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먼 강남에
영원이 살짝 취해서 정북후부로 돌아와 말에서 내리자마자, 위봉낭이 마중 나와서 골목 구석에 있는 작은 마차를 향해 입을 비죽였다.
“아라가 뵙고 싶답니다. 거의 한 시진 기다렸습니다.”
“나를? 무슨 일로? 들어오라고 해라.”
영원은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위봉낭이 마차를 향해 손짓하자 마차가 서서히 방향을 틀어 정북후부 후측문 쪽으로 갔다.
영원이 목욕하고 옷 갈아입고 나와서 사환이 건넨 차를 몇 모금 홀짝이고 있을 때, 위봉낭이 아라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라는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칠야, 저는…… 저는 칠야 곁에 있고 싶어요.”
영원은 찻물을 저 멀리 내뿜었고, 위봉낭은 어이없다는 듯 대들보를 바라봤다.
“칠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속량해 달라는 말이 아니에요. 저는…….”
아라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손수건을 힘껏 비틀었다.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 몸 곁에 널리고 널린 게 여인이다. 가진 것 중에 여인이 제일 많아.”
영원은 손을 닦고 새 차를 받아서 탐색하듯 아라를 바라봤다.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었다. 다만,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칠야 눈에 차지 않는 거 알아요. 칠야 같은 분은…… 원하는 사람은 모두 손에 넣으시겠지요. 그런 식으로 곁에 있겠다는 게 아니에요. 제 말은…… 칠야의 명령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칠야가 하라는 대로 다 할 거예요.”
아라는 이런 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내가 네게 시킬 일이 뭐가 있다고.”
영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일까? 내가 이 여인을 얕잡아 본 걸까? 경성에 숨은 인재가 이렇게 많았나?
“네가 말해 보아라. 널 쓸 일이 뭐가 있어서? 날 위해 뭘 할 수 있기에?”
“칠야께서 하라는 건 뭐든 할게요.”
아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영원은 찻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 찻잔을 톡톡 두드리면서 아라와 위봉낭을 번갈아 보다가 한참 만에 나른하게 말했다.
“그럼 말해 보아라. 내가 시키는 일 중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아라는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칠야께서 뭘 시킬 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영원은 눈을 부릅뜨고 아라를 바라봤고, 위봉낭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칠야, 아라를 너무 높이 사셨어. 아는 게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은데, 보아하니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그냥 기댈 곳을 찾아온 덜렁이야!
영원은 뒤로 기댔다. 이렇게 어리석은 아이를 거둬서 무얼 하랴. 하지만 됐다. 일단 거둬주자. 기댈 곳이 없다는 건 어찌 됐든 길조니까.
“그래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말해라.”
영원은 꼰 다리를 흔들면서 물었다.
“단 하나예요.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고, 밤을 함께 지내고 싶은 사람만 밤을 지내고. 만나고 싶지 않고, 밤을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강요하지 않는 것.”
보아하니, 몇 번이고 생각한 조건 같았다. 진작 생각을 다해 두어서, 지극히 순조롭게 줄줄 말했다.
영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야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지. 너는 네 행수가 사 온 것이다. 은자를 많이 들여서 키워냈는데, 내가 그걸 관여하려면 그 은자를 갚아야 하지 않느냐. 그게 속량해주는 것과 뭐가 다르지?”
아라는 다급해졌다.
“행수 어르신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아무리 까다롭게 굴었어도, 그동안 모은 돈으로 행수 어르신 돈은 갚을 수 있어요. 행수 어르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돈이 부족하지도 않고요. 다른 사람 문제예요. 제가 만나기 싫다고 하면, 난동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돌아가야 해요.”
“아, 그럼, 내가 만나라고 하는 사람을 네가 만나기 싫어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나?”
“칠야의 말씀이라면 고분고분 시중들게요. 칠야가 분부하지 않은 사람 말이에요.”
