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화일지 복일지 모를 일
“묵신!”
“예!”
“네 조부가 변변찮은 네 걱정에 얼굴 펼 날이 없더구나! 그런데 영원과 이런 난동을 부리다니. 소자람, 너는 이미 세자가 된 몸, 앞으로 종사를 이어받아 일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허튼짓을 하다니! 다 너무 한가한 것이지! 내일부터, 너희 둘은 경성의 하도(河道)를 순시해라. 수리할 건 하고, 소통할 건 하고, 기한은 두 달이다. 너희 둘, 반드시 경성의 모든 하도를 싹 다 둘러봐야 한다. 수리하고, 소통하고. 명심해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직접 가야 한다. 짐이 몰래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지켜볼 것이다!”
“묵신, 황은에 감사드립니다.”
묵칠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한여름에, 경성의 모든 하도를 직접 둘러보라니. 두 달이 지나면 쪄 죽거나, 타 죽거나겠지!
그런데 소자람은 살짝 들뜬 모습이었다. 이 임무를 잘 끝내면, 외조부도 뒤에 있고, 위로 올라갈 절호의 기회다!
전교를 전한 사황자는 목과 팔을 풀어주고 뒷짐 진 채 다시 모두를 훑어보고는 바닥에 쪼르르 놓인 꿩을 툭툭 차다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꿩을 먹어봤지만, 이렇게 체면을 버리고 쫓아갈 정도로 맛이 좋더냐? 너희들 꼴 좀 봐라.”
사황자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 임무들은 고모의 생각이시다. 너희들이 너무 한가해서 그러는 거라고, 반년 동안 고된 일을 하는 게 좋겠다고 황상께 말씀드렸는데, 나와 황상께서 너희를 가련히 여겨 줄인 것이다. 반년 동안 힘든 일을 하다가, 변변치 않은 너희들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않으냐. 됐다. 다들 힘든 임무를 맡았으니 이것도 고된 일을 하는 셈이겠지. 고모의 뒷산에서 꿩을 훔치다니. 넷 다 간이 참 크구나.”
주육이 앞으로 다가갔다.
“형님, 사실은 우리 좋자고 꿩을 잡은 건 아닙니다. 잡아서 왕부에 보내려고 했어요. 꿩은 몸보신에 최고입니다. 왕부에 새 식구가 생기잖습니까. 꿩이 최고입니다. 나와 영원 형님, 그리고 소칠, 소 대랑은 형님에게 보내려고 잡은 겁니다.”
사황자가 도끼눈을 하고 주육을 바라봤다.
“지금 이 꿩이 너희들이 내게 보이는 성의라고 말하는 것이냐?”
“그렇지요, 그렇지요.”
주육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은 그래도 태연하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묵칠과 소자람은 일제히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육을 바라봤다.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이놈도 언제 이렇게 낯짝이 두꺼워졌지?
“왕부로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고모께서 나까지 나무라실 뻔했어! 그리고 이 몸은 이런 꿩 같은 건 필요 없다. 왕부에 꿩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다른 것도 다 필요 없다. 앞으로 너, 그리고 너!”
사황자가 주육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고 좀 그만 쳐라! 난 그거면 된다. 그리고 착실하게 임무를 해라. 특히 너.”
사황자가 이번엔 영원을 가리켰다.
“경부 관아에 가면 네 고얀 성격을 잘 다스려라. 위세를 떨고 허튼짓하며 사고 쳤다간, 황상께서 널 용서해도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알아들었느냐?”
“예!”
영원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듬직한 모습으로 대답하자 사황자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됐다, 됐어. 얼른 돌아가라. 꼴들 좀 보라지. 냄새는 또 어떻고. 내가 다 부끄럽구나!”
네 사람은 물러나서 선덕문으로 나왔다. 주육은 사슬을 벗어난 원숭이처럼 쉴 새 없이 목과 팔을 풀었다.
“아이고, 또 꿩을 못 먹었군. 밥도 아직 못 먹었어. 옷 갈아입고 나와서 좋은 곳에 가서 기분 풀자고.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다들 고생해야 하잖아.”
영원이 묵칠을 향해 눈짓했다.
“그럼 연향루로 가자. 일이 마무리되어야 마음 놓고 일에 집중하지.”
“맞다, 맞아!”
묵칠이 연달아 대답했다. 아라가 자꾸 사람을 저택으로 보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소자람은 조금 머뭇거렸다.
