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몰랐던 옛이야기
복안 장공주의 목소리는 오히려 평온한 편이었는데, 이동은 손이 부들 떨렸다.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손등에 엎은 차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내 큰 조카의 나를 향한 관심이야. 내 뒷산을 주유민, 영원 같은 도둑놈도 마음대로 드나든다고, 내 안위가 걱정된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황상에게 진언해서 날 위한 호위를 손수 골랐다나.”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모습으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황상은요?”
영원과 주 육소야는 사황자 자손의 기복 발원 때문에 온 것이다. 복안 장공주가 손수 베낀 경문을 선물했고, 사황자 자손을 위한 기복 법회를 연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질투인가? 아니면 경계?
“대황자부 대저아의 기복 법회도 열어 주셨었나요?”
복안 장공주가 이동을 흘겨봤다. 이동은 묻자마자 바보 같은 질문이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복안 장공주는 대황자와 사황자를 도저히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평하게 대할 것이 뻔했다.
“황상은 효성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셨지.”
복안 장공주는 이동이 먼저 물은 질문에 대답하며 손에 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힘껏 내던졌다. 찻잔이 한가득 핀 장미꽃에 내리꽂혔다.
“아버지가 처음에 왜 황상을 마음에 안 들어 했는지 알아? 어리석어서야! 너무나 어리석어서!”
이동은 대답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다행히 장공주의 말은 대부분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동은 일어서서 찻잔을 새로 가지고 와서 다시 차를 내렸다.
“아직 그 자리에 오르지도 않았으면서. 심지어 오를 수 있을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손만 뻗으면 내 목을 틀어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정말 그 어미에 그 자식이군.”
복안 장공주는 등받이에 기대서 손가락으로 빠르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차를 붓던 이동의 손이 멈칫했다. 찻물이 밖으로 튀자, 이동은 찻물을 버리고 새로 내려서 장공주 앞에 밀어주고는 입술을 깨물고 한참 주저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눈에 보이는 위기는 적어도 짐작은 할 수 있어요. 때론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일이나 사람이 갑자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죠. 혹은, 갑자기 내가 본 것,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요. 그런 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복안 장공주가 지극히 예민하게 물었다. 이동은 고개를 숙이고 찻잔에 담긴 차를 내려다봤다.
“생각지도 못한 위험이야말로 진짜로 위험한 거예요.”
“맞는 말이야. 하지만, 하나 마나 한 말이야.
날개가 자라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날 경고하려고 하다니. 마침 잘됐네. 두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해야겠어. 아동,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복안 장공주가 바로 분부하자, 이동은 그녀가 지시하길 기다렸다.
“황자 녹봉으로는 집안을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하지. 큰일을 하려면, 예를 들어, 내 큰조카는 온 집안에 사사(死士)를 기르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 조정 대신으로 키울 문인들도. 그런 은자가 어디에서 났을까?”
“장사로요?”
이동은 재빠르게 추측했다. 장공주가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곤 장사밖에 없다. 무얼 할 생각이지?
“음, 하지만 본 황조의 법도에 따르면 황가는 백성과 이익을 경쟁하는 일을 할 수 없어. 그러니 다른 사람 명의로 두었지. 대황자의 장사는 모두 수국공부 세자 부인 하씨 혼수를 포함해서 하가 사람들이 대신 관리해주고 있어. 한 달 안에 큰 손실을 입힐 방법을 생각해 봐.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손실이라야 해. 남은 반년은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이동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장공주를 바라봤다. 그렇게 되면 그녀와 이가는 대황자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수국공 주가와도.
“원한 맺을까 봐 두려워?”
