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솔직한 이야
영원은 손가락으로 쥘부채를 빙빙 돌리다가 턱을 내밀었다.
“그래, 너희 이야를 한 번 만나보자꾸나.”
“따라오십시오, 칠야. 이쪽입니다.”
사환은 허리를 숙이고 앞장서서 골목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더니 품에서 열쇠를 꺼내서 검은 칠한 후측문을 열고 먼저 들어간 다음 영원을 향해 손짓했다.
영원은 대호를 비롯한 사환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눈짓한 다음 대영, 대웅 두 사람만 데리고 들어갔다.
들어가서야 이곳이 주루 뒤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환은 익숙한 듯 매우 빨리 걸었고, 금세 지극히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마당 앞에 도착해서 문을 밀었다.
“칠야, 들어가십시오. 소인은 바로 가서 주안상을 올리겠습니다.”
영원은 입구에 서서 주위부터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마당으로 별채는 없고 중간에 세 칸짜리 상방이 있었다. 상방 앞에 한 사내가 고개를 치켜들고 서 있었다. 몇 가닥 없는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기른 사내는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손으로 낡은 쥘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비범한 기개인데, 겉모습 때문에 우스꽝스럽고 옹졸해 보였다.
영원은 그 사내가 문 이야라는 걸 알아봤다. 오가아 생일 그날, 마지막 배에 서서 지휘하고 자!
“자네가 날 찾은 건가? 뭐 이리 비밀스럽게.”
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르륵 부채를 펼치며 문 이야를 지나쳐 곧장 실내로 들어갔다.
“칠야, 제가 누군지 알아보셨습니까?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문 이야는 서둘러 그를 따라 들어가서 체면 차리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서 공수했다.
“소생 문가, 문도라고 합니다. 지금 자등 산장에서 이가의 막료로 지내고 있습니다.”
“자네를 아네.”
영원은 서가아가 내민 차를 들어 올려 냄새를 맡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멀쩡한 찻잎을……. 대영! 차 내리는 법을 좀 가르쳐라.”
문 이야는 찻잔을 들어 매우 흡족한 듯 홀짝였다.
“가르칠 것 없습니다. 칠야의 차만 새로 올리라고 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게 좋습니다.”
영원이 삐딱하게 바라보자, 문 이야는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밖에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일꾼이 술안주를 마당 앞에 가지고 왔다. 단가아와 환가아가 몇 번 왔다가 갔다가 하며 정교한 요리 몇 가지와 술 주전자 두 개를 늘어놓았다.
“밖에서 기다려라.”
문 이야가 사환들에게 지시하자, 대영과 대웅은 영원을 바라봤다. 영원이 눈을 내리깔자, 공손히 물러나서 서가아, 환가아와 함께 각 방향으로 서서 사방을 지켰다.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 아니면, 자네 동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영원은 주안상엔 손도 대지 않고 여전히 차를 홀짝이고는 문 이야를 빤히 바라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호쾌하시군요! 허허. 우리는 칠야를 도와드리러 온 것입니다.”
“날 도와? 하! 이 몸은 부족한 게 없는데, 무얼 돕겠다는 거지? 설사 도움이 필요하대도, 자네는 그럴 자격이 없네.”
영원이 우스운 듯 눈썹을 높이 치켜떴다.
“칠야의 인당(印堂: 미간)에 갈등이 가득하고 눈썹이 흐트러졌습니다. 갇힌 맹수 같은 상이지요. 칠야에겐 가르침을 줄 사람이 부족합니다.”
문 이야가 관상으로 그런 말을 하니, 영락없이 길에서 점을 보는 사기꾼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원은 머릿속이 번쩍했다. 그는 입을 비죽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삐딱하게 문 이야를 바라봤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남을 경계하는 마음, 옳습니다. 그렇게 하셔야지요. 이 경성은 칠야에게 호랑이 소굴 같은 곳이니까요. 저를 믿지 않으시는 것, 마땅히 그러셔야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제가 칠야를 믿습니다. 칠야 같은 호걸 앞이니, 저는 있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문 이야는 성의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영원은 차를 홀짝이며 문 이야를 바라봤다.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네 분 나리 중에, 첫째와 넷째.”