“나와 소칠은 내일 바로 하도 순시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하천 지도 같은 거를 봐야 하지 않을까. 노선도 짜고…….”
“됐어. 내일 당장 조정 대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네. 그 집안이나 이놈의 집안이나!”
주육이 소자람과 묵칠을 번갈아 가리켰다.
“잔뜩 있는 막료는 어디에 쓰려고? 게다가 내일은 일단 공부에 가서 복명하고 인장과 요패를 받아야 지도를 받지. 잘 들어. 내일은 하도 비슷한 걸 볼 생각도 하지도 마. 인장도 못 받을걸. 준비된 임무가 아니라서 인장을 새로 새겨야 할 텐데, 당장 나올 리가 있나! 됐다. 연향루에 가자. 삼각 뒤에 연향루에서 만나자!”
어찌 됐든 주육은 임무를 받아본 사람이고,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소자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사람은 각자 저택으로 돌아가서 서둘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연향루 흐릿한 불빛 아래, 아라는 금을 쓰다듬으며 구슬픈 곡조를 켜고 있었다.
마음을 정한 그날, 우선 행수기녀에게 뜻을 전했다. 행수기녀는 일단 두고 보자고 말했을 뿐, 속량하려면 은자가 얼마나 필요한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손님을 받지도 않았다. 그날부터 묵칠 외에 다른 손님을 접대하지 않으면서 연향루는 죽은 듯이 조용했었다.
아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녀는 여섯 살쯤부터 언니들을 따라서 이 떠들썩한 연향루에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앞으로는 매일매일 오늘처럼 등불 하나 켜고 홀로 금을 켜며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야우의 전갈을 받은 행수기녀는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사람을 불러 주안상을 준비하고 더 큰 소리로 다다를 불러서 묵칠 소야, 그리고 영 칠야, 주 육소아와 소 대야가 온다고 말했다.
야우는 류만을 비롯해서 자주 왕래하는 기녀를 부르러 갔다. 가장 가까운 류만이 올라왔을 때, 연향루엔 다시 곳곳에 촛불이 켜지고 온통 환하게 밝아졌다.
기녀들이 속속 모이고, 주육이 가장 먼저 당도했다. 뒤이어 소자람과 묵칠도 왔다. 영원이 제일 마지막에 도착했지만, 그리 늦진 않았다.
연향루는 순간 화려해지고 더할 나위 없이 떠들썩해졌다.
묵칠은 무슨 일인지 계속 아라를 붙들고 술을 마셨고, 영원과 다른 사람도 계속 부추겼다. 아라가 주량이 괜찮긴 해도, 여러 사내가 큰 잔으로 술을 먹이다 보니 고작 반 시진 버티고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아라는 묵칠이 술을 권할 것도 없이 잔을 들고 영원과 세 잔 연달아 마시자고 졸랐다. 영원은 아라 손에서 술잔을 치우더니 주육을 바라봤다.
“네가 와서 같이 마셔주어라. 아라가 취했다. 우린 가자.”
주육이 뒤에서 아라를 끌어안았다.
“술은 그만 마시자. 자, 이 몸이 술 깨게 해주마. 오늘 밤엔 밤새 깨어있어야지.”
류만은 손뼉을 치며 좋다고 외치는 묵칠을 멍하니 바라봤다. 영원이 그런 류만을 힐끔 바라보며 술을 홀짝이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웃었다.
“소칠, 류만이야말로 어여쁘다고 하지 않았냐? 이것 좀 봐라, 얼마나 매혹적인 요물이냐.”
묵칠도 술을 제법 마셔서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류만을 바라보다가 덥석 달려갔다.
“만아, 이 나리가 오늘 널 제대로 아껴주마. 가자.”
“봄밤은 일각이 천금이라지. 연향루의 무한한 봄빛을 방해하지 말고 우리도 이만 가자.”
영원은 일어서서 술에 잔뜩 취한 모습으로 소자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자람이 머뭇거리며 묵칠을 바라보자, 영원이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
“넌 누가 마음에 들었냐? 체면 차리지 마라. 오늘 여기는 내가 한턱낸다. 둘 다 마음에 드나? 그럼 둘 다 품어라. 너희 둘…….”
“칠야, 술에 취해서 허튼소리 하네. 오늘은 할 일이 남아서 안 된다. 칠야는 어느 소저를 데리고 갈 건가? 아니면 저택에 바래다줄까?”
