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동-133화 (133/463)

133화: 귀신 들렸을지도 모를 영원

“백 노부인은 젊었을 때 분명 절세가인이셨을 거예요.”

이동은 여전히 풍채가 탁월한 백 노부인을 떠올리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응. 백 노부인은 창주부 백 노표사가 혼자 키운 딸이었어. 예쁜 건 둘째치고, 보기 드문 안목, 식견을 갖췄지. 젊을 때는 성격이 올곧고 거칠었대. 어찌 됐든, 계 노승상은 흠씬 두들겨 맞고, 삿대질 당하면서 혼나고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는군. 바로 떠나지도 못하고 며칠 요양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상태가 되었을 때 백가를 찾아갔어. 백 노부인과 혼인하고 싶다고 백 노표사를 만났다가, 백 노표사가 뿌린 찻물을 뒤집어쓰고 쫓겨났지.”

복안 장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 노승상은 감정적이고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 기분을 숨기지 않았지. 강호 사람 같은 느낌이 물씬 났어. 오히려 백 노부인이 깊이가 더 깊었지.”

이동은 백 노부인을 떠올려봤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가 알고 지낸 세월 동안 백 노부인에게서 강호 느낌은 전혀 받은 적 없었다. 백 노부인의 노련함과 침착함에 버금갈 만한 사람은 전 노부인 정도였다.

“계 노승상은 창주부에 머물기로 하고 강남으로 사람을 보내서 백 노부인과 혼인하려고 하는 일을 부친께 알렸어. 직접 창주로 와서 혼사를 넣어달라고. 서신을 받은 계 어르신은 밤낮없이 달려서 창주로 왔어. 혼사를 넣으러 온 건 아니고, 아들이 귀신에게 홀렸다고 생각해서였지. 그렇게 창주에 도착한 계 어르신은 며칠 만에 계 노승상에게 설득되었어. 정말로 후한 예물을 준비해서 혼사를 넣으러 백가에 찾아갔지. 그렇게 백 노부인이 계가와 혼인했어.”

복안 장공주는 기분을 알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동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계 노승상 같은 좋은 사내가 장공주에게 혼삿말을 넣는다면 분명 기꺼이 혼인해서 현명한 신부가 되었겠지.

“계 노승상이 말하길, 백 노부인은 계가에 들어간 지 반년도 되지 않아서 온 계가 사람의 환심을 샀대. 백 노부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계 노승상은 백 노부인과 삼십여 년 함께 하면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어. 계 노승상이 있는 곳엔 백 노부인이 항상 곁에 있었지. 계 노승상이 눈을 감을 때까지. 계 노승상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어.”

“백 노부인이 무예를 했었어요?”

이동은 너무나 궁금했다. 백 노부인이 손을 쓰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적어도 계 노승상보단 기운이 세겠지.”

복안 장공주는 이동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계 황후는 계 노승상을 많이 닮았고, 백 노부인은 별로 닮지 않았어.”

이동은 갑자기 화제가 계 황후로 넘어가자 살짝 얼떨떨해졌다.

“백 노부인과 계 노승상에겐 계 황후와 계소연, 이렇게 아들 하나, 딸 하나뿐이었어. 백 노부인은 계소연보다 계 황후를 훨씬 총애했지. 그 당시에.”

착각인지 몰라도, 이동은 복안 장공주의 말투에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어머니가 황상을 위해 계 황후를 궁으로 들이려고 했을 때, 백 노부인과 계 노승상 모두 승낙하지 않았어. 황상과 주 귀비는 청매죽마에 마음도 통한 사이니까. 아버지가 몇 번이고 두 사람을 맺어주려고 했는데, 그 점만으로도 백 노부인과 계 노승상이 금지옥엽을 황상에게 주려고 할 리가 있겠어?”

이동은 침묵하며 복안 장공주를 바라봤다.

“황상이…… 그땐 황자였지. 계 노승상과 백 노부인 앞에 무릎 꿇고 하늘에 맹세했어. 계 노승상이 백 노부인을 대하는 것처럼 평생 계 황후를 대하겠다고.”

이동의 심장이 뛰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백 노부인이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 그때 마음이 약해졌던 거야.”

