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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134화 (134/463)

134화: 좋은 형제

영원은 풀 죽은 모습으로 거무죽죽한 눈을 가리켰다. 류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칠야, 아무래도 더러운 것을 만난 것 같아요. 풀어야 해요. 사찰에서 향이라도 올리세요”

운수가 주저하면서도 결국 말을 꺼냈다.

“칠야, 보림사에 한 번 다녀오세요. 복안 장공주가 법사를 열 때 다녀오시는 게 좋겠어요. 제 사부도 어느 해 칠야와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밤에 눈만 감으면 더러운 게 보였대요. 사람을 불러 법사를 열고 사찰에 올라가 향을 피워도 별 소용이 없었어요. 다급하니 아무 의원을 찾는다고, 복안 장공주가 보림사에서 법사를 연다는 말을 듣고 며칠 들으러 갔었어요.”

운수가 주 육소야를 힐끔 보며 말했다.

“육소야도 아시지요? 다들 복안 장공주가 복 받은 분이라고 하잖아요. 법사는 사흘 연속 이어졌고, 사부도 사찰에서 사흘 머물렀어요. 돌아왔더니 나았어요. 지금껏 더러운 걸 다시는 안 본답니다.”

류만도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맞아요, 맞아! 저도 들었어요. 복안 장공주의 법사는 복을 내리고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는 데 제일 좋대요. 조 시랑이 하는 말을 들었었어요. 태의정 오 태의 댁에 노부인이 한번은 더러운 것을 건드렸는데, 아무리 방법을 써도 소용이 없다가 법사 한 번 듣고 돌아왔더니 괜찮아졌대요.”

“맞는 것 같다!”

주 육소야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이 턱을 문질렀다.

“어쩐지, 장공주의 법사를 듣고 돌아온 날엔 유난히 달게 자더라니.”

영원은 주 육소야를 흘깃 바라봤다. 경성에서 보림사까지 오고 가느라 시달리고 법회에서 이런저런 사람을 상대하고…… 지쳤으니 단잠을 잘 수밖에!

영원이 성가신 듯 손을 휘둘렀다.

“사내대장부가 무슨 그런 짓을!”

“사내대장부도 사람이지! 형님, 내 말 들으시오. 이런 건 믿어야 해. 이런 일은…… 모르는 일이라고!”

주 육소야가 재빠르게 하는 말에 운수도 얼른 말을 받았다.

“육소야 말씀이 맞아요. 진왕 가문 양 구야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어요. 바로 이 비연루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요. 눈이 휘둥그레져서, 피가 철철 흐른다느니, 곳곳에 머리통이라느니. 얼마나 무서웠게요. 목소리가 제일 무서웠어요. 마침 대상국사 청공 큰스님이 지나가다가 그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한참 경을 읽고 나니 괜찮아졌어요.”

영원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그런 우연이? 무슨 경을 읽었느냐?”

“주루의 심부름꾼들은 원래 이런 구경을 좋아해서 가깝게 다가갔었는데, 그중 하나가 ‘지장경’인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너무 빠르게 읊어서 제대로 듣진 못했대요.”

류만이 서둘러 덧붙였다.

영원은 아까보다 더 나른한 모습으로 샛눈을 뜨고는 소리쳤다.

“이 몸이 양 구야 같은 무지렁이냐! 어딜 비교해!”

“형님, 거뭇거뭇한 눈 밑 좀 보라고.”

주 육소야가 가차 없이 대답했다.

“꺼져라!”

영원이 아픈 곳을 찔린 듯이 화를 냈다.

“형님, 한번 다녀옵시다. 그냥…… 우리 꿩 먹으러 다녀올까? 지난번에 산에 갔을 때 한 입도 못 먹었잖소. 형님이 다 내 얼굴에 던졌잖아. 보림사 뒷산의 꿩 맛을 못 봤지? 그 맛! 쯧쯧, 정말 절묘하다고! 그걸 못 먹어 봤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다녀와야겠군!”

주육은 방법을 바꿔서 영원을 설득했고, 영원은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며 다리를 꼬고 흔들었다.

“류만, 운수, 너희들 잠시 자리를 비켜주어라. 네 육소야와 속말 좀 해야겠다.”

류만과 운수가 웃으며 물러가자, 영원이 손짓으로 주육을 가까이 불러서 속삭였다.

“소육, 이 형님이 솔직히 말하마. 내가 좀 곤란한 일이 있다.”

“무슨 곤란한 일? 형님, 말만 하시오. 우리 형제에게 어려운 일이 뭐가 있어.”

