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50화 (150/463)

150화: 솔직한 양 구야 一

“깨달은 사람도 많을 거예요. 다만, 깨닫는다고 뭘 어쩔 수 있겠어요. 제가 강가에서 나올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절 법도 없고 하늘 무서운 거 모르는 아이로 키우셨어요. 제가 만약…….”

이동은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예를 들어 계가처럼요. 계가 낭자가 이런 사람하고 혼인했다면, 이런 가문하고 혼인했다면 저처럼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집은 법도가 엄한 집안이니까.”

“저는 사람도 있고, 돈도 있어요.”

이동은 시선을 내리고 차탕을 저었다.

“다른 집안이었다면 설사 부모가 제 어머니처럼 아이를 아낀다고 해도, 사람이 없고 은자가 없으면 뭘 어쩔 수 있겠어요. 그 이치를 저만 깨달은 건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깨달을 수 있고, 그런 집안에서 나와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는 거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저와 어머니는 사방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녀야 하고요.”

복안 장공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렸을 때 글공부할 때,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는 시를 읽을 때마다 매우 감동했어요. 이 세상 사내의 정이 여인 못지않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요즘에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까 그토록 정 깊은 사내들은 예순, 일흔까지 살면서 정실, 후실을 잔뜩 거느리고 첩을 무수히 들이고 또 홍루에 홍안지기가 잔뜩 있잖아요. 마음을 그렇게 여러 개로 나누는데, 무슨 정이 있겠어요. 누구에게 정이 있겠어요. 어째서 아내는 하나같이 단명할까요. 꽃 같은 좋은 여인이 왜 사내와 혼인하면 십 년을 못 넘길까요. 풍수 때문일까요?”

이동이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이 넘치는 이런 사내들은, 그들의 정을 모두 시에 쓰나 봐요. 정말로 정 깊은 사내는, 예를 들어 계 승상을 보세요. 시를 지을 필요가 없잖아요.”

멍하니 듣던 장공주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묵 승상도 시를 쓸 필요가 없겠네. 여 승상은…….”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갸웃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여 승상은 원래 시를 거의 안 쓰고. 이런 류의 시를 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지난 황조에 류 승상이 지은 시마다 깊은 정을 논하는데, 박정하고 의리 없기로 꼽으면 류 승상이 최고거든. 너 같은 인품, 사고방식, 정말로 계 승상, 묵 승상 같은 사내와 혼인했어야 하네. 정 안 되면 여 승상이라도. 아이고!”

복안 장공주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장공주는 아니시고요? 장공주도 계 승상 같은 진짜 사내를 만나야 할 분이잖아요.”

이동이 되묻자, 복안 장공주는 찻잔을 쥔 채 멍하니 회랑 밖을 한참 바라봤다.

“난 바라는 게 참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어. 정말 많았어. 하지만 그중에 혼인은 절대로 없었어. 그런데 어머니와 황상은 내가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 혼인이라고 여겼지.”

“서른 가까이 혼인하지 않은 황실 공주는 장공주가 처음이시죠?”

이동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녀는 황실에 대해 확실히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우리 황조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임가 여식 중에…… 살아서 성인이 된 사람은 절반은 되는데, 마흔 넘게 산 사람이 극히 드물어. 봐봐, 내 언니들, 모두 죽었잖아.”

장공주가 나직이 하는 말에 이동은 부르르 진저리쳤다.

“비구니가 된 공주는 대대로 있었어. 대부분 스스로 머리를 깎고 궁에서 수행했지. 네댓 해 동안 수행하다가, 공덕이 원망해지면 학을 타고 서쪽으로 돌아갔어. 나는 곧 서른이니까, 공주 중엔 오래 산 편이야.”

(※가학귀서駕鶴歸西: 죽음을 고상하게 가리키는 표현. 죽음에 대한 일종의 기피, 죽은 사람에 대한 존경, 축복의 의미가 담겨 있다.)

복안 장공주는 냉담한 얼굴로 다리를 흔들었다. 한여름 무더울 때인데, 이동은 온몸에 한기가 들어서 무심결에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장공주도 마흔을 넘지 못했다.

“장공주…….”

이동은 입을 열었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장공주의 운명을 어떻게 암시할 수 있을까.

“황상이 정말로 혼인을 명하고 반드시 혼인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참 침묵하던 이동이 결국 물었다.

“그러지 않을 거야.”

복안 장공주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 이동은 마음이 시리고 답답해졌다.

