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명을 받고 복을 빌러 가다
보림사 후측문 곁 정당, 새하얀 장삼을 입은 소자람이 계소영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묵칠은 그 옆 의자에 앉아서 정신이 딴 데 팔린 듯이 고개를 들고 문밖을 바라봤다.
후측문이 열리고, 주육과 영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왔다.
“야우! 네 칠소야는?”
한눈에 묵칠의 사환 야우를 본 주육이 목소리 높여 물었다.
“안에 계십니다. 칠소야, 주 육소야와 영 칠야가 오셨습니다.”
야우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며 안쪽으로 기별했다. 영 칠야라는 말에 계소영의 눈썹이 휙 올라갔고, 소자람은 ‘잉?’ 소리를 냈다.
“형님이 왜 여길?”
묵칠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달려 나왔다.
“칠 형, 형님이 어쩐 일이오?”
묵칠은 뜻밖이고 기쁜 듯이 영원을 바라봤다.
“임무를 받고 왔지.”
영원은 나른하게 대답하고는 뒤따라 나온 계소영과 소자람을 향해 공수했다.
“사황자부의 측비가 회임하셨는데, 맥이 별로 좋지 않다네. 흠천감에서 봤는데, 사주팔자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사람이 법사를 하면 좋네, 마네, 그러다가 영원 형님과 내 사주 이야기까지 나왔고, 사황자가 황상께 말씀 올렸더니 황상이 우리 둘을 여기로 보내셨어. 우리는 흠차로 온 거지! 황명이라고!”
주육이 뒤에서 덧붙이면서 묵칠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묵칠은 고민이 많은 얼굴로 영원을 힐끔대느라 주육의 말이든 눈짓이든 못 듣고 못 본 듯했다.
계소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영원을 바라봤고, 소자람은 놀란 듯이 물었다.
“사황자부에 아이가 생긴다고? 그건 참 큰 경사군. 어느 측비신가?”
주육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손을 휘저었다.
“알게 뭐람! 다들 해 뜨기 전에 성에서 나왔지? 정오에 다 같이 복음각에 가자고. 벌써 꿩을 주문해 뒀어. 오늘 꿩은 현은으로 이미 다 정해두었지.”
“황명으로 온 건데, 공양해야 하지 않나?”
계소영이 싱글벙글 묻는 말에 주육이 어깨를 으쓱했다.
“흠천감에서 그런 말은 없었는걸! 이런 고생을 하는데 먹는 것도 각박하게 굴겠어? 게다가 성의 문제지, 먹는 건 아무 문제 없다고. 영원 형님, 안 그래?”
“음? 두 사람, 장공주께 문안은 올렸나?”
“바로 가야지! 야우를 만나서 몇 마디 하느라 그랬지!”
계소영이 상기하는 말에 주육이 후다닥 튀어 일어났다. 영원도 따라 일어나서 고민 가득한 얼굴로 공수하고 주육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주 육소야와 영원이 마당 밖에서 문안을 청한다는 말에 복안 장공주의 두 눈썹이 치켜 올랐다. 그녀는 백 노부인부터 바라보고 전 노부인을 바라보고는 들이라고 천천히 분부했다.
마당 안으로 들어간 주육은 티 나게 긴장한 모습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공손하게 걸었다. 영원은 조금 놀란 듯이 그를 돌아봤다. 주육이 복안 장공주를 무서워한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회랑 앞까지 간 주육은 계단을 올라서지도 못하고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유민, 장공주께 문안 올립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영원은 주육 곁에 서서 장공주를 직시하면서 일단 장읍부터 하고 느긋하게 무릎을 꿇었다.
“영원, 장공주를 뵙습니다.”
“네가 웬일이냐.”
복안 장공주가 염주를 돌리면서 나긋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속세를 떠난 자의 느낌이 물씬 들었다.
“아룁니다, 장공주.”
주육이 고개를 들지도 못하면서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했다. 영원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릎 꿇은 채 복안 장공주의 시선을 마주하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오호.”
복안 장공주는 매우 평온한 눈빛으로 영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도를 깨우치고 마음이 평온한 달인 같은 모습이었다.
“알았다. 물러가라.”
마당을 나간 주육은 무심결에 땀을 훔치며 투덜거렸다.
“난 장공주를 만나는 게 제일 싫어.”
영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형님, 이따 대전에 일찍 가자고. 좋은 자리를 잡아야지. 휴!”