주육이 망연한 얼굴로 하는 말에 영원은 다리를 흔들며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휴! 소육,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어려운 점이 있어.”

“말하는 것 좀 보게! 이 경성에서 누가 형님을 괴롭힌다고. 이라도 드러내면 우리 형제들이 그 자리에서 이를 다 뽑아 버릴 텐데! 형님, 그만 뜸 들이고 어서 말해!”

주육이 다급한 얼굴로 바짝 다가갔다. 원래 인내심이라곤 없었다. 영원은 난처한 듯 씁 소리를 내다가 한참 만에 허벅지를 내리쳤다.

“그래, 우리 사이에 못 할 말도 없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야기하기 전에, 물어볼 말이 있다. 솔직히 말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지 않거나, 대답하지 않으면 나도 말 못 한다.”

영원의 진지한 얼굴에 주육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푹 놓으시오. 나, 주유민이 아는 것이라면, 혹시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알면서 모른다고 한다면 이 자리에서 벼…….”

“됐다! 쯧쯧. 사내대장부가 여인네처럼 맹세는 무슨. 형님이 널 못 믿겠느냐?”

영원이 얼른 주육의 말을 자르자, 주육은 놀랍게도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답해 봐라. 너희 가문, 혹은 사황자께서 너더러 나를 조심하라고 하더냐? 아니면 지켜보라고 하더냐? 내가 이런저런 짓을 할까 봐 걱정하더냔 말이다. 어찌 됐든 나는 영 황후의 친아우 아니냐. 그런 말 들은 적 있냐?”

영원은 느긋한 얼굴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서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육의 표정을 빤히 살폈다. 주육은 순간 거북해졌다.

“형님, 형님은 영리한 사람이지. 그건…… 그러긴 했어. 아버지가 한번 말씀하시길래, 형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사황자도 물으시길래 형님이 경성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사황자라고 여러 번 그러더라고 내가 말했지. 고모도 형님 이야기를 했었고…….”

가책을 느끼는 듯 영원을 바라보는 주육의 목소리가 갈수록 낮아졌다.

“고모는…… 아무래도 일개 여인이라 그냥 대충 얼버무렸지. 형님, 신경 쓸 것 없어. 어떤 사람인지는 시간이 흐르면 다 알게 된다잖아.”

“영 황후가 아이를 낳을 때, 복안 장공주의 도움이 있어서 무사히 낳았다던데, 맞냐?”

영원이 주육을 바라보며 묻자, 주육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사실인걸. 이 일로 고모가…… 큼! 아무튼 여인네의 일이니 우리가 상관할 것 없어.”

“복안 장공주가 보림사에서 법사를 여는데, 내가 보림사에 갔다가 네 고모가 생각이 많아지면 어쩌고? 황상은 네 고모가 하는 말씀을 다 듣잖냐. 네 고모가 생각이 많아지면 황상도 생각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고도 내가 살 수 있겠냐? 차라리 귀신에 씌어서 죽는 게 낫지! 아이고!”

영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정 안 되면 경성을 떠나지 뭐.”

“그건 또 그렇군. 형님, 상황이 쉽지 않군! 생각 좀 해 보자……. 제대로 생각하라고!”

주육이 양손으로 머리를 내리치는데, 영원은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며 탁자에서 포도 접시를 들어 올려 알알이 뜯어 먹었다.

“아니면……. 아냐! 그럼……. 이것도 안 되고!”

주육의 미간이 툭 불거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며 영원을 바라봤다.

“형님, 형님은 나보다 똑똑하니까, 형님도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우리 이제 어쩌지?”

영원이 크게 하품했다.

“내가 어찌 알아. 요 며칠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잤구만.

어제도 생각했지. 도저히 안 되면 어전사에 있는 작은 거처로 옮기지, 뭐. 궁에선 분명 잘 자겠지. 아이고! 황손은 이게 좋다니까! 귀신도 두렵지 않잖아.”

주육이 갑자기 좋은 수가 떠올랐는지 소리쳤다.

“맞다! 사황자를 찾아갈게! 가서 이렇게 말하면……. 아니다, 아니야. 이게 창피할 일도 아니고, 그냥 터놓고 말하자. 나와 형님이 보림사에 다녀오도록 사황자가 말을 꺼내면 돼. 사황자가 한 말이면 고모도 별말 하지 않으실 거야! 그래, 이렇게 하자. 내가 사황자를 만날게!”