복안 장공주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계 황후는 성격이 계 노승상과 매우 닮았어. 정정당당하고, 남에게 말 못 할 일은 하지 않아. 그런 성격은 원래 황후감이 아니야. 주 귀비가 없었더라도 말이야. 계 황후가 살아있을 때부터 계가는 주가를 지극히 미워했어. 주 귀비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온 주씨를.”

이동은 힘껏 찻잔을 쥐며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장공주의 말이 갈수록 거침없어졌다.

“하지만 계가는 음모 술수에 가장 소질이 없더군.”

복안 장공주는 가볍게 웃더니 또 웃었다. 그렇게 연달아 은쟁반에 옥 굴러가는 소리처럼 까르르 웃어대는데 이동은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젠 잘 되었지. 영원이 있잖아.”

복안 장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회랑 가장자리로 걸어가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받으면서 말했다.

“계가에서 허리를 굽힐 수 있을는지 문제지만.”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이동은 전생에 계소영이 수녕백부에 아첨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복안 장공주는 고개를 돌리고 잠시 이동을 빤히 바라봤다.

“그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허리를 굽힐 수 있다니……. 그러면 아주 좋지.”

“걱정되지 않으세요?”

이동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걱정? 누굴?”

장공주가 고개를 갸웃하고 이동을 바라봤다. 이동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마주 봤다.

“영원? 난 영원을 좋아하지도 않는걸. 계가? 계가에 미안할 일을 한 적 없어. 그리고 어머니와 황상은, 엄중한 처벌이든 후한 상이든 군주가 내리는 건 모두 은혜야. 예전에 계 노승상이 내게 한 말이야. 그렇다는데, 계가가 불만일 게 뭐가 있어. 또 누구?”

복안 장공주는 손바닥에 빗물을 털고서 천천히 돌아왔다.

“황상? 만민의 주군인 황상이니 내가 걱정할 것 없고. 주가? 주가 같은 집안은 원래 부귀한 때가 있으면 몰락할 때도 있는 법이야. 건물이 지어지고 무너지고, 이 경성, 이 천하, 어디든 다 그래. 또 누가 있는데? 너? 아니면 나?”

“이 세상은요? 선황은요? 임가 조상 대업은요?”

“이 세상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이러나저러나 몇몇 가문들이 엎치락뒤치락 영광을 누렸다가 멸문됐다가 할 뿐이지. 그리고 선황은, 다 같은 손자인데 누가 대통을 잇든 상관없지 않니? 백번 양보해서 말해도.”

복안 장공주는 나무 아래 개미 이야기를 하는 듯이 담담하기만 했다.

“세상은 항상 혼란해. 올해가 아니라면 내년에 혼란해져. 사람은 언젠가 죽어. 올해 안 죽으면 내년에 죽어. 임가 조상 대업? 그게 언제부터인데? 임가 사당 맨 앞에 걸린 선조부터 말해 볼까? 그때는 임가엔 두부 가게 하나밖에 없었어. 게다가 장사도 그저 그랬어. 임가의 조상이라 봐야 두부 가게였을 뿐이야.”

복안 장공주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흔들었다. 이동은 힐끔 그녀를 보고 일어서서 찻잎을 꺼내와 다시 차를 내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 관심은 왜 가지시는 건지.

복안 장공주도 입을 다물고 다리를 흔들면서 이동이 물을 끓이고 차를 갈아 가루를 내고 차를 내리는 걸 빤히 바라봤다.

차 한 잔 마신 복안 장공주가 나른하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움직일 건지 슬슬 이야기할 때가 되었어. 법사 한 번 제대로 열어야겠네. 천하 만백성을 위한 기복 발원을 해야겠어.”

영원 형님이 요 며칠 이상한 걸 눈치챈 주 육소야는 조회가 끝날 시간쯤 되자 관아에서 빠져나와 선덕문 앞에서 목을 빼고 그를 기다렸다.

영원은 눈 밑이 거뭇거뭇한 얼굴로 내내 하품하며 어슬렁어슬렁 선덕문으로 나왔다. 주 육소야는 후다닥 달려가 영원의 사환 대영, 대웅을 앞질러서 영원 앞으로 다가가서 유심히 그를 살폈다.

“형님, 눈 밑이 왜 이래? 무슨 일이야? 형님 체력으로는 밤새 미인 스물을 끼고 놀았대도 이 지경은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일이야?”

“일은 무슨 일.”

영원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또 하품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다. 돌아가서 잠이나 자련다. 나중에 다시 모이자.”