“황상은 어리석긴 해도 장점이 하나 있어. 조상의 법도를 지킨다는 것인데, 아버지 앞에서 조정 대신 앞에서 맹세했었어. 절대로 내 마음을 거스르지 않겠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그런 명을 내리진 않을 거야.”

“다음 황상은요? 혹시…….”

이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안 장공주의 안색이 매우 안 좋아졌다.

“아무래도 혼인하시는 게 장공주께도 좋은 일이라고 다들 생각하니까요. 장공주께 좋은 일을 하는 거라면, 뭐가 어찌 됐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니까요.”

이동은 끝내 말을 끝까지 했다.

복안 장공주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류만의 비연루는 지금 매우 떠들썩했다.

얼큰하게 취한 주육이 다시 금어대를 꺼내 들었다.

“우리 형제들, 모두 하나씩 받았지! 영원 형님, 형님 것은?”

주육은 비틀비틀 다가가 영원의 허리춤에서 금어대를 풀고, 묵칠과 소자람 것도 풀어서 네 개를 주르륵 들어 올렸다.

“이것 봐라! 앞으로, 누가 감히 우리 형제를…… 꺼억…… 변변치 않다고 하는지 두고 보자!”

“변변치 않은 건 맞지.”

영원은 뼈가 없는 듯이 거대한 의자에 기대듯이 널브러져서 나른하게 말을 받았고, 주육이 그런 영원을 향해 눈을 부릅뜨다가 웃었다.

“형님 말이 맞소! 변변치 않지. 변변치 않으면 변변치 않은 거지! 뭐? 임무만 잘만 맡는걸! 금어대를 받았는걸! 게다가 황상께서 하사하셨다고! 실질적 7품직을 받았다고! 뭐? 변변치 않으면 뭐?”

주육은 오늘 정말로 흥분했다. 상을 받은 건 둘째고, 그보다 중요한 건 오늘 처음으로 장방의 체면을 짓밟았는데 당사자인 장방은 꾹 참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정말 너무 통쾌하다고!

영원은 창가에 앉아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비연루 아래 매우 떠들썩한 거리에 양 구야, 양와우가 두 팔을 흔들며 따분한 얼굴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양 구야가 찻잎을 내놓고 파는 차 점포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걸음을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도자기 찻잔을 슬쩍 소매에 넣었다.

영원이 벌떡 일어서서 창에 달라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소자람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재미있는 일 있나?”

영원이 양 구야를 향해 턱짓했다.

“찻잔을 슬쩍했어. 일꾼들이 분명 봤을 거다.”

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점포에서 일꾼이 후다닥 나와서 양 구야의 멱살을 잡았다.

“찻잔 내놔! 밝은 대낮에 어쩌면 이런 염치 없는 짓을 하는 거요!”

묵칠도 다가갔다.

“응? 저거 양 구야 아니야?”

“아는 사람이야? 양 구야라니?”

영원이 묵칠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왕부 양 구야. 양빈의 친아우. 양빈은 진왕의 친어머니.”

묵칠은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영원이 몰라도 너무 몰라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지!

“누구? 진왕? 어디에 있어?”

주육이 소자람 등 뒤에 붙어서 머리를 내밀었다.

“진왕이 아니라, 진왕의 외숙.”

소자람은 주육에게 눌려서 몇 번이고 아이고 소리를 냈다.

“뭐라는 거야. 진왕의 외숙은 여기 있는걸! 이 사람이 진왕의 외숙이지!”

주육이 영원을 가리키자, 묵칠과 소자람이 동시에 그를 흘겨봤다. 영원을 포함해서 아무도 주육을 상대하지 않고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일꾼에게 붙잡힌 양 구야는 한 손으로 소맷자락을 꽉 붙들고는 힘껏 잡아당겼다.

“뭐, 뭐라는 거냐! 무슨 찻잔? 네가 봤느냐? 그런 거 없다……. 어이쿠!”

짐꾼 하나가 허둥대며 지나가다가 양 구야와 부딪쳤고, 양 구야는 고함치며 저도 모르게 손을 놓다가 소매 안에 숨긴 찻잔이 바닥에 굴러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래도 발뺌할 거냐! 이래도 훔친 게 아니라고 할 거냐! 물어내라! 이 늙은 도둑놈 같으니! 얘들아!”

일꾼이 양 구야를 꽉 붙들고 고함치자, 양 구야도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놔라! 놔! 놓으라고! 저자다! 내 탓이 아니야! 어서 놓아!”

점포 안에서 일꾼 둘이 더 나와서 세 사람이 함께 양 구야를 붙잡았다.

“물어내!”