주육은 들떠서 펄쩍 뛰었고, 영원은 이가 시린 듯 입을 벌렸다.

“아이고! 이게 왜 창피한 일이 아니냐! 얼마나 창피하냐. 소육, 형님 체면 좀 생각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말아라.”

주육은 문 앞까지 달려가서 영원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창피할 게 뭐가 있어? 형님도 참. 형님, 저택에 돌아가지 말고 그냥 여기에 있으라고. 운수와 류만의 시중을 받으면서 즐기고 있으라고. 신나게 놀고 보면 잠도 잘 오겠지! 내가 불러올게!”

주육은 펄쩍 뛰며 내려갔고, 류만과 운수가 곧 올라왔다. 영원은 한참 동안 나른하게 의자에 누워 있다가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저었다.

“위봉낭을 불러서 날 데리고 내려가라고 해라. 내가 오늘은 기력이 하나도 없다.”

류민은 빙그레 웃었고, 운수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차에 오른 영원은 나지막이 위봉낭에게 분부했다.

“최신에게 전갈해라. 진왕부의 양 달팽이와 안면을 터야겠다. 빠를수록 좋다.”

하늘을 거슬러 운명을 바꾸는 건 법술이 아니라 희생에 달렸다고 소 사야가 말했다. 그 희생이 무엇인지, 사람 목숨인지, 성 하나를 도륙하면 충분한지 물었지만 소 사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양 달팽이가 피와 머리통을 봤고, 청공 큰스님이 지장경을 읽었단 말이지.

이동은 복안 장공주가 사실 게으른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자신이 차를 내리기 시작한 후로 장공주는 다구를 건드리지도 않았고, 이제 법회 일을 몽땅 떠넘기고 아예 상관하지도 않았다.

보림사 후원, 방장실과 비스듬히 맞은 편에 정원 문이 달린 작은 마당이 복안 장공주 전용 정실(靜室)이었다. 작은 마당 안에 있는 삼간 상방은 보림암에 있는 작은 마당과 거의 흡사했다.

백 노부인은 여전히 매우 일찍 도착했다. 계소영이 백 노부인을 부축해서 작은 마당으로 들어왔을 때, 회랑 아래 복안 장공주는 승복을 입고 늘 앉던 자리에, 이동은 장공주 맞은편에 푸른 능라 웃옷에 난초를 수 놓은 눈처럼 하얀 백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폭이 매우 넓어서 활짝 펼쳐두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계소영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치마에 시선을 둔 채 백 노부인을 부축해서 앉히고는 모두를 향해 장읍하고는 공손하게 물러갔다.

백 노부인은 차분하게 차를 내리는 이동을, 복안 장공주는 비딱하게 계소영을 바라봤다.

“드디어 과거를 보기로 했다며?”

계소영이 마당 문을 나가는 걸 본 복안 장공주가 고개를 돌려 백 노부인을 바라봤다.

“혼인할 때가 되었으니 철이 들어야지요.”

백 노부인은 에둘러 대답했다.

“정해졌나? 어느 댁 낭자인데?”

복안 장공주가 백 노부인을 살피며 물었다.

“아직입니다. 내년 춘시가 끝나고 생각해 봐야지요. 이런 때 혼사를 논하면 집중 못 합니다.”

백 노부인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이동은 열심히 차를 내렸고, 두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일상사를 이야기했다.

전 노부인이 딸 묵 부인을 붙들고 마당 문 앞에 나타났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묵 부인이 위아래로 월백색 옷을 입고 머리엔 진주 장식 하나만 달고 나타나자 이동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봤다.

복안 장공주와 백 노부인은 둘 다 매우 담담했고, 백 노부인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묵 부인이 자리에 앉기 전에 예를 갖추며 고했다.

“장공주의 덕을 보겠군요. 장공주의 기복 발원 법회가 끝나면 제가 수륙도량(水陸道場: 수로, 육로에서 죽은 망령을 위로하는 재)를 열겠습니다.”

이동은 번뜩 생각났다. 그랬다. 소 현비는 가장 더울 때 주 귀비에게 벌을 받아서 화원에 무릎 꿇고 있다가 더위 먹고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요 며칠이리라. 묵 부인이 이런 정갈한 소복을 입은 이유가 바로 소 현비의 기일이기 때문일 테고, 수륙도량은 당연히 소 현비를 위해 여는 것이리라.

백 노부인과 묵 부인은 수륙도량에 대해 이야기했고, 전 노부인과 복안 장공주는 나직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이동은 열심히 찻잎을 갈아 차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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