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54화 (154/463)

154화: 숨어서 지키다

“지금 말려야지, 아니면 비 올 때 말린단 말이냐!”

일꾼이 가차 없이 주 대장궤의 말을 막았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대장궤도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어젯밤에 큰비가 왔습니다. 내내요. 해가 밝을 무렵에야 겨우 멎었습니다. 지금 날이 개긴 했으나, 동가, 이것 좀 보십시오. 축축합니다.”

일꾼이 손을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물방울이 아직 떨어집니다. 바닥도요. 동가, 보십시오. 바닥에 물웅덩이가 가득합니다. 보십시오. 물기가 다 산초에 스며듭니다. 이게 산초를 말리는 겁니까? 이건 습기를 채우는 겁니다. 말리더라도 땅이 마른 다음에 말려야지요!”

주 대장궤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일꾼을 노려봤고, 하종수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걸 알면서, 왜 관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굳이 내가 오길 기다렸다가 내 앞에서 이야기하다니. 내가 오늘 오지 않았으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느냐?”

“동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일꾼은 어안이 벙벙하고 또 당황한 듯했다.

“흥, 너처럼 속셈을 부리는 놈을 하루 이틀 본 줄 아느냐?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고 수작 부리는 놈을 많이 봤다. 내게 이런 수작을 부려? 흥!”

하종수가 싸늘하게 웃으며 돌아서서 주 대장궤에게 호통쳤다.

“이놈이 하는 말, 다 들었는가? 들었을 테니, 반복하지 않겠네. 아까 들어올 때부터 울화가 치밀었네. 다들 노련한 관사들이 이런 사소한 이치를 모르는가? 모르는 건가, 신경을 쓰지 않는 건가? 이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인가?”

“소인 잘못입니다. 소인,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주 대장궤는 식은땀을 흘렸다.

“조사하길 뭘 해! 이게 조사할 일인가? 산초를 다 거두고 바닥이 마른 뒤에 다시 말리게. 당직 관사는 모두 직책을 뺏고, 장 열 대를 치게. 그리고 이놈은…….”

하종수가 넋이 나간 일꾼을 돌아봤다.

“꼼수나 부리고, 항상 이렇게 속셈을 부리는 것일 테지. 장 열 대를 치고 내쫓게!”

2층, 이동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서 내려갔다.

“더 볼 것 없어. 가.”

영 대장궤는 이동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무창 상행이 이런 방식으로 일한다니, 이러니 말도 안 되게 틀릴 수밖에. 옳은 말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산초를 내리는 작은 일로도 온 경성이 떠들썩하고 조정까지 시끄러워지도록 소란을 피울 수밖에.

“시작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이동이 나지막이 분부하자, 영 대장궤가 미소를 지었다.

“낭자는 예전의 태태보다 더 조심성이 깊습니다.”

“연결된 일이 너무 많아서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동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장공주가 분부한 이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뒤에 얼마나 많은 일이 얽힐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만일 실패하게 되면, 이 일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어쩌면 강남에 있는 이야도 연루될지 모른다. 정말이지, 실수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영 대장궤는 경성으로 돌아갔고, 이동은 창고 뒷문으로 나와서 자등 산장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일러서 대교도 마차를 매우 느긋하게 몰았다. 수련은 휘장을 반쯤 열어두었고, 이동은 차를 홀짝이면서 비 온 뒤 갠 날씨에 파릇파릇한 숲과 저 멀리 밭에서 바삐 움직이는 농부들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이제 그물을 걷고 운에 맡기는 것만 남았다. 모사(謀事)는 사람에게, 성사(成事)는 하늘에게 달렸다고 했다. 사람이 할 일은, 이동은 이미 최선을 다했다. 이제 하늘이…….

이동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늘이 보우해주시길. 그녀를 보우하지 않더라도, 장공주, 그리고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보우해주시길.

영원은 유월을 비롯한 호위들을 거느리고 말에 탄 채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숲에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푸른 마차를 바라봤다.

시력이 매우 좋은 영원은 저 멀리에서도 마차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단정하게 앉아 있지만, 한적한 모습으로 찻잔을 든 이동이 웃음을 머금은 듯한 모습으로 차를 홀짝이며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원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이 낭자, 세상일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저 시선, 정말이지 감탄이 나왔다.