영원은 눈물이 나오도록 크게 하품하며 주 육소야를 지나쳐서 말에 올라타려 했다. 주 육소야가 그를 덥석 잡았다.

“형님! 우린 형제 아니오. 내게 못 할 말이 어디 있어. 형님, 꼴 좀 보라고. 눈먼 사람도 이상한 걸 알아보겠네. 자, 자, 가자고. 비연루에 가자. 벌써 운수를 불렀어. 운수의 노래에 맞춰서 류만의 춤을 보자고. 형님, 좀 풀어야 한다고.”

영원은 주 육소야에게 잡혀서 휘청거리며 앞으로 끌려갔다.

“노래고 뭐고 됐다고. 소육, 놓아라. 막 조회가 끝나서 사람도 많은데, 이렇게 밀고 당기고. 이 몸이 네 단수(斷袖)냐!”

(※단수: 동성애. 한 나라 애제가 신하인 동현과 정을 통했는데, 애제가 일어날 때 동현이 자는 걸 깨우지 않으려고 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그 말에 주 육소야가 껄껄 웃었다.

“단수? 형님, 정말 나와 그럴 생각이 있다면야 나야 좋지!”

영원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되었어. 잡아끌지 마라. 좀 봐라, 문무백관이 가득하다. 그리고 네 외사촌도 있어. 다 보고 있다고. 잡아당기지 마라. 간다, 가.”

“누가 보든 무슨 상관이람. 우리가 뭐가 무서워서?”

그러면서 주 육소야는 영원을 놓았고, 두 사람은 말에 올라 비연루로 곧장 달려갔다.

영원은 온몸에 뼈가 뽑힌 듯이 흐느적거리며 널브러져 정신이 딴 데 팔린 듯이 연신 술을 마셨다.

“형님! 대체 무슨 일이야!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돌려보내지 않겠어!”

주 육소야는 초조해져서 의자를 끌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운수, 류만. 너희들 평소엔 시중을 잘 들더니, 오늘은 왜 이리 아둔하게 구느냐? 형님이 기분 안 좋아 보이는 거, 안 보여?”

류만과 운수는 후다닥 양쪽에서 어깨를 주무르고 다리를 두드렸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냐…….”

“말도 안 돼! 형님!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가 있소? 말만 해. 경성에서 우리가 못 할 일이 뭐가 있어서!”

영원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매우 갈등되는 것처럼 결단을 내렸다.

“그래 알았다. 그저께, 너무 더워서 후화원 호수의 누각에서 밤새 있었다. 난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 인시 정각에 깼지. 눈을 떴더니 누각 안이 온통 물이더라. 밟았더니 발등까지 물이 덮였어.”

“비가 왔어?”

주 육소야의 첫 반응이 그렇자, 류만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육소야, 그저께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는걸요.”

“그럼 무슨 일이야? 사환이 청소하느라? 형님이 자고 있는데 그것들이…….”

주 육소야는 말을 맺지 않고 안색이 변해서 다시 물었다.

“형님, 대체 어찌 된 일인데?”

“나도 모르지. 대호와 대걸이 당직이었는데, 정자에 올라오지 않고 구곡교 저편에 서서 지켰거든. 정자에 온 사람은 없었고, 밤에 호수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더라고 하더라. 여러 해 나를 따른 아이들이라 다 미덥다.”

영원은 매우 고민인 듯 말했다. 귀신을 깊이 믿는 류만과 운수는 안색이 다 창백해졌고, 운수는 무심결에 손목에 두른 염주를 쓰다듬었다.

“호수에 괴물이 있나? 어쩐지, 그저께 사람을 불러 호수를 정리하라고 하더니. 그것 때문이었소?”

“음. 커다란 그물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다 건졌지. 작은 새우 하나 놓치지 않았고, 물고기를 몇 근이나 건졌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주 육소야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영원을 바라봤다.

“그저께 새벽에 갑자기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지더라. 눈을 떠보니, 창밖에 허연 그림자가 보였지. 알잖냐, 내가 간이 큰 거. 바로 검을 뽑고 달려나갔지. 창문으로 뛰어 내려갔는데, 온 뜨락에 아무것도 없었다.”

“헉!”

주 육소야는 너무 놀라 솜털이 다 곤두섰다.

“혀,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어찌 알아. 내가 알면…… 안들 뭘 어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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