아라가 재빨리 해명했다. 영원이 차를 따르라고 찻잔을 들었다. 사환이 차를 채워주자, 영원은 아라를 바라보며 홀짝홀짝, 차 한 잔을 비우고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의협심 넘치는 사람이라……. 봉낭! 네게 맡기마. 잘 가르쳐라. 가르칠 수 있는 만큼 가르칠 수밖에 없겠구나. 너무 어리석다.”
영원은 일어서서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내실로 들어갔다. 위봉낭이 아라를 일으켜 세웠다.
“나와 가자.”
아라는 망연한 얼굴이었다.
“이건…… 허락하신 건가요?”
“아직은 아니다. 일단 시키는 일을 잘 끝낸 다음에 이야기하자.”
위봉낭이 가차 없이 대답했다.
보림사 밖 황가 별장. 장공주는 호숫가 누각에 앉아서 서늘한 산바람을 맞으며 호수에 가득 핀 연꽃을 감상했다.
녹운이 곁에 서서 해바라기 씨를 까면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서너 건은 있었습니다. 올해 강남서로 공원(貢院: 과거 시험장)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야 한다고 상주서를 올렸습니다. 은자 4만 냥을 조달해가고, 부자들에게 성금을 받았습니다. 은자 5천을 내면, 부학당에 한 사람 들여보내 주는 조건으로 족히 14만 냥 넘게 거뒀습니다. 공원을 수리하는 데는 2만 은자밖에 안 들었다고 합니다. 올해 강남서로에서 화폐를 주조하느라 발생한 은의 손실이 더 커졌다고 합니다. 해마다 높아지고 있고요.”
“그 동민(童敏)이라는 자가 대황자 쪽 인사라고?”
“그런 셈입니다. 진사 출신인데, 처음엔 수국공부에 의탁했고 친누이를 주유해의 첩으로 보내서 주유해 처의 눈 밖에 났고, 주유해가 할 수 없이 대황자에게 소개했습니다. 아첨에 능한 사람이라 승승장구해서 강남서로 포정사(布政使)까지 올랐습니다.”
복안 장공주가 해바라기 씨를 몇 알 집어 먹었다.
“그자로 하자. 사람을 보내 문도를 불러.”
“문도를 보내시려고요? 그럼 이 낭자는요?”
녹운은 놀라고 걱정스러웠다. 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문도 말고 쓸 만한 사람 있어? 이런 큰일을 맡길 사람은 그자밖에 없어. 아동은…….”
복안 장공주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모친이 있으니까, 몰래 그 아이를 보호할 거고, 또 나도 있잖아.”
“네.”
녹운은 말을 전하러 누각에서 나갔다.
문 이야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멈을 따라오면서도 너무 긴장해서 더운 줄도 몰랐다.
복안 장공주가 부르다니, 무슨 일일까. 보통 일이 아니겠지!
문 이야는 기대 반 걱정 반, 기쁘고 또 두려운 마음을 달래며 누각으로 들어갔다. 누각 안엔 장공주 혼자서 팔걸이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문 이야는 자기는 서 있고 장공주는 앉아 있는데도 그녀가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영원을 만났다고?”
복안 장공주의 첫마디에 문 이야는 식은땀을 흘렸다. 무섭기도 하고 긴장도 되고, 목이 바짝 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룁니다, 장공주, 소생이…… 소인이…….”
“영원이 뭐라고 했지?”
복안 장공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로 영원을 만나러 가다니, 간이 참 크구나!
“영 칠야는 장공주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식은땀을 흠뻑 흘린 문 이야는 이제 이판사판이었다. 장공주도 언젠간 영가와 손을 잡을 것이다. 바로 그걸 예상했기에 영원을 만나러 간 것이기도 했고.
“내 예상대로?”
복안 장공주가 작게 하, 소리를 냈다.
“내 예상이 무엇인지 말해 봐.”
“영원은 허튼짓하는 망종이 아닙니다. 준비한 바가 있어서 온 것입니다.”
문 이야는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말은 아까보다 자연스러워졌다.
“아하.”
복안 장공주는 무슨 의미인지 모를 소리를 내더니 입을 다물었다. 문 이야는 손을 늘어뜨린 채 공손히 서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때쯤, 복안 장공주의 냉담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영리한 사람이고 배포도 크고. 좋은 점이지.”