복안 장공주가 샛눈을 뜨고 이동을 바라봤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 하가는 처음에 장사로 시작한 가문이 맞아. 그런데 몇 대쯤 전에 무과를 보고 벼슬길에 올랐지. 무장 가문은 싸움만 잘하면 은자가 넘쳐나. 하가도 장사를 하지 않은 지는 오래됐어. 하가가 대황자를 대신해주는 그 장사도 무슨 장사인지, 어떻게 관리하는지 나는 몰라. 다만, 너희 가문처럼 진짜 능력으로 장사하는 건 아니라는 건 확실해. 하가도 영리한 집안이 아니고, 대황자는 더 어리석어. 뭐가 두려워?”
이동은 한참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확실히, 대황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주 귀비와 관련된 인물은 천명을 받지 못했으니까.
복안 장공주는 조금 놀란 얼굴이더니 곧 웃음 지었다.
“너도 간이 참……. 정말이지 쉽지는 않아. 내가 있으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저 혼자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요. 게다가 혼자는 아무래도 생각이 닿지 않는 면이 있을 테니까요.”
“응. 네 저택에 문 이야라는 사람, 써도 돼. 잘됐네. 이번에 써 보고 괜찮으면 다른 일에도 쓸 일이 있어.”
복안 장공주가 이동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리고 네 어머니, 나는 네 어머니와 너를 하나로 생각해. 두 사람을 따로 생각한 적 없어.”
“네.”
이동은 살짝 안도했다. 문 이야와 상의하는 걸 허락했으니, 일을 성사할 자신이 커졌다.
“문도의 증조부가 문가를 일으킨 이래 큰 인물이 아니면 보좌하지 않았어. 그런 문도가 네 집에 간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어?”
복안 장공주는 이제 흐렸던 기분이 맑아진 듯했다.
이동은 멈칫하다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문 이야가 처음에 거절했다가 나중에 스스로 찾아온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줄곧 걱정거리로 남았었고. 문 이야와 강가에 그녀가 모르는 깊은 인연이 있을까 봐 제일 걱정이었다.
“너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네 어머니는 아니?”
“어머니는 문도라는 사람도 몰랐어요.”
이동은 유심히 생각해 보았다. 어머니는 분명 모를 것이다. 오라버니도 모르고. 어머니와 오라버니는 아마도 그를 능력이 조금 있는 평범한 막료로 여길 것이다. 잘 먹고 살 주인을 고른다면 이가와 이신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긴 이야기야.”
복안 장공주가 다리를 흔들며 말문을 열었다.
“문도의 부친과 숙부, 모두 상관의 잘못으로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지. 그건 너도 알지?”
이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문도의 숙부 일로 시작해. 문도의 숙부가 심리를 보좌했지. 심리 이 사람은 수리에 재능이 있었어. 그 방면의 천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그런데 인품이 비열해. 재산과 권력을 탐하고 저급하고 비열하지. 문도의 숙부는 심리의 재능을 아꼈고, 심리가 독직으로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자기 은자를 써서 심리를 구해냈어. 심리의 목숨과 앞날을 지켰지. 그런데.”
복안 장공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사람에게 장래를 건 셈이야. 심리는 문가의 재산에 눈독을 들였고, 동향 사람과 손잡고서 문도 숙부와 부친에게 동시에 죄를 물었어. 하나는 옥에서 사적인 형을 받고 죽었고, 하나는 길에서 학대받고 죽었지. 문도는 달아나서 상원현으로 돌아갔어. 문가 모든 장원, 양전 그리고 모든 점포를 팔고 원 장군의 후손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다가 여 승상 손에 들어가게 됐어. 모든 가산을 내놓고 오로지 숙부와 부친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지. 그리고 심리의 죽음도. 그때 그자는 자기 부친과 숙부가 이미 죽은 걸 모르고 있었어.”
이동은 찻잔을 힘껏 움켜쥐었다. 너무나 놀라고 무섭고, 마음 아픈 이야기였다.
“나중에 부친과 숙부가 이미 죽은 걸 알고는, 문도는 단 하나만 요구했어. 심리를 죽여서 복수하겠다고. 여 승상은 그의 은자를 받고 심리의 사건을 재심했지. 독직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인 악행도 있었어. 심리는 참수당했는데 심리 사건을 조사하다가 문도의 숙부가 저지른 살인 사건도 나왔어. 심리를 지키려고, 문도의 숙부도 안 좋은 일을 한 거야. 하지만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여 승상이 그 사건은 덮었지.”