소자람은 서둘러 거절했다. 집에 돌아가서 하천 지도를 꼼꼼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이번 임무는, 묵칠은 뒤꽁무니나 따라다닐 테고, 책임은 모두 자신이 져야 할 게 분명했다.
“이리 와봐라. 제대로 좀 보자.”
영원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남은 소저들을 불렀다. 소저들이 다가오자, 영원은 바짝 다가가 거의 얼굴을 붙일 듯이 하나씩 훑어보고는 뺨을 톡톡 쳤다.
“색은 있고 향은 없구나. 보기만 하는 건 괜찮다만, 품는 건……. 끅! 재미없지. 차라리 우리 저택의 여인이 낫다. 돌아가자. 대영 게 있느냐? 내일 가서 머리 장식 세 개 만들어서 이 미인들에게 주어라. 미인, 어떤 것이 좋으냐? 대영에게 말해라. 착하지.”
영원이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면서 여인들의 얼굴을 한 번씩 토닥이자 여인들이 매우 기뻐하며 얼른 예를 갖췄다. 영 칠야의 이런 통 큰 점이 너무 좋았다.
행수기녀는 류만을 얼싸안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며 나가는 묵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비연루를 잇는 측문으로 들어가는 걸 본 행수기녀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늘 연향루엔 어느 나리가 남는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자람이 영원을 부축해서 아래로 내려오자, 행수기녀가 후다닥 달려갔다.
“대영은? 소육이 술이 과했다. 일단…… 그 뭐냐…….”
영원이 취해서 정신이 없는 듯이 손을 휘두르자, 대영이 다급히 대답했다.
“머리 장식이요? 은자요?”
“그래, 그래. 은자를 행수에게 주어라. 내일 소육에게 받아오고. 그리고 머리 장식, 내일 가서 만들어서 하나씩 주어라.”
영원이 연향루 밖으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사환이 그를 부축하고 마차에 올랐다.
모두를 배웅한 행수기녀는 아래층에 서서 잠시 바라보다가 발끝을 세우고 위층으로 올라가서 살며시 문을 열었다. 그녀는 다다에게 소리 내지 말라고 손짓하고 바깥 칸 등불을 껐다. 그리고 다시 발끝을 세우고 내실 문 앞으로 다가가 휘장을 양쪽에 걸고 어두컴컴한 문밖에 서서, 넓은 침상에 누운 주육과 아라를 바라봤다.
잠시 보다가 조용히 물러 나와서 다다를 불러 나직이 분부했다.
“육소야의 모습을 보니 흥이 다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 밤을 새워도 부족할지 몰라. 밤참을 준비하고 뜨거운 물을 올려줄 테니, 이따 방 안에 들어가서 시중들어라. 다 가르친 것이니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잘 모셔라. 앞으로 이것보다 힘든 날은 얼마든지 올 것이다.”
다다는 입을 비죽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행수 어르신, 칠소야가…….”
“칠소야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더냐? 아라의 망상일 뿐이다. 앞으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마라. 넌 목숨이 아깝지 않은지 몰라도, 나는 아깝다. 들어가라. 잘 모시고.”
행수기녀의 목소리가 냉담했다.
영원 무리를 끌고 가라고 한 다음, 복안 장공주는 산에서 내려와 곧장 별원으로 돌아갔다.
계소영의 부축을 받고 마차에 오른 백 노부인은 보림사에서 멀어진 후, 휘장을 들어 올리고 계소영을 불렀다.
“영가아, 마차에 타거라. 할미와 이야기나 하자.”
계소영은 얼른 말에서 내려 마차에 탔다. 백 노부인은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장공주는 오후에 돌아가셨다.”
백 노부인은 알아서 차를 따르라고 눈짓했고, 계소영은 차를 따라놓고 마실 생각이 없는 듯 할머님의 말에 집중했다.
“점심 식사 후, 영원과 주가 소육, 묵 칠가아, 그리고 소가 대랑이 뒷산에서 꿩을 잡다가 장공주와 마주쳤다는구나. 장공주가 노발대발해서 네 사람과 훔친 꿩을 황상에게 보내 황상께서 처분 내리도록 했다.”
백 노부인의 말은 느리지만 또렷했다. 계소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후에 영원 무리가 줄곧 돌아오지 않고, 장공주도 법회에 돌아오지 않길래 이런저런 짐작을 했는데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