마차가 갈수록 가까워졌고, 영원의 시야에 이동의 머리 위에 꽂힌 청옥잠과 옷에 수 놓인 푸른 대나무 잎, 그리고 옥처럼 새하얗고 가는 손가락 사이에 쥔 청자 찻잔이 들어왔다.

그리고 먼 산에 자욱한 안개 같은 눈빛, 추수(秋水)처럼 맑은 눈동자와 청자 찻잔을 살짝 머금은 조금 얇은 분홍빛 입술도.

숲에 가까워진 마차는 이제 숲을 통과하려 했다. 유월은 점검 가까워졌다가 곧 지나칠 것 같은 마차를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영원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영원을 살짝 잡아당겼다.

영원은 꿈에서 깨어난 듯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고, 그의 놀란 기색을 느낀 말이 투레질했다. 기척을 들은 이동이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봤다.

말을 몰고 다가간 영원은 이동의 시선을 마주하며 살짝 허리를 숙여 공수했다.

“이 낭자, 날 기억합니까?”

“영 칠야!”

이동은 찻잔을 수련에게 건네고 살짝 고개 숙여 답례했다.

“이 낭자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차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영원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대교는 벌써 말을 멈추게 하고는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고개를 끄덕인 후 수련에게 따라 내릴 필요 없다고 눈짓하고는 마차에서 내려 영원 곁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말할 테니 낭자 괘념치 말아요.”

영원은 매우 예의 발랐고, 이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도가 날 찾아온 걸 압니까?”

이동은 영원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야에게 듣지 못했다. 아마도 어머니만 아는 일이리라.

“낭자, 하종수를 지켜보더니, 오늘은 하가 창고를 지켜보더군요. 전 장궤, 낭자의 사람입니까?”

영원은 토막토막 물었지만, 내용은 매우 명확했다.

“영 칠야, 언제부터 날 지켜보셨나요?”

이동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오가아 생일 이후부터입니다.”

영원은 터놓듯이 대답했지만, 그렇게 솔직한 건 아니었다. 이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영원은 그녀의 미소를 보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양해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낭자.”

“전 장궤는 내 사람이 아니에요. 이가도 직접 거래한 적 없고요.”

이동은 매우 진지하게 영원의 물음에 대답했다. 영원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풀었다.

“무창 상행은 대황자의 금고입니다.”

영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동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낭자, 그 금고를 부술 생각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럴 재주가 있나요. 그냥 작게 장사 한 건 하려는 거예요.”

이동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럴 재주가 없는 게 맞긴 하지.

“낭자, 내게 충고해줄 말이 있습니까?”

영원이 한참 만에 공수하며 물었고, 이동은 놀란 듯이 그를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이 사내는 그날 보았단 포악한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역시 문 이야의 눈은 매섭고 정확했다.

“전 칠야가 뜻을 이루길 매우 바라고 있어요.”

이동은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살며시 한숨을 내쉬고는 살짝 무릎을 구부려 예를 갖추고 돌아섰다.

“낭자!”

이동이 발판에 오르자마자, 영원이 별안간 불렀다. 이동이 돌아보자 영원은 입술을 달싹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이동이 빙긋 웃으며 돌아서서 마차에 올랐다. 영원이 갑자기 고함쳤다.

“낭자의 바람도 이뤄지길 바랍니다!”

“가자.”

대교에게 분부한 이동은 눈썹을 까닥이며 참지 못하고 웃었다. 수련도 초사 휘장 너머로 영원을 바라보며 웃었다.

“영 칠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거랑 전혀 다르시네요. 정말 우아하고 고상해요.”

“포악하게 억지 쓰는 걸 못 본 것도 아니면서?”

이동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수련은 점점 멀어지는 영원을 고개를 틀고 돌아봤다.

“정말 이상하죠. 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까요? 지난번엔 그야말로…… 대게처럼 집게발을 휘두르는 강도 같았는데. 지금은 얼마나 좋아요! 이러니까 다들 영 칠야가 미남이라고 하지. 정말 잘생겼네요.”