문 이야는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였다.
“내일 바로 출발해서 강남서로로 가. 할 수 있는 한 서두르고. 태평부에 도착해서 다시 지시를 기다려.”
문 이야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들고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는 무표정한 얼굴,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자네 태태에겐 사실대로 이야기해. 그리고 은자를 써야 할 곳이 많을 테니 미리 준비하고.”
“예!”
문 이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순간 말로 못 할 흥분이 치밀었다. 큰일을 하러 가는 것이다!
“이것들을 가지고 가. 가는 길에 잘 읽어 보고, 확실히 새겨.”
복안 장공주는 누각 중간에 있는 둥근 탁자 위에 놓인 푸른 천 보따리를 가리켰다.
문 이야는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끌어안았고, 복안 장공주는 손을 휘저었다.
“가 봐.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고.”
문 이야는 보따리를 안고 지척지척 나와서 마차에 올랐다. 서가아에게 젖은 수건을 달라고 해서 몇 번이고 닦은 다음 숨을 들이쉬고 내쉰 후에야 조금 진정되었다.
장공주는 상상보다 더 위엄 넘쳤고 날카롭고 예리했다.
보따리를 열어보자 안에 문집 네댓 권이 들어있었다. 펼쳐 보니 첫 장에 동민이 진사가 되었을 때 낸 책론이 있었다. 문 이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둘러 뒤로 넘기고, 또 뒤로 넘겼다. 동민이 거인이 되었을 때 지은 문장, 그 뒤로도 그의 문장이었다. 더 뒤엔 한림원에 있을 때 지은 모든 문장이었고, 그 뒤엔 그가 올린 모든 상주서였다. 책자 네댓 권이 모두 동민이 썼던 문장, 그리고 상주서였다.
문 이야는 서서히 문집을 닫았다.
동민은 대황자의 사람이었다. 장공주는 지금 동민을 이용해서 대황자를 건드리려는 것이었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다. 장공주는 지금…….
생각이 미친 문 이야는 들떠서 펄쩍 뛰다가 마차 지붕에 머리를 박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다시 털썩 앉아서 중얼중얼했다.
“상위자는 역시 남다르군……. 역시…… 그래……. 분명 그런 것이다. 대야, 정말 큰 행운을 얻었구나.”
자등 산장 앞에서 마차에서 내린 문 이야는 대문 앞에 서서 한참 주저하다가 서가아를 향해 손짓했다.
“바로 성으로 들어가서 칠야를 만나라. 내가 내일 아침 일찍 강남으로 간다고 한마디만 전하고 와라.”
“예이!”
서가아는 강남으로 간다는 말에 순간 들떠서 두 눈을 빛내며 쪼르르 달려가서 말을 끌고 나와 경성으로 직행했다.
안으로 들어간 문 이야는 곧바로 장 태태를 만나러 갔다. 문 이야의 말을 들은 장 태태는 한마디도 묻지 않고 우선 장원에서 공 대랑을 불러들여 문 이야와 함께 태평부로 갈 사람을 고르게 했다. 그리고 영리한 심복 종복을 골라오라고 만 어멈과 손 어멈을 불렀다.
만 어멈은 바로 외출하려다가 웃는 얼굴로 문 이야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야, 어떻게 가실 생각입니까? 시녀도 두엇 골라올까요?”
문 이야가 허둥지둥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시녀는 하나도 필요 없네!”
“그럼 소유를 보내드릴까요? 가는 길에 적어도 먹을거리 걱정은 하지 않아야지요.”
손 어멈도 따라서 제안했지만, 문 이야는 이번에도 손을 저었다.
“소유 낭자까지 번거롭게 할 것 있나. 그리고 일하러 가는 것인데 찬모를 데리고 가면 너무 눈에 띄지. 두 사람의 호의에 감사하네.”
문 이야는 일어서서 깊이 장읍했다.
만 어멈과 손 어멈이 나간 후, 장 태태는 영 대장궤를 불러오라고 했다.
영 대장궤는 저녁 무렵에야 달려와서 문 이야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