주육은 조금 원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게 좋겠지. 한 번에 영원 형님에 씐 사악한 것을 깔끔히 털어내야지!
“사찰에 들어오니까 벌써 훨씬 나아진 것 같다.”
“정말? 내가 뭐랬어!”
영원이 어깨를 두드리며 하는 말에 주육은 놀라고 기뻤다.
법회가 아직 한참 남아서 두 사람은 다시 정당(静堂)으로 돌아갔다. 들어가서 앉자마자 묵칠이 영원 곁으로 바짝 다가와서 속삭였다.
“칠 형, 잠깐만 나와 봐. 할 말이 있어.”
주육부터 계소영까지 다 같이 바라보자, 묵칠이 머쓱한 듯 웃었다.
“별일 아니다. 그냥 형님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 별일 아니야. 작은 일이다. 칠 형, 우리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알았다.”
영원은 내키지 않는 듯 일어나서 묵칠을 따라 후측문 밖으로 나가서 가까이 있는 작은 정자로 들어갔다.
“어제 푹 못 잔 모양이구나?”
영원은 정자에 앉아서 난간에 기대 팔을 걸치고는 묵칠을 바라봤다. 묵칠은 뱃속 가득한 수심을 얼굴에 죄다 드러내며 영원 맞은편 돌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로 다 못 할 근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엊저녁뿐인가. 며칠 내내 잠을 못 잤다고.”
“응? 아라가 그렇게 치대나? 왜? 네가 허약하긴 하다만, 여인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였냐?”
영원이 묵칠의 가슴을 두드리며 야릇하게 웃었다.
“칠 형, 그런 게 아니야. 사나흘 아라에게 가지 않았어.”
묵칠은 정말로 근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왜? 벌써 질린 거냐?”
“아니야! 아직 좋아. 다만…… 아이고!”
묵칠은 몹시 고민되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속량해 달라잖아.”
영원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음? 그렇게 좋아하면서, 속량해주면 좋잖아!”
“난 아직 혼담도 안 정했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혼담 때문에 저택에 들이기 그러면 일단 밖에 두면 되지. 비구니 암자 같은 곳에 두면 되지 않아. 어차피 나이도 찼는데 금세 혼담이 오가고 집안을 꾸리겠지. 기껏해야 1, 2년이겠지. 신부를 들인 다음에 아라를 저택으로 들이면 되지, 이게 며칠 동안 잠도 못 잘 일이냐?”
영원이 난간을 붙들고 일어서려 하자, 묵칠은 더 고민인 듯 말했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우리 집안일, 전혀 모르나?”
“너희 집안일을 내가 알아 무얼 해.”
영원이 당당하게 반문했다.
“그래, 그래. 이런데 아버지는 영원 형님이 속 모를 사람이라고 말하시기는.”
영원의 동공이 확 줄어들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야 물론이지!”
묵칠은 입을 비죽이며 그를 흘겨봤다.
“그건 됐고. 우리 가문, 우리 백부, 아버지, 숙부가 첩을 들였다는 이야기 들었어?”
영원은 조금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정말로 몰랐네. 그저 묵 승상이 인품이 훌륭하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았지. 네 아버지는 몰라도 백부와 숙부도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단 말이냐? 그렇다면…… 부전자전인가? 그런데 너는 왜 그러냐?”
묵칠은 호사가처럼 보이는 영원의 모습에 어이없어졌다.
“그런 게 아니야! 칠 형, 나 지금 진지한 이야기 중인데!”
“그럼 해 보라고!”
“우리 할머님의 법도야. 우리 할머님의 법도가 바로 우리 묵씨 집안의 법이고. 우리 할아버님 대부터, 묵가 사내는 첩을 들이지 못해. 아들이 없어도 안 돼. 이런 것도 몰라?”
“켁! 그런 법도가 다 있었나? 그렇지만 네 할머님이 널 얼마나 아끼냐! 법도를 정한 것도 할머님이라면서. 부탁하면 바꿔주시지 않을까?”
묵칠이 답답한 듯 대답했다.
“안 돼. 게다가, 나도 아라를 집안으로 들일 생각은 없어.”
“음, 그럼 아라에게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영원이 위아래로 묵칠을 살폈다. 묵칠 이놈, 놀아도 분별은 있었군.
묵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말을 못 하겠어. 아라를 보고 있으면, 그 말이 나오지 않아. 게다가…… 아이고,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는 아라가 좋아. 하지만…… 그거 뭐지…….”