일꾼 하나가 허리를 숙여 찻잔 조각을 집어서는 양 구야 앞에 내밀었다.

“똑똑히 봐라. 이건 우과천청(雨過天晴: 비 온 뒤 갠 하늘. 여요汝窯의 일종) 잔이다! 3냥 4전짜리 잔이다! 은자 내놓고, 이 잔을 가지고 가라!”

일꾼이 찻잔 조각을 양 구야의 소매에 찔러넣었다.

“뭐라고?”

양 구야가 날카롭게 고함치면서 소매를 휘둘러 찻잔 조각을 더 멀리 팽개쳤다.

“3냥 4전? 우과천청? 말도 안 되는 소리! 놓아라! 잘 들어라, 나는 진왕의 외숙이다. 친외숙. 나는…….”

“퉤! 나는 진왕의 친이모다! 진왕의 친외숙이라고 해도 물을 건 물어야지! 진왕이 와도 물어야 해! 은자 내놓아라!”

“없다! 내가 은자가 어디 있어! 잘 들어라…….”

일꾼에게 붙들려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양 구야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간이 작은 사람이었다.

“딱 봐도 가난뱅이구먼! 옷감은 꽤 괜찮네. 다만…….”

일꾼은 양 구야의 영주 장삼을 들고서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더럽힐 수가 있지? 이렇게 꾀죄죄해서야 값어치가 없잖아!”

“발가벗겨서 때리고 치워라.”

장궤 같은 사람이 안에서 성큼성큼 나와서 양 구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분부했다.

“내가 내려가 볼까? 진왕과 알고 지내는데, 본 이상 가만히 있기 그러네.”

묵칠이 주저하며 말하자 영원이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라! 가서 데리고 올라와. 재미있는 사람이네. 데리고 와서 즐겨 보자고.”

“맞다, 맞아. 훌륭한 멸편 상공 아니냐!”

(※멸편 상공篾片 相公: 부호의 집에 빌붙어 사는 식객, 남의 이익을 얻어먹고 사는 사람)

묵칠이 사환을 데리고 허둥지둥 달려갔을 때, 양 구야는 옷이 다 벗겨져 속옷만 입고서 몸을 웅크린 채 양손으로 속옷을 꽉 붙들고는 눈물 콧물 흘리고 있었다.

야우가 성큼 나서서 5냥짜리 은표를 일꾼에 손에 쥐여주고는 다른 손으로 양 구야를 끌고 나왔다.

“양 구야가 깬 잔, 우리 나리가 대신 물어주신단다.”

은표를 받은 일꾼가 양 구야를 놓아주자, 묵칠은 지체하지 않고 야우에게 눈짓하고는 양손으로 속옷을 죽어라 붙들고 통곡만 하는 양 구야를 끌고 비연루로 돌아왔다. 씻겨줄 사람을 부르려고 하는데, 위에서 주육이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데리고 올라와! 얼른! 이 나리, 얼굴 좀 보자!”

묵칠이 손을 흔들자, 사환 몇이 양손으로 속옷을 붙들고 통곡하는 양 구야를 끌고 비연루로 올라갔다.

양 구야는 사환 손에 끌려 방 중간에 덜렁 놓였다. 비연루엔 곳곳에 얼음 대야가 놓여 있어서 속옷 하나만 입은 양 구야가 연신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고개를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한 채 눈알만 미친 듯이 굴리며 주변만 살폈다.

주육이 발을 구르며 웃어젖혔다.

“양빈을 만난 적 있는데, 어쩜 친아우가……. 하하하! 영원 형님, 저것 좀 봐. 털이 싹 뽑힌 원숭이 같잖아. 저, 저, 눈알 까뒤집은 것 좀 보게. 너무 재미있잖아.”

“일단 데려가서 좀 씻기고 옷 갈아입혀라.”

영원이 양 구야를 몇 번 훑어보고 사환에게 명령했다. 사환들이 양 구야를 들어 올려 씻기고 옷 갈아입히러 끌고 나갔다.

양 구야의 집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류만과 아라 등 기녀들도 양 구야를 알고 있었다. 양 구야가 아닐 때부터 알았는데 이런 꼴을 보고는 큭큭 웃어댔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엔 아예 발가벗겨져서 온 거리를 끌려다닌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깨끗하게 씻고 머리카락도 다시 올린 양 구야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참록(慘綠)빛 장삼을 입고 사환을 따라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왔다.

(※참록慘綠: 참록黲綠, 심록색으로, 풍채가 멋있는 사람, 미소년, 기생오라비 등을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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