문 이야가 손가락 하나를 내밀고 또 네 개를 내밀었다.
“소생의 짧은 식견과 안목으로는 그 두 분에게 천명이 없습니다. 셋째는, 칠야께서 제가 누군지 아는 이상, 우리 동가 집안에 일어난 사소한 일도 분명 명확하게 조사하셨겠지요. 강가가 셋째에게 의탁했습니다. 그런 배은망덕한 집안인데, 우리 낭자가 잡아먹힐 나날을 기다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다섯째밖에 없습니다. 칠야, 우리는 뜻이 같습니다.”
영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허튼소리를 하는군. 일개 상인 가문에서 함부로 국사를 논의하다니. 사는 게 질린 모양이지. 이런 큰일에 너희가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칠야, 먼 곳에서 오셔서 경성에 조력이라곤 거의 없으십니다. 망나니, 무뢰한인 척 적을 현혹하는 방법, 실로 절묘합니다만,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칠야에 대한 경계와 방어, 그리고 공격을 차단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뜻있는 인사가 의탁하려는 길도 끊어놓았습니다. 지금 칠야 곁엔 주육, 묵칠 패거리뿐입니다. 일 망치는 것은 잘하지만, 일을 성사하는 덴 전혀 부족한 인사들이지요. 칠야, 어쩔 계획이십니까? 이 국면을 어찌 헤쳐나갈 생각이십니까?”
문 이야는 무시하는 영원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영원의 안색이 변했다.
“이게 첫 번째이고, 두 번째. 영 황후와 오황자가 아직 별궁에 갇혀 있습니다. 병약함을 구실로 스스로 보호하며 꿈쩍도 못 하고 있지요. 하지만 오황자가 하루빨리 조정 대신 앞에 모습을 보이고, 대신과 백성 앞에 건강하고 영특한 모습을 보여서 황자의 모든 책임을 맡기 충분하다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칠야, 무엇으로 민심을 포섭하시려고요? 무엇으로 다투시려고요? 칠야, 영 황후와 오황자가 벗어날 방도는 다 생각하셨습니까?”
영원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매서운 눈빛으로 문 이야를 노려봤다. 문 이야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샛눈을 뜨고 싱글벙글 웃었다.
“칠야,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어디부터 착수할지, 다 의중이 있으시겠지요?”
“누가 보낸 것이냐? 이가? 장씨? 이신? 아니면.”
영원이 말을 잠시 멈췄다.
“장공주?”
“장공주는 세상일을 묻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칠야가 경성에 이름을 날리긴 했어도, 그 어르신을 움직이진 못합니다.”
문 이야는 그 김에 가볍게 영원을 한 방 먹였다. 아까 이가를 무시하던 걸 돌려준 셈이었다.
“이가가 간이 참 크군.”
영원은 문 이야의 각박한 말에 연연하지 않았다.
“칠야가 힘들어 보여서 그런 것이지요. 우리 태태는 마음씨가 곱답니다.”
영원은 순간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 들었다. 문 이야 이 인간, 남을 가지고 놀려면 얼마든지 놀 수 있는 사람이로구나!
영원은 따듯한 물에서 술잔을 꺼내서 술을 따라 천천히 홀짝였다.
“상인 가문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늘을 집어삼킬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칠야, 그 말씀은 옳지 않습니다. 첫째, 이가가 장사를 하긴 합니다. 그러나 상인 가문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태태의 증조부 대에 이미 이가는 양적(良籍)에 들었고, 태태의 부친은 정당한 수재 출신입니다. 우리 대야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거인이 된 강남의 유명한 재자입니다. 내년 춘시에 급제만 하면 진사 가문이 됩니다.”
문 이야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고, 영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내가 잘못 말했군.”
“칠야, 칠야는 사리에 밝은 분이십니다.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우리 태태에게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생겼든 아니든, 이가는 벌써 그 판 안에 있습니다.”
문 이야는 난처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대야가 내년 춘시에 진사가 된대도, 지방으로 보내지면 지현입니다. 육부(六部)에서 일개 6, 7품 말단 관리입니다.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우리 대야가 한 걸음, 한 걸음 4품, 3품이 되면, 허허!”