“이해했다. 주육이 계속 연향루에서 며칠 지내고 싶어 하던데, 그럼 너는…….”
영원이 말꼬리를 늘이며 묵칠의 표정을 빤히 살폈다.
“연향루는 장사하는 곳이고…… 그날 나도 아라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그게, 말이 나오지 않아서…….”
묵칠의 앓는 소리에 영원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일이다. 저녁에 돌아가면 연향루로 가자. 아라에게 술을 먹이고 주육의 뜻을 이뤄주면 되지. 내일 아침 일찍 선물을 보내면 끝날 일이다.”
묵칠은 걱정스러운 듯했다.
“그럼 아라는? 슬퍼할까 봐 걱정인데.”
영원이 일어서서 묵칠을 덥석 잡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툭툭 두드렸다.
“안심해라. 아라에게도 좋은 일이다.”
“칠 형, 아니면 저녁에 형님이 연향루에 묵는 건 어때? 아라가 형님을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 헤헤.”
묵칠이 실실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칠 형 같은 인품을 누가 마다하겠어? 형님 그거 들었어? 온 경성의 기녀가 하나같이 형님 시중들고 싶어 한대. 그러지 말고 저녁에 형님이 연향루에 묵으면 어때? 주육은 나중에 보내고. 형님, 아라 정말 괜찮다고. 솜 위에 누운 것처럼 폭신폭신하다는 말 있지? 딱 그대로야. 사람도 교태롭고, 목소리도 교태롭고. 움직이기만 하면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형님, 정말 심장을 꽁꽁 옭아맨다고.”
“됐다.”
영원은 어느새 다리 하나가 측문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사찰 안으로 들어가는데 말조심하자. 나는 요 며칠 일이 좀 있어서 정신이 어수선하다. 그럴 기분이 정말 아니다. 주육이 싫으면…….”
“그럼 주육으로 해. 응, 주육이라도 돼. 난 형님 생각해서 한 말이지. 하지만 괜찮아. 앞날은 길어.”
묵칠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영원을 따라 사찰 안으로 들어가서 더는 아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영원에게 귀신소동이 벌어진지라, 법회에서 일각 이상 머무른 적이 없던 주육이 줄곧 영원 곁에 있었다. 오전에 시작할 때부터 앉아 있던 그는 정오가 되자 기운이 빠져서 사환을 끌고 기어 나와서 허리를 두들겨 댔다.
“형님, 참 대단하네. 오전 내내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잖아! 얼른 가자, 어서 산에서 내려가서 일단 거나하게 먹고 보자고!”
영원이 막 일어서는데, 동자승이 조르르 달려와 두 사람을 향해 합장했다.
“영 칠야, 주 육소야. 장공주께서 공양 들게 두 분을 후원으로 모시고 오라십니다.”
“하아?”
주육은 순간 넋이 나갔다.
막 그쪽으로 다가가던 소자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쥘부채로 주육을 쿡쿡 찌르며 허리도 펴지 못하고 웃어댔고, 묵칠은 동정 가득한 얼굴로 주육을 바라보며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 푹 놓고 공양하러 가라. 네 꿩은 내가 대신 잘 먹어주마.”
계소영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흠차로 온 것이고, 사황자부를 위해 기원하러 온 것이니 당연히 성의를 보여야지. 하루는 공양밥을 먹어야 하는 게 맞네.”
“소칠, 이놈! 꿩을 먹겠다고? 어려움은 함께 겪어야지!”
주육이 후다닥 달려가 묵칠을 덥석 잡았다.
“이 몸이 공양밥을 먹는데 네가 꿩을 먹겠다? 가자! 먹으려면 같이 먹어야지!”
“놔라! 넌 황명을 받고 온 건데 어쩌라고! 저녁에 내가 한턱낼 테니, 이것 놓아라!”
“안 된다!”
묵칠이 손을 내저었지만, 주육은 죽어라 그를 끌고 갔고 묵칠은 손을 휘두르며 소자람을 잡아챘다. 세 사람은 그렇게 한 줄로 엮여서 후원으로 갔고, 영원이 계소영을 바라봤다.
“계 형 혼자 내려가는 것도 재미없으니, 같이 공양 들고 가지.”
“복음각 꿩보다 귀한 공양밥이군.”
계소영과 영원은 한 줄로 걸어가는 세 사람 뒤를 따라 복안 장공주의 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