이동이 수련을 잡아당겼다.

“대게가 아니라 맹수야. 마음먹으면 사람도 잡아먹는다고.”

“힉! 아이고, 겁나라!”

수련이 웃으며 저쪽으로 가서 다시 차를 내렸다.

이동은 다시 찻잔을 들고 등받이에 기대고 생각에 잠겼다.

위봉낭이 연향루 뜰로 들어서자마자, 다다가 2층에서 쿵쿵 내려오더니 그녀를 덥석 잡고 자기 거처 쪽으로 잡아끌었다.

“봉낭 언니, 좀 와 봐요. 좀 와 봐요.”

“또 무슨 일이니.”

위봉낭은 아라와 그녀 곁에 있는 이 멍청하고 통통한 시녀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다다는 두렵고 미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번엔 큰일이에요! 언니, 가보면 알아요. 어서 가요.”

하지만 위봉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다가 그녀를 끌고 간다? 꿈 같은 소리였다.

“일단 놔. 잡아당기지 말라고 몇 번 이야기했어? 내가 요즘 참……. 옛날 같았으면 바로 밀쳐 버렸지. 뼈도 부러뜨렸을걸?”

위봉낭은 더할 나위 없이 성가신 듯이 다다를 혼냈다. 이 다다는 전형적인 먹을 줄만 알고 혼난 건 기억 못 하는 인간이었다. 2층에서 집어던진 게 한 번, 뿌리쳐서 내던진 게 여러 번인데, 여전히 흥분만 하면 달려와서 잡아끌었다.

“명심할게요. 명심할게요. 봉낭 언니, 얼른 와 봐요.”

다다는 손을 놓았다가, 다급해지자 또 잡으려고 손을 뻗다가 중간에 멈추고 얼른 거뒀다. 그러고는 또 손을 뻗으려 하자 위봉낭이 눈을 까뒤집었다.

“뭐길래?”

위봉낭이 다다를 따라 연향루 뜰 입구로 다가갔다. 다다가 문에 기대 손짓했다.

“언니, 얼른! 맞은편이에요. 맞은편!”

위봉낭이 휙 문을 열어젖히자, 다다가 아이고, 하고 외치더니 엉덩방아를 찧었다. 연향루 맞은편에 양 구야가 잔뜩 쭈그리고 앉아서 몰래 연향루 안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자 화들짝 일어나서 해명도 하지 않고 줄행랑쳤다.

“저거 말한 거야?”

위봉낭은 쥐새끼처럼 달아나는 양 구야를 가리켰다. 다다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날, 홀딱 벗고 비연루에 끌려간 그날 있잖아요. 그날부터 매일 여기 쭈그리고 앉아서 위를 훔쳐보고 있어요. 우리 소저가 짜증 나서 죽으려고 해요.”

“그냥 볼 뿐이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짜증이 왜 나? 왜? 보는 것도 안 된대?”

위봉낭이 문을 닫고 손을 털면서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속으로 아라는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헛수고하지 말자고 칠야에게 보고해야 할지 말지 가늠했다.

“봉낭 언니, 봉낭 언니!”

다다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뒤를 따랐지만, 위봉낭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있나. 위로 올라간 위봉낭은 문을 닫고 다다를 문밖에 가뒀다.

정북후부, 위봉낭의 이야기를 들은 영원은 한쪽 눈썹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한참 만에 끌어내렸다.

“주육이 요즘도 연향루에 자주 가나?”

“예. 닷새 동안 세 번 갔습니다.”

“양 구야가 문밖에 쪼그리고 있는 걸, 알고?”

위봉낭은 순간 머쓱한 가운데 두려운 표정이었다.

“소인이 실책 했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아라는 그만 가르쳐라. 그냥 내버려 둬. 이 일은 알아서 하라고 아라에게 말하고. 음, 주육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줘라. 양 구야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여인을 바라는 건…….”

영원이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지상정이라고. 아내를 맞으면 좋아질 거라고. 주육이 신경 좀 써서 아내를 구해주면 그만 아니냐고 말하라고 해. 완곡하게 말하라고 알려주고.”

“예.”

위봉낭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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