복안 장공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이야기했고, 이동은 침묵하고 듣다가 물었다.
“문가에서 은자를 얼마나 많이 줬나요?”
“173만.”
복안 장공주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이동을 바라봤다.
“내가 왜 이렇게 자세히 아는 줄 알아?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여 승상이 모두 황상에게 밀서로 전했으니까. 무슨 밀서를 봤는지는 묻지 말고. 그 은자는 모두 태후의 명의로 재난 구제하는 데 쓰였어. 여 승상은 은자를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고 힘든 사람 구제하는 데 썼어. 문도는 거기까지만 알아. 문도 이 사람, 의리 있는 사람인 셈이지. 자기가 여 승상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투신장(投身狀)도 썼었어. 평생 여씨 가문의 노비로 살겠다고. 그런데 여 승상이 받지 않았지. 문도는 여 승상에게 보은하려고 네 집에 간 거야.”
이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 승상에게 보은하는 거랑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어서요? 여 승상이 우리 집안에 무슨 은혜를 입어서요?”
복안 장공주가 이동보다 더 놀란 눈치였다.
“그것도 모르는 거니?”
이동은 어깨를 으쓱하며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당연히 모르지. 우리 가문과 여씨 가문이 무슨 관계가 있을 게 있어서.
“네 외조모…… 참 재미있네. 이런 일을 나 같은 남이 말하게 하다니 말이야. 네 외조모의 모친, 그러니까 네 어머니의 외조모.”
이동은 잠깐 정리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요?”
“여 승상은 어렸을 때 가난해서 밥도 잘 못 먹었어. 글공부하고, 견문 넓히러 나가고, 그리고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든 것 모두 네 외조모의 모친 도움 덕분이었어. 네 외조부도 여 승상과 동창 인연이 있고. 매우 사이가 좋았어. 너희 이가…… 아니, 이가가 아니지. 네 외조모는 홀로 딸을 키웠고, 네 어머니도 홀로 딸을 키웠지. 너도 그런 셈이니, 너의 가문 참 재미있네.”
복안 장공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썹을 까닥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없어요.”
이동은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일이 다 있었어? 전엔 한평생 살면서 전혀 몰랐어! 내가 알았다면…….
“그래. 네 외조모가 왜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아?”
복안 장공주는 다리를 흔들며 찬란하게 웃었다.
“여 승상은 진사 이갑 일등으로 급제했어. 갓 스물 남짓했을 때고, 인품이 우수하고 성격, 성품 모두 훌륭한데 식솔은 단출하고 아직 정혼하지 않았으니 그 해 급제한 사람 중에 가장 탐 나는 사윗감이었지. 그때 여 승상을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음, 아버지도 마음이 동했었지. 하지만 공주 중에 나이가 적당한 사람이 없었어. 아버지는 여 승상 중매도 섰었어. 여 승상은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무산불시운(巫山不是雲)이라는 말을 남겼어. 무산의 구름이 아니면 구름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은 안 된다는 말이었지.”
“외할머니는 그때 아직 외할아버지와 혼인하지 않았나요?”
이동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혼인했지. 네 외조부가 별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어. 외조모가 막 네 어머니를 낳은 때였고. 여 승상이 혼담을 넣었는데,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르겠고 어찌 됐든 성사되지 않았어. 그리고 여 승상은 노 안원후의 막내딸과 혼인했지. 소 노부인은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자랐지만, 사람은 좋았어. 성격이 조금 교만하고 화가 많아서 그렇지. 질투는 더 심했고. 하필 여 승상이 그 당시에 ‘무산불시운’이라고 말한 걸 아는 사람이 많았지. 적어도 소 노부인은 알고 있었어.”
복안 장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