문 이야가 헛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진작에 모든 일이 다 정해졌을 것이고, 세상이 새로워지면 우리 대야는 참신한, 때 묻지 않은 신하가 되겠지요. 그런데 뭐 하러 이런 흙탕물에 끼어들겠습니까. 칠야, 그렇지 않습니까?”
“자네가 나를 찾아온 것, 장공주는 아시는가?”
영원이 한참 침묵하다가 물었다.
“칠야가 생각하시기엔요?”
문 이야가 쥐새끼 수염을 쓰다듬으며 영원에게 눈을 찡긋했다. 영원은 그 눈짓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못났잖아!
“그래서 이가는 무얼 할 생각이지?”
영원은 술을 따라 단숨에 마시고 문 이야를 바라보며 물었다. 문 이야가 빙그레 웃었다.
“이가는 스스로 보호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른 건 바라는 게 없어요. 이가는 돈도 있고, 사람도 있습니다. 바라는 건 그저 공정함뿐입니다. 대야가 공정하게 벼슬길에 오르고, 낭자가 공정함을 얻을 수 있기를, 그것뿐입니다. 달리 바라는 게 없습니다.”
문 이야도 잔 하나를 꺼내서 술을 반 잔 따랐다.
“이가엔 돈도, 사람도 있다라.”
영원은 문 이야를 향해 잔을 들어 보였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돈은 우리 영가에도 얼마든지 있거든. 사람이란, 이야, 본인 이야긴가?”
“이가의 돈은 칠야에게 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칠야에겐 돈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가엔 칠야에게 없는 사람이 있지요. 예를 들면.”
문 이야는 술 반 잔을 비우고 영원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장공주.”
영원의 눈빛이 순간 매서워졌다. 장공주가 벌써 이가의 은자를 쓰고 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얼 하려고?
“그리고 사람은, 소생도 한몫하기야 하지요. 하지만 칠야는 영리한 분이니, 소생 같은 사람은 고작 한몫밖에 못 하겠지요.”
문 이야를 빤히 바라보는 영원의 시선이 갈수록 가라앉았다. 장공주는 확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감지하긴 했다. 이가도 확실히 장공주 손에 판으로 끌려들어 왔다. 혹은 이가에서 장공주의 손을 빌려 판에 들어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문도, 대체 누굴 위해서 나를 떠보러 온 것일까? 이가? 아니면 장공주?
이가를 대신해서 온 거라면, 일개 이가는 지금이라도 원하기만 하면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 장공주를 대신해서 온 거라면……. 장공주는 무얼 하려는 걸까. 의중이 무엇일까?
“장공주 이야기를 해 게.”
영원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장공주라…….”
문 이야가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에, 영원은 몇 가닥 없는 쥐새끼 수염을 확 다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칠야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잖습니까. 장공주는 출생부터 비범했습니다. 일곱 살까지…….”
“그런 건 나도 알고.”
영원은 문 이야의 일장연설을 미리 차단했다.
문 이야는 전혀 개의치 않고 빙그레 웃었다.
“아시면 됐습니다. 아신다니, 칠야도 장공주의 성격을 잘 아시겠지요.”
문 이야의 말이 뚝 그치자, 영원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잠시 후 다시 물었다.
“어째서 혼인하지 않는 건가?”
“그야,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소생 생각엔, 아마도 이 세상에 장공주의 눈에 들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아니겠습니까.”
문 이야는 매우 단호한 말투로 말했고, 영원은 헛웃음 쳤다.
“자네 생각? 장공주를 몇 번이나 만났기에?”
“실언했습니다. 낭자의 생각이라고 해야 옳겠지요. 하지만 소생도 낭자의 생각이 일리 있다고 느낍니다.”
문 이야는 진지하게 대답했고, 영원은 웃음이 나려 했다. 그러나 웃음이 나오기 전에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낭자의 생각이라. 이댁 낭자. 시화 같던 강남 수향의 어린 낭자. 장공주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을 듯했다.
그의 처지는 문도의 말대로였다. 갇힌 맹수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이 바로 기회일지도 모른다. 설사 함정이라도 하더라도.
함정에서 빠져나오려고 위험을 무릅쓴 적도 이미 여러 번이고.
영원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가장 중요한 결정은 마음 깊은 곳의 느낌을 따라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