며 소곤거렸다.
실내에 있는 세도가 자제들 중 누군가는 껄껄 웃으며 술을 마셨고, 누군가는 망연한 얼굴로 “육소야가 뭘 축하한다는 거지? 대체 무슨 일이야?” 하면서 여기저기 묻고 다녔다.
“소육에게 좋은 일은 내게도 좋은 일이지. 그리고 너에게도.”
영원이 일어서서 묵칠을 잡아당기고 소자람도 잡아당겼다.
“그리고 너한테도. 너희들, 우리 모두의 좋은 일이다! 자, 다들 잔을 채워라. 오늘은 다 흥청망청 취해보자! 멀쩡히 서 있는 놈은 소육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 거다! 소육을 무시하는 건, 나를 무시하는 거랑 같다!”
영원은 항상 연회의 주도자였다. 그가 조용하길 바라면 연회석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야 했고, 그가 떠들썩하길 바라면 못 봐줄 정도로 떠들썩해야 했다.
오늘 주육이 축하연을 거하게 연다는 소식은 10리 밖까지 떠들썩하게 전해졌다.
주육의 연회가 한창 떠들썩하게 이어지고 있을 때, 바람을 타고 흘러나간 소식은 수국공 세자와 대황자의 귀에도 들어갔다. 대황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탁자를 엎고 사황자를 찾으러 뛰